출생에 대한 저주 (욥기 3장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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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 랍 벨(Rob Bell)목사라는 분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합니다.
"고통은 우리를 정직하게 하는 방법을 갖고 있다"
(Pain has a way of making us honest")
특별히 오늘 본문을 통해 욥의 고통 중에서 평소에 드러나지 않은 모습을 보게 됩니다. 즉, 고통이 한 인생을 정직하게 하는 그 방법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2. 욥기 1장부터 2장까지, 사탄은 두 가지 질문을 하나님께 던지고, 그 질문에 욥은 두 가지 근사한 고백을 합니다.
첫째 질문은 욥의 신실함은 하나님께서 그의 부요함을 지켜 주셨기 때문 아닙니까? 였습니다.
욥의 그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1장 21절에 고백합니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 지니이다 하고"
위대한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질문으로, 사탄은 모든 사람들도 자신의 목숨과 건강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소유도 내던질 수 있으니, 오히려 그의 건강을 빼앗아 보소서 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건강을 쳐도 된다는 허락을 하나님께 얻게 됩니다. 심지어 그의 아내가 합세하여 욥을 저주합니다.
그러나 그 두 번째 질문에 대한 욥의 믿음의 고백은 대단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욥은 고백하길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2:10)
그런데 점차 시간이 지나고, 또 지나자 그는 당하는 병의 고통을 못 이겨, 결국 입을 열어 자기의 출생을 저주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본론)
자신의 삶에 대한 저주
1. 욥은 본문에서 특별히 크게 세 부분으로 자신의 출생과 삶을 저주하는데, 첫째로, 3장 1-9절까지 계속 반복적으로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거늘" 이라고 고백하며, 그의 부모가 그를 잉태한 날의 밤을 저주합니다.
둘째로, 그의 출생을 저주합니다. 10-11절에 결국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이는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여 내 눈으로 환난을 보게 하였음이로구나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라고 합니다.
즉, 임신된 그날 밤부터, 임신하여 어머니의 태중에 있었던 그 시간들을 저주하고, 1절부터는 출산 이후 모든 필요를 채운 어머니의 '젖가슴'을 저주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성장 자체를 저주합니다.
16절에 이어서, 고백하기를 "어찌하여 나는 죽은 채 태어나, 빛을 보지 못한 아기처럼 묻히지 못했던가?"라고 한탄을 합니다. 그랬다면 죄 된 인간으로 자라나지 않아 온갖 고통을 모르고 영혼의 쉼을 얻을 수 있을 텐데 라고 고백합니다.
마지막으로, 결국, 성인이 된 지금을 저주합니다. 22절 입니다.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죽음을 구하는 것을 더 어렵다" 고 합니다.
즉 인생의 고난을 받으며 하루 하루 살아가기 보다, 아무런 인생의 고통의 과정 없이 죽는 게 더 낫다는 것입니다.
23절에 마지막 속마음을 최종적으로 내어 놓습니다.
"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욥은 비관의 극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즉, 그에게 미래가 없다는 사실이 욥을 이러한 한탄과 저주를 입으로 고백하게 한 것입니다.
고통이 계속되자 그는 고통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실 일들에 대해 생각하기 보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상태에서 인생을 마무리 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사로잡히게 된 것입니다. 그에게 더 이상 미래가 없음과 내일이 없음을 인식하자 고통이 그를 정직하게 한 것입니다.
어떤 분이 고통의 원인을 5가지 종류로 구분하였습니다.
첫째로 자업자득(인과응보)입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잘못 먹고 에덴동산에 쫓겨난 것과 같습니다.
둘째로 집단처벌입니다. 유태인의 속담처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으면 아들의 이가 시큼해진다" 누군가의 잘못으로 전체가 처벌 받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사람이 언뜻 이해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 때문입니다. 마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물었던 질문과 같습니다.
"선생님 저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자기 죄입니까, 그의 부모의 죄입니까?"
"자기 죄도 아니고 부모의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요9:3) 라고 하셨습니다.
넷째로 사랑하는 이에게 주는 교정의 목적으로 주는 선물입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히12:6) 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다섯째, 대속입니다. 자신이 고통을 격음으로 다른 누군가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기 위함입니다. 즉,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견해를 참조해 볼 때, 욥이 받았던 고통은 매우 억울할 수 있었습니다. 또는 마땅한 벌일 수도 있었습니다. 이해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수수께끼일 수도 있었습니다. 아무리, 고통이 "변장된 축복"이라고 할지라도, 그 고통이 나에게 찾아와 계속 있다면… 어떤 누구라도 불안하거나 불평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서 생각해 볼 사실은 "고통은 우리를 정직하고 솔직하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내면에 분출되지 않고, 표현되지 않은 모든 잠재된 것들이 모두 터져 나온 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시고 대제사장의 뜰에서 신문 당하실 때, 베드로도 그 곁에 섰다가 한 여인이 계속 묻습니다. "너도 그 제자 중에 하나가 아니냐" 그러나 베드로가 예수를 3번이나 부인하고 났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닭이 웁니다. 그리고 베드로도 뒤 돌아서서 울었습니다. 오! 나의 나약함이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조반을 차려 주신 이후,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묻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으실 때, 아마 베드로는 눈물을 터트리며 이렇게 고백했을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그 동안 베드로의 심경이 어땠겠습니까?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한 이후 보낸 하루 하루가 어떠 했을까요? 그는 제자 중 수제자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자 아닙니까?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얼마나 근사한 고백을 했었습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게다가,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 날밤, 함께 있다가 예수님을 잡으려는 자, 말고의 귀까지 자른 자 아닙니까? 그러나 그에게 닥친 고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잡혀 고난 당하시며, 아무런 힘 없이 당하는 모습에 어쩌면 베드로는 "내일이 없구나" 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계속 시간은 지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계속 고난을 당하시고 결국 십자가에서 처형당했습니다. 베드로에게 있어 예수님은 내일이고 미래였습니다. 그러나 그 미래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왜 그랬던 것일까요?
바로 예수의 고난 뒤에 있을 영광, 십자가 뒤에 숨겨진 하나님의 역전(부활, 승천, 재림 등)을 베드로는 믿음의 눈으로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욥을 가장 힘들게 한 것도 이런 부분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화려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음산하고, 우울하며 죽음과 고통 의 총체입니다. 그곳에 우리의 모든 죄악이 담겨 있습니다. 그곳에 우리의 숨겨진 악의와 의도들도 모두 있습니다. 보여진 죄들, 보여지지 않은 모든 죄악들이 다 있습니다. 그 고통의 십자가에서 우리는 철저히 솔직해져야 합니다. 죄의 고통을 철저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고백하여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먼저 나의 가면을 벗어야 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십자가 뒤에 숨겨진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l 이십 년 전 즈음, 제가 종로 5가에 있는 기독교 방송국에서 정태기 목사님의 치유목회에 대한 강의를 삼일 정도 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국에서 유명한 치유상담 목회 전문가이신 정태기 목사가 미국에서 신학원 공부를 하던 시절이야기입니다.
상담심리학에 대하여 학점을 따야 했는데, 그 심리학 교수가 계속해서 좋은 점수를 주지 않더랍니다. 그래도 정태기 목사는 참고 인내하며 불편한 마음을 숨기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다시 또 시험을 보고 또 리포트를 썻더랍니다. 그러길 몇 번을 해도 그 담당교수는 학점을 잘 주지 않더랍니다. 결국 견디다 못한 폭발하기 일보 전 까지 이르러서, 그는 교수를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얼굴이 시뻘개져 가지고 왜 자기에게 이렇게 나쁜 점수를 계속해서 주느냐 내가 얼마나 노력 했는 줄 아느냐! 당신은 나를 편견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냐는 등의 내용의 말을 하며 분노하며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교수님이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그래! 바로 그것이야! 너는 화가 나면 화가 난다고 말해야 하는데, 너는 여태껏 그걸 못했어! 자기에게 솔직하지 못했어. 내가 바라는 것이 바로 지금의 너야!” 라고 하면서, 그제서야 좋은 학점을 주어 그 과목을 통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입니다.
결론)물론 우리는 사람 앞에도 정직해야 합니다만, 나의 가족에게 정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 앞에 더욱 정직해야 합니다.
정직해야만이 하나님께서 나를 건지실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내가 정직하게 하나님,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구원하옵소서! 라는 고백이 필요합니다. 오늘 밤도 우리는, 주여! 난 연약하나이다! 나를 도웁소서 라는 고백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성도된 우리에게는 뜻 없는 고난은 결코 없음을 믿고 인내할 수 있는 이 밤이 되시길 바랍니다.
참고: 박창용(심플하게)/편집: 익선 102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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