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강해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첫 번째 답변(욥6: )

호걸영웅 2014. 12. 21. 04:44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첫 번째 답변(6: )

쉬운 번역

[] 6:1

욥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 6:2

"! 내 분노와 내 모든 재앙을 저울에 한번 올려 봤으면.

[] 6:3

그것은 바다의 모래보다 무거울 텐데. 내 말이 성급했던 것은 이 때문이라네.

[] 6:4

전능자의 화살이 내 안에 박혀 내 영이 그 독을 마시고, 하나님의 공포가 나를 엄습하고 있네.

[] 6:5

들나귀가 풀밭에서 울부짖는가? 황소가 꼴 앞에서 '음매!' 하고 우는가?

[] 6:6

맛 없는 것을 소금 없이 먹을 수 있는가? 소금 없이 달걀 흰자가 무슨 맛이 있겠는가?

[] 6:7

그런 것은 내 입맛에 맞지도 않고 보기도 싫은 음식이네.

[] 6:8

나는 간청하고 싶구나.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 6:9

내 소원은 하나님께서 나를 치셔서 그 손으로 나를 죽이시는 것이네.

[] 6:10

그렇게 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난 거룩하신 분의 말씀을 한 번도 거스른 적이 없다는 사실, 그것이 이 고통 중에서도 내게 기쁨이 되고 위로가 되네.

[] 6:11

나에게는 이제 더 이상 견딜 힘이 없어. 견딘다고 무슨 소망이 있겠는가?

[] 6:12

내가 바위같이 강한가? 내 몸이 무슨 놋쇠인가?

[] 6:13

나는 이제 의지할 것이 하나도 없네. 살아날 방법이 전혀 없어.

[] 6:14

고통 당하는 친구를 동정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일이야.

[] 6:15

나는 친구들을 믿을 수가 없구나. 자네들은 마치 말랐다 불어났다 하는 시냇물 같아.

[] 6:16

그런 시냇물은 얼음으로 검게 되고, 눈이 녹으면 불어났다가도

[] 6:17

가뭄 때는 물이 줄어들다가 아주 말라 버리고,

[] 6:18

이리저리 구불거리다 나중에는 흔적조차 없어진다네.

[] 6:19

데마의 상인들이나 스바의 여행객들도 시냇물을 찾으려 하지만,

[] 6:20

너무 자신했기에 좌절하네. 도착해보면 결국 실망만 더하게 되지.

[] 6:21

나는 정말 시냇물을 찾듯이 자네들을 찾았네. 그렇지만 자네들은 내 몰골을 보고 기겁을 했어.

[] 6:22

내가 자네들한테 무엇을 달라고 하던가? 돈을 달라고 하던가?

[] 6:23

내가 언제 나를 원수들에게서, 포악한 자들에게서, 구해 달라고 부탁하던가?

[] 6:24

내게 무슨 잘못이라도 있는지 가르쳐 주게.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겠네.

[] 6:25

격려 한 마디가 힘이 될 텐데, 자네들은 날 나무라기만 하니,

[] 6:26

자네들은 내 말을 탓하려는 것인가? 낙담한 사람의 말은 바람같이 허무할 뿐인데.

[] 6:27

자네들은 고아를 팔아 넘기고, 친구를 돈과 바꿀 사람들일세.

[] 6:28

제발 나를 좀 보게나. 내가 자네들한테 거짓말을 한 적이 있나?

[] 6:29

부디 고약한 일을 하지 말게. 난 정말이지 잘못한 게 없네.

[] 6:30

내 입술에 무슨 잘못이 있던가? 내 혀가 잘못을 분간하지 못할 것 같은가?"

 

 

본문에서부터 7장까지는 엘리바스의 변론(4,5)에 대한 욥의 첫 번째 답변입니다.

 

성 경: [6:2]

  [결백을 주장하는 욥]

 5:2에서 엘리바스는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인다'고 함으로써 욥을 은근히 질책한바 있는데, 본문은 그것에 대한 욥의 반박입니다. 즉 고통에 처한 자가 그 고통을 토로한다고 무조건 질책만 할 것이 아니라, 먼저 그 고통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참작해 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 경: [6:3]

  바다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 `바다 모래'는 성경에서 대부분 셀 수 없는 많은 수를 상징하기 위해 사용되었는데( 22:1; 32:12;). 여기서는 `무거움'을 상징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Hartley). 고대 히브리인들은 `'( 27:3)과 마찬가지로 허다한 모래 또한 무거움의 대표적 물질로 표현하였습니다.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 (1) 성급했음에 대한 죄의 시인: 욥은 3장에서 자신의 잉태와 탄생을 저주(3:1, 3-11)하며 죽음을 갈망하였는데, 욥은 그것이 비신앙적 행위였으되, 고통이 심한 까닭에 그리했음을 시인하고 있습니다.

 

 성 경: [6:4]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 여기서는 직접적으로는 욥에게 주어진 복합적인 재앙을 가리키는데, 그와 같이 하나님을 `용사'(勇士) 또는 `궁수'(弓手), 그의 징계를 그분이 쏘는 화살로 각각 비유하였습니다.

 

성 경: [6:5]

 본 절에서 욥은 나귀'(KJV, RSV, wild ass)와 소는 먹을 풀이 풍족히 있으면 결코 울지 않는 것과 같이, 마찬가지로 욥 자신도 정상적인 환경이라면 결코 비탄과 불평(3)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이죠. , 욥이 불평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다는 말입니다. 

 

성 경: [6:6]

 본문은 엘리바스에 책망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욥의 고난의 본질과는 동떨어져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욥이 `' 고난 받는가 하는 질문에도 시원한 해답을 제시해 주지 못하며, 도리어 엘리바스는 자기 일방적인 견해를 주장함으로써 욥의 심중에 고통을 가중시켰다는 말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그의 변론은 마치 소금을 치지 않아 간이 맞지 않은 음식, 그래서 사람의 입맛에 구역질을 일으키게 하는 음식처럼 아무 도움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성 경: [6:7]

 욥은 엘리바스의 변론을 먹기 싫어하는 음식 같기도 하고 (6), 심지어 그것을 건드리기 조차 싫어하는 음식에 비유함으로써 그의 주장을 부정해 버린다. 

못된 식물 - `나를 아프게 하는 음식'(NIV, food makes me ill), `나를 짜증나게 하는 음식'(RSV, food that is loathsome to me)' `을 의미합니다. 

 

 성 경: [6:8,9]

 그 잘못된 친구의 비난의 결과 욥은 자신의 죽음을 더욱 갈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반복하여 그런 비난을 따윌 듣느니 지금이라도 죽었으면 하고 갈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3) 욥의 신앙: 그러나 욥은 여전히 죽음을 갈망하는 가운데에서도 그 죽음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심을 명백히 고백하고 있습니다. , 인간의 생사(生死)를 좌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심을 그는 철저히 인정합니다. 이러한 인식이 없었더라면 아마 그는 인내의 한계에 봉착하여 자살을 도모했을는지도 모르죠. 바로 이런 점에서 욥은 세속적 염세주의자(pessimist), 또는 현실의 한계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자살을 정당시한 후기 스토아주의자(Later Stoic)들과 명백히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 경: [6:10]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 지 아니하였음이니라 10절은 한편으로, 하나님 앞에서 끝까지 신앙 절개를 지켜 왔노라고 하는 욥의 신앙 고백이요, 엘리바스에 대한 반발과 변호의 심리가 다분히 담겨 있습니다. 

 

 성 경: [6:11]

 엘리바스는 욥에게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자가 누릴 축복에 대해 언급한 바 있었습니다(5:17-27). 그러나 욥의 현재 상황은 그 같은 약속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다고 여겼습니다. 더욱이 잃어버린 건강(2:8, 9)을 다시 회복한다는 것(5:18, 19)도 사실상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참고 인내하여 회복될 미래를 소망하기 보다는 차라리 현재에서 죽음을 더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성 경: [6:12]

 본문은 신앙의 위인인 욥 자신도 여느 인간과 마찬가지로 한계를 지닌 존재일 수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 상 반절에선 정신력(기력)의 한계를 후 반절은 육체()의 한계를 말합니다. 요컨대 욥은 그 정신력과 육체에 있어서 한계 상황에 다다랐던 것이죠.

  

성 경: [6:13]

 나의 지혜가 내게서 쫓겨 나지 아니하였느냐 자기의 지혜가 더는 없어서 해결의 가능성이 없다는 의미이죠?  (쫓아낸 자=하나님?)

 

성 경: [6:14]

  `절망한 자는 그의 친구들의 동정을 받아야 한다. 심지어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포기한 자라 할지라도 그리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욥은 엘리바스의 태도에 대해 직접적인 비난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자신에게 진정으로 요구되었던 것은 따스한 동정과 사랑의 말이었으되, 엘리바스의 변론에는 그것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욥이 비록 죄를 범했다고 할지라도(4:7, 8) 친구인 엘리바스는 욥을 권고하고 동정하는 참다운 우정을 보여주었어야 했다는 말입니다(17:5; 19:21, 22).  

 

성 경: [6:15]

 시냇물의 마름 같고 개울의 잦음(수량이 줄어듦) 같구나 - 욥은 팔레스틴 지역의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와디(wadi)의 특성을 들어, 친구의 변덕스러움과 불성실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시냇물' `개울'은 공히 `와디'를 가리키는데, 와디의 특성은 비가 오면 금방 물이 불어나다가도 비가 그치고 조금만 지나면 그 강바닥이 드러나 보일 정도로 메말라 버립니다. (건천, 마른 내 라고도 함)

이러한 현상은 팔레스틴 지방의 지층(地層)이 물을 오래 가두어 둘 수 없는 모래와 자갈 들로 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와디(친구)는 쓸모가 거의 없는 냇물(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성 경: [6: 16,17]

 본 절에서는 친구에 대한 욥의 책망이 더 강력해집니다. 일반적으로 팔레스틴 고지대, 특히 길르앗(Gilead)이나 바산(Bashan)지역에는 겨우내 눈이 내리는데, 더 추워지면 산의 협곡의 물들이 얼게 되며, 종종 그 얼음 위에 또다시 눈이 내려 겹겹으로 얼게 됩니다(16b). 그런데 봄이 되면 이들의 녹아 흘러내리게 되는데, 대개 이때에는 주변의 흙과 먼지, 잡초덩이 등이 함께 휩쓸려 내려와 그 물빛은 검은 색을 띠게 됩니다(1 6a). 블랙 리버와 유사함. 그리고 그 물은 잠시 넘쳐 흐르게 되지만 ,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말라버립니다. 그래서 정작 물이 절실히 필요한 여름철에는 아예 시내의 바닥이 마르게 됩니다(17). 고로 욥의 친구들도 그가 절실히 필요했던 때에는 도움이 안되는 존재들이었다는 것이죠. 

 

성 경: [6:18]

[] 6:18

떼를 지은 객들이 시냇가로 다니다가 돌이켜 광야로 가서 죽고

- 일반적으로 장거리 여행자들은 여러 개의 수통(水桶)을 준비하여 그곳에 물을 채워 사막을 건너갑니다. 그런데 장거리 여행을 하는 도중 그 수통에 물이 떨어지면 그들은 시냇가를 찾고, 이때 만약 시냇가가 말라 있으면(17) 그들은 물을 찾아 상류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래도 찾지 못하면 그들은 결국 갈증 때문에 광야에서 죽게 됩니다. 욥은 자신의 심경을 그런 여행객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성 경: [6:19]

 데마 = 이스마엘의 후손으로서 주로 무역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는데( 25:15) 이들의 거주지는 에돔 근방의 아라비아 지역이었으며 ( 21:4; 25:23) 떼를 지어 낙타를 이용하여 무역하는 자들 (caravans)이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성 경: [6:20]

[] 6:20

너무 자신했기에 좌절하네. 도착해보면 결국 실망만 더하게 되지.

 

 , 고난에 빠진 욥이 친구들로부터 일말의 도움을 기대했으나 오히려 냉담한 질책만 당한 자신의 더욱 참담한 심경을 토로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6:1).

 

 성 경: [6:21]

 너희가 두려운 일을 본즉 겁내는구나 - 여기서 욥은 자신을 위로하려 온 친구들의 비겁하고 이기적인 성향을 날카롭게 꿰뚫어 보고 있습니다. , 그의 친구들은 처음에는 욥을 동정하려는 진정 어린 우정에서 찾아왔으나, 욥에게 내려진 재앙의 참혹함과 그것이 조만간 회복 될 가능성이 희박함을 깨닫고 난 다음부터는 두려워하며 넌지시 발뺌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즉 욥은 죄인이요, 그 죄값으로 지금의 재앙을 겪고 있는 것이니, 따라서 그들은 본래의 태도에서(2:12, 13) 후퇴하여 욥에게 온후한 사랑과 동정의 행동( )을 나타내 주기를 주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욥을 동정하는 태도를 보였다가는 죄인()과 연합했다는 이유로 그들 자신들도 하나님께 형벌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 경: [6:22,23]

 본문에 나타난 4가지 질문을 통해, 욥은 그의 친구들에게 진심으로 기대했던 바가 돈이나 물질이 아니라 참된 격려와 위로였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성 경: [6:24]  내게 무슨 잘못이라도 있는지 가르쳐 주게. 아무 말도 하지 않겠네.

 욥은 그의 친구들이 자기가 제대로 시인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말을 자기에게 해 주길 원하고 있습니다.

 

 성 경: [6:25]

 옳은 말은 어찌 그리 유력한지 -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정직한 말은 어찌 그리 힘이있는지'(KJV, RSV, How forcible are right words)이다. 그런데 달리 말하면 정직한 말은 어찌 그리 고역(비탄)스러운지(NIV, How painful are honest words)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히브리 원어상 이 두 가지 번역이 다 가능하다고 봅니다. 같은 말이라도 부드럽게 할 수 있다는 것.

 

성 경: [6:26]

 소망이 끊어진 자의 말은 바람 같으니라 - 고난으로 인하여 모든 소망이 상실된 상태에서 해주는 책망이나 비난은 아무 소용도, 효과도, 도움도 못 된다는 의미입니다.  

 

성 경: [6:27]

  고아를 제비 뽑으며 - 앞에서 친구들의 부정직과 이기심을 비난(21, 25)한 욥은 여기서 그들의 무자비함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고대 히브리 관습에 비추어 볼 때, 고아와 과부는 사회의 최하류의 무력한 계층으로서 특별한 보호의 대상이었으되,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사악한 자들은 채무 능력이 없는 과부의 자녀를 놓고 제비 뽑아 노예로 삼거나 팔아 버렸듯, 욥은 친구들의 동정 없음을 질책하는 장면입니다.

 

너희 벗을 매매할 자로구나 제비 뽑기와 동일한 행위로써 친구의 무자비함을 질책한 말입니다. 

 

 성 경: [6:28,29] 이제 너희가 나를 향하여 보기를 원하노라 내가 너희를 대면하여 결코 거짓말 하지 아니하리라=날 똑바로 다시 봐! 내가 거짓말 하나 자세히 보란 말이야! 란 의미.

 

  너희는 돌이키라 - 이 말 속에는 세 가지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1) 나를 죄인으로 단정하는 일을 즉시 중단하라. (2) 나의 입장에서 보라. (3)너희가 잘못됐어!

 

성 경: [6:30]

 내 혀에 어찌 불의한 것이 있으랴 - 여기서 다시 한번 욥은 지금까지 자기는 잘못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 미각이 어찌 궤휼을 분변치 못하랴- `궤휼`'(KJV= perverse things ; NIV= malice)으로 보면, 이는 욥이 선악과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가 되며, 자신은 아직까지 도덕적. 지적 능력을 갖고 있고, 따라서 어떤 문제가 논란이 될 때 그것을 충분히 분별할 수 있다는 뜻(12:2, 3). 고로 자기의 무죄함을 스스로 변호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적용)

1. 누군가를 충고하려면 주의해야 한다. 전후 좌우를 잘 살펴 본 후, 충고하라.

2. 상대방이 곤경에 빠졌을 때는 정죄보다는 위로나 격려가 필요하다.

3. 곤란이나 환난이 극심하면 자살을 생각하기도 하는데, 자살이 가장 좋은 방법은 결코 아니다라는 점. 만약 욥이 자살했다면 훗날 갑절의 복을 놓칠 수 있었다는 점. 고로 힘들수록 더욱 인내하는 믿음이 매우 소중하다.

 

 

참조:빛고을 교회 /편집: 안익선 11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