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분노 (요나 4:1-11)
[욘] 4:1 |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
[욘] 4:2 |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음이니이다 |
[욘] 4:3 |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
[욘] 4:4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 |
[욘] 4:5 |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니라 |
[욘] 4:6 |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
[욘] 4:7 |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 |
[욘] 4:8 |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
[욘] 4:9 |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 |
[욘] 4:10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
[욘] 4:11 |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
서론)
1. 일노일노(一怒一老)요, 일소일소(一笑一少)라는 말을 잘 아실 것입니다. 한번 화를 내면 한번 늙어지고 한번 웃으면 한번 젊어진다는 재치 있는 속담입니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줄 알았던 홧병이 미국 정신 의학 회에 정식 의학용어<Hwa byung>으로 공식 등록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한국 사람에게만 있는 병이 아니라 전 세계인의 병명이 되었습니다. 그럼 홧병이 무엇이냐 하면 분노증후군이라고 하는데 분노의 억제로 인해 발생하는 병입니다. 바이올라 대학의 심리학 교수인[노만 라이트(Norman Wright)]는 지나친 분노는 메스꺼움, 위궤양, 변비, 설사, 옴이나 가려움증, 천식과 같은 호흡장애, 관상동맥 혈전증의 원인 및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화를 낸다는 것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를 말해줍니다. 하지만 분노의 감정 그 자체를 죄악으로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화가 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임과 동시에 때로는 의로운 분노도 있기 때문입니다.
본론)
가)분노에는 크게<자학적 분노>와<타학적 분노>가 있습니다.
<자학적 분노>란 화가 나는 원인이나 책임을 자기 자신에게 돌려서 머리를 쥐어뜯거나 가슴을 치는 등 자신에게 학대를 가하는 분노의 형태입니다.
그리고 보다 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분노는<타학적 분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화가 나는 이유가 전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나쳐서 때로는 분명히 자신에게 그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격앙된 감정을 타인에게 표현하는 분노의 형태입니다. 구박하는 시어미보다 시누이가 더 밉다?는 식이지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분노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책임을 물으신다는 사실입니다.
모세가 화를 잘못 다스림으로 하나님께서 그 책임을 물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비극을 맞이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 앞에 가인과 아벨, 두 형제가 드린 예물 중에 동생 아벨의 제물을 하나님께서 받으셨으나 형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시자 가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면서 굉장히 화가 났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네가 왜 화를 내느냐?"고 물으셨고 가인은 그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고 결국 동생을 들로 불러내다가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런데 가인의 분노가 왜 문제냐 하면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 문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화를 냈다는 게 문제입니다.
히11:4절에 보면"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보셨기 때문에 아벨은 인정받았지만 가인은 인정받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내 믿음이 부족했구나.다음엔 더 잘해야지!'하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런데 생각도 없이 다짜고짜 “왜 내 제사는 안 받고 동생의 제사만 받느냐? 저 놈만 없어지면 내 제사를 안받으실순 없겠지?”고 생각하며 살인을 했습니다.
이것이 일명<가인 콤플렉스>라고 하는 것이지요. 아직까지 우리에게도 남아 있는 어쩔 수 없는 기질입니다. 결국 보세요. 창4:10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책임을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 소리가 땅에서부터 호소하느니라. 땅이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분노의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다스리지 못하고 잘못 표출되었을 때, 하나님이 그 잘못에 대한 책임을 반드시 물으십니다.
나)요나의 분노
오늘 본문에도 보면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제 고집대로만 화를 내며 살았던 한 선지자 요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 뜻에 불만을 품은 선지자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잘못되었다고 재판하기까지 하는 당돌한 선지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요나’라는 인물을 잘 살펴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나는 믿음은 있었지만, 정의감은 매우 강하였으되 사랑이 부족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요나에게 율법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베푸는 일엔 익숙하지 못했던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보면 스스로 고민에 빠지기도 하고 기뻐해야 할 일에 슬퍼하고 잔치를 벌여도 될 시간에는 죽기를 소원하는 정말 못난 모습을 보여 준 사람입니다.
과연 우리가 살아가면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라는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 무작정 방치해야 할 것입니까? 그래서 모세처럼 정작 누려야 할 복의 일부를 빼앗기고 살아야 할까요?
오늘 우리는 요나를 통해서 분노의 감정을 다스리는 통찰을 얻어야할 것입니다.
다)요나의 분노의 배경
1. 본문의 배경을 살펴봅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북쪽은 이스라엘이고 남쪽은 유다였습니다.
그런데 북쪽 이스라엘에 앗수르라는 나라가 쳐들어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가고, 또 돌아와서 여자들을 강제로 아내를 삼고 해서, 아주 이스라엘의 혈통을 망가뜨렸습니다. 그래서 이 앗수르는 한마디로 이스라엘의 철천지 원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니느웨 성이 바로 앗수르의 수도입니다. (오늘날 시리아). 그런데 그 니느웨 사람들이 죄를 많이 지어서 하나님께서 더 이상 보실 수가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멸망시키겠다는 선언을 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한번의 기회를 주십니다. 당장 망하게 하지 않으시고, 사십일의 시간을 주되 그 안에 회개를 하면 살려 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실을 요나 선지자를 보내서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자,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을 잘 압니다. 자기가 가서 외쳤다가 만일에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안 망하게 하실 분임을 아는 겁니다. 요나 입장에서는 원수 같은 니느웨가 회개하지 말고 그냥 그대로 망해 버렸으면 좋겠는데 마음에도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시키는 것이 못 마땅한 것입니다. 그래서 니느웨로 안가고 다시스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러다가 거센 풍랑을 만나 제물로 드려지게 되고, 곧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사흘 동안을 갖은 고생을 다합니다. 거의 반 죽었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큰 물고기가 뭍에다가 토해버리는 바람에 니느웨 성으로 직행을 하게 됩니다.
이제 꼼짝 못하고 니느웨 성에 와서는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망한다. 회개하라!"는 말을 외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못된 놈들이? 요나의 말 몇 마디에 왕으로부터 백성까지 재를 무릅쓰고 다 회개하는 것이 아닙니까? 결국 하나님께서 저들을 용서하게 되십니다.
이제 요나가 못마땅해 하면서 화를 냅니다. 회개하지 않다가 그냥 멸망 해 버리길 은근히 바랬건만,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할 뿐만 아니라 괴로워하고 죽기를 소원하기까지 합니다."내가 이런 꼴은 죽어도 못 본다. 이런 꼴을 보고 사느니 차라리 죽고 싶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오늘 요나가 왜 이렇게 되었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뜻을 그때까지도 잘 몰랐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내 생각, 내 뜻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2. 요나서는 구약에서의 탕자의 비유에 어울리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피하여 멀리 도망치는 것에서는 둘째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니느웨성이 변화한 다음에 불평하고 화를 내는 모습에서는 큰 아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큰 아들이 그랬던 것처럼 요나 역시 따지고 듭니다.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지 못했던 큰 아들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화를 내고 있는 모습이 요나와 같습니다.
여러분, 분노의 감정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지극히 내 생각 중심일 때 일어나는 감정이기 쉽습니다. 요나는 지금 자기 생각에 집착해서 자기 과거를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민족이 당한 굴욕을 잊지 못하고 벗어나지 못하고 '앗수르는 망해야 된다, 앗수르는 원수다.'는 집착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용서가 안 되니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네가 전에 나에게 그랬었지 너는 망하거나 죽어야 된다"하는 과거에 매여서, 볼 때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과거, 자기가 본 손해, 자기 민족이 당한 굴욕, 여기에 딱 붙들려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요나가 화를 내면서 하나님을 심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잘못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은 흥하고 앗수르는 망해야 합니다. 그 뿐 아니라 40일 후에 망한다 했으면 망해야지, 망한다고 저는 심부름을 했는데 제 체면은 뭐가 됩니까? 하나님이 망하게 하겠다 하셨으면 망해야지요. 왜 그리 우유부단하세요?"라는 것이지요.
참 못난 사람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실상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이기 일수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원망하며 하나님을 심판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하나님 너무 하십니다. 참 못마땅합니다. 하나님 왜 일을 그렇게 하십니까?"그럽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용서와 하나님의 사랑, 율법을 넘어서는 높은 긍휼하심에 대하여 못마땅히 여기는 것은 죄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요나가는 내가 할 일이 있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전하라고 하시면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 다음 일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요나가 주제넘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조용하게 내가 할 일 내가 하면 됩니다. 그 이상은 하나님 일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까지도 하려고 하니 화납니다.
1842년 뉴욕에서 출생한 종교철학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성숙의 단계’를 네 단계로 말했습니다. 그 첫째 단계가 현실적 이기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 하신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이기심을 버리는 이것이 첫째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역사가 내 생활 속에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큰 역사 속에 내가 있고 하나님의 큰 은혜 안에 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사역 속에 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자기 자신의 한계를 깨달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내가 할 일은 이것뿐이요, 나머지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알아서 하실 일입니다. 자기 한계를 확실하게 인정하는 순간 그 신앙생활은 온전히 자유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나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게 되고 네 번째의 참된 성숙의 단계로 올라 서는 믿음이 되겠지요?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요나는 믿음도 있었고 수고도 많이 했었지만 사랑이 부족했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찬송을 불러야 할 시간에 절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이 두 성품은 공평하다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든 기울지 않습니다. 아직 성숙하지 못한 믿음의 사람은 아무리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해도, 또 원망과 불평으로 화를 내다가 끝나고 맙니다. 교회에 덕을 세울 수 없습니다.
가능하면 분노의 감정에서 자유 하시기를 바랍니다. 분노로 인해 죄를 짓는 일은 더욱 조심 하시기를 바랍니다.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 두 저울로 만사를 판단하는 법을 배우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보고 자기를 버리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다고 여기며 순종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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