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모음(Korean sermons)

여기가 좋사오니? 마태복음17:1~18(마 17:1~8)

호걸영웅 2016. 8. 10. 10:20

여기가 좋사오니? 마태복음 17:1~18( 17:1~8)

본문

마태복음 17:1~18

설교일

2006.02.05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6.

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7.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서론)

1.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간혹 공기 좋고 자연환경이 좋은 곳에 가면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말을 종종 하곤 합니다. 도시에선 온갖 공해에 시달리다 보니, 깨끗한 공기와 맑은 물들이 오염되지 않은 자연 속에서, 건강하게 살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복잡한 도시를 벗어나 환경이 좋은 곳에다 돈을 제법 들여 전원주택을 지어 건강관리를 위해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비록 그,런 곳에 산다할 지라도 정말 마음까지 편안하고 행복한가? 반드시 그런 건 아니지요. 행복이란 세상의 물질이나 자기의 마음먹기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 히브리서 13:9에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은혜가 있어야만 행복합니다.

3. 최근에 우리 사회에서는 잘나가던 재벌의 총수나, 권력의 실세나, 인기절정의 스타들이 여기 이 세상이 힘들고 싫어져서, 극단적인 자살로 자기 인생을 마감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적인 외적 조건이 충족된다고 “여기가 좋사오니” 하며 행복해 할 수는 없다는 증거입니다.

(본문 말씀을 소위 변화산의 체험이라고 부릅니다. 베드로는 변화산 체험을 하면서 예수님을 향하여 “여기가 좋사오니”하고 감격스럽게 고백을 하며 초가 셋을 짓고 살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그 산을 내려오십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받을 수 있을까요?)

본론)

 )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

1. 본문에서 베드로와 두 제자는 변화산에서 실로 땅에서는 볼 수 없었던 황홀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 변화산은 매우 높은 산이라 했는데, 학자들의 견해는 헬몬 산이라고 하였습니다. 헬몬산은 갈리리 북부에 위치한 매우 높은 산입니다. 봄에는 거기서

흘러내린 눈 녹은 물이 농작물을 기르는데 필요한 물의 대부분을 공급할 만큼, 많은 눈이 쌓이는 매우 높은 산입니다. 그 높이는 해발 2,184m 미터 정도가 된다고 하니 한국의 한라산보다도 더 높은 산입니다. 물론 예수께서는 산꼭대기까지 올라가진 않으셨을 것입니다. 아마 중간 즈음 올라가시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2. 예수님과 함께 간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은 거기서 예수께서 모세와 엘리야라고 하는 구약시대의 대표자들을 만나게 되었음을 목도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예수의 얼굴과 옷에 놀라운 광채가 나면서 그 모습이 변형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장차 되어질 일들을 함께 이야기함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 당시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모세는 약 1500년 전의 사람이요, 엘리야는 900여 년 전의 사람입니다. 모세는 그 시신이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했고, 엘리야는 산 채로 불 말이 이끄는 병거를 타고 승천했다고 기록된 분입니다. 그런 참으로 놀라운 유대민족의 지도자와 선지자가 시간에 상관없이 예수와 함께하였다는 것은, 제자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요 신비요 영광이었을 것입니다.

그 사건은 모든 사람들이 현실이라고 믿지 못할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보통 사람들의 생각에는 환상 혹은 이상일 뿐입니다.

 

3. 베드로는 당시 황홀한 변화산의 감격을 느끼며 흥분된 나머지, 만약 예수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거기에 초막 셋을 지어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모시고, 저희가 수종 들면서 영원히 산다면 너무도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감격 때문에, 산 아래의 자기의 가족들이나 다른 제자들이나 온갖 고난을 받고 있는 자기의 백성과 사명 따위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들을 데리고 산 아래로 다시 내려오셨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에게 있어서 변화산의 체험은 산 아래서 그들이 수행하여야 될 사역의 현장, 곧 현실 보다 결코 더 앞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 믿음이란 결국 장래 일을 보는 것입니다.

1. 옛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고향인 갈대아 우르(오늘날의 이라크 땅)를 떠나, 한 평생 중동천지를 유랑하는 나그네처럼 살았지만, 하늘나라 영원한 집의 소망을 확신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1:15-16에 보니 “저희가 나온바 본향(우르)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믿음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총애를 받는 인물이었으나 그의 평생은 말할 수 없는 수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복을 누리긴 했지만 100% 보장된 편안한 삶을 산 적이 없었습니다.

 

2.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지요? 예수 믿어도 계속 고난도 오고 힘든 일들도 자꾸 생기고 피곤한 일도 항상 늘 따라다니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믿음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는 것이요 장래의 올 일들을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하늘의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는 소망이 있기에 조금도 흔들림 없이 우리의 믿음을 지켜 나갈 수 있을 줄 믿습니다.

 

3. 모세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출애굽 이후 사십 년에 걸친 광야 여행길이 너무도 힘들었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는 가나안 복지에 대한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을 믿었기에 그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가나안 시대의 새 역사를 위해 40년을 헌신하였던 것이지요.

예수님도 곧 이어서 부딪치게 될 십자가 고난의 두려움 있었으나 변화산에서의 체험을 뒤로 두고 온 인류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그 산을 내려왔던 것입니다.  

 

) 사명을 위해 살아야만 합니다.

1. 인생의 가치는 무엇을 위해 살았느냐에 달려있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교를 어디 명문을 나왔느냐? 집안이 뼈대 있는 가문이냐? 얼마나 큰 저택에서 사느냐가 결코 아니란 말씀입니다. 그런 면에서 성도들은 자신들의 변화산에 내려와야만 합니다. 물론 대개의 사람들은 머물러 있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고난 가운데에서도 날마다 변화되는 삶이어야 하고 전진하는 삶이어야만 합니다.

 

2.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를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하여 계속적인 전진으로 고난과 괴로움을 이겨가면서 가나안을 정복해 나갔습니다. 그냥 먹고 마시며 평안한 생활을 한 적이 없습니다. 왜입니까?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인내와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3. 어떤 이가 말하기를선은 최선의 가장 큰 적이다 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라고 하며 안주할 때, 장차올 영광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4. 32:1-42에 보면, 요단을 건너지 않은 르우벤 자손, 갓 자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두 자손은 요단 동쪽에 자기 종족들이 안주할 것을 모세에게 요청합니다. 이 두 지파는 요단을 건너기 전에 요단강 동편에 있는 푸른 목초지를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땅은 야셀과 길르앗 땅으로 우상숭배가 극심했던 아모리 족속이 살던 불길한 성읍이었습니다. 물론 그곳은 가축을 기르기에 적당한 곳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겠다던 가나안 땅은 아니었습니다.

그들 생각에는 요단을 건너는 것은 어쩌면 죽음을 치러야 할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걸어야 하는 모험을 건너 뛰어, 고통 없이 좋은 땅을 분배 받으려 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어떤 사람을 상징하고 있습니까? 바로 세상의 삶과 하늘나라의 삶에 양다리 걸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가나안과 아모리 땅 둘 중 하나를 분명히 선택해야 합니다. 비록 큰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하나님이 가라신 땅으로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길이기 때문이다.

 

5. 사도 바울은 선교과정에서 여러 번 죽도록 매를 맞고 숱한 죽음의 위기들을 겪으면 서도 안디옥에 이르렀는데, 거기서도 그의 제자들에게 믿음의 고난을 피하지 말라고 당부해 이릅니다. 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쉽고 편안한 것, 즉각적으로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가치가 없습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결코 좋은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6.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일 매일 선택의 기로에 서있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누구를 위해 살 것인가? 하나님을 위하여 혹은 자신을 위하여, 아니면 주님을 위하여, 혹은 어떤 사람을 위하여 등 결정의 순간을 마주대하게 됩니다.

그렇다면……자기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을 것인가, 나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주님을 선택할 것인가? 옛 습관에 젖어 교회생활을 등한히 할 것인가, 안일한 믿음생활을 하는 것에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겨 내던지고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용기 있게 지며, 그 십자가를 붙잡을 것인가? 하는 등등의 선택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

1. 위대한 인도의 선교사 윌리엄 캐리는 이렇게 감히 말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Expect great thing from God, Attempt great thing for God).

 

그렇습니다. 우리의 가슴이 뜨거워질 만큼 주를 위해 무엇인가 위대한 일, 숭고한 일, 아름다운 일, 섬기는 일, 참된 일을 계획하고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안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갓과 르우벤 지파처럼! 양다리 걸치기에 만족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편하게 믿음 생활하는 것이 여러분의 목표입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으십니까? 결코 아닙니다. 그 변화산에서 당신의 구주 예수와 어서 내려오시길 바랍니다.

 

2. 참다운 믿음이란 성경에 기록된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록된 사실이 우리의 생애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나를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이 말씀에 나 자신을 비교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변화산에 당당히 내려 설 수 있는 귀한 선택이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있으시길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을 축원 드립니다.

 

 

참고: 오직 예수 , 예람지기, 스크립트 /편집: 익선 07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