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생각과 사람생각(마16:21~2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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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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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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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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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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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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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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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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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 어느 유태계 미국 기독교인이 딸과 함께 이스라엘 성지순례 여행을 갔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버지는 성지순례 중,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의 총탄을 머리에 맞아 현장에서 즉사하였습니다. 수사는 미궁에 빠져 범인을 도무지 잡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충격을
받은 딸은 귀국하여 아버지의 원수를 찾아내어 복수할 마음으로 히브리어와 현지 아랍어를 공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후에 미국의 워싱턴포스트의 기자가 되어 이스라엘 파견 근무를 자청하였습니다. 이스라엘에 가서 법원의 기록을 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12년에
걸쳐 밤낮으로 노력한 결과 아버지를 살해한 테러범 ‘오마르 하티브’라는 사람이 감옥에 수감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마침내 원수를 갚을 기회가 온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범인의 가족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마음에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진정한 복수는 그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다. 물리적 복수는 동물적 본능일 뿐이야.”…라는 음성을 들은 그녀는 결국 테러범과 가족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힌 후, 복수의
칼을 갈았던 것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범인의 가석방 청원서를 제출하였습니다. 복수하는 것 보다 훨씬 차원이 높은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녀가
바로 ‘로라 블루멘펠트’라는 여성이었습니다.
2. 사무엘상 16:7=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고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하늘과 땅의 차이일
수도 있습니다.
3.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베드로는 위대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잡히시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극구 말리며 “절대로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이 시간엔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을
비교하면서 우리가 매사에 하나님을 닮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론)
가)첫째, 하나님의 생각은 살리려고 하는 생각이다.
마태복음 16:21에는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 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고난에 대한 예고입니다.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세 번 더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셨습니다. 얼마 후에 죽을 것이고 그리고 다시 살 것이라는
예고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살리시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라고 하셨는데 후에 당신의 예고대로 예루살렘에 결국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날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대로 그렇게 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핵심적 사역의 목적은 인류를 위한 대속적인 죽음을 당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또‘제 삼일에’라고 하셨는데 제 삼일에 부활하셔서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을 살리려는 생각입니다.
사람들이 양을 잡는 것을 보면 대개 이렇습니다. 양의 다리를 묶어 놓은 다음 칼로 목을 찔러서 피를 내고 어느 정도 피가 흐르고 나면 아예 목을
자릅니다. 다음엔 부위별로 각을 뜨고, 가죽을
벗기고, 다리를 꺾고 나무에 매달아 놓습니다. 양을
잡기 전에 나무에 묶여 있다가 잡는 곳에 끌고 오는데 안 끌려오려고 온 몸을 버텨, 바닥에
끌린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어린 양으로 죽으실 예수님의 모습을 예언했는데, 예수님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을 것이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죽음의 자리로 가실 때에 얼마나 피하고
싶으셨을까요? 그러나
피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도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는 뜻입니다. 그 이름대로 그대로 죽으신 것이죠. 또 예수님은 마태복음 20:28에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예수님을 보내실 때, 처음부터 목숨을
주려는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으려고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죽어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 사람들이 대제사장들이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7:40에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했고, 심지어 그들은 예수님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사람의 생각으로는 십자가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십자가에서 내려가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더는 구원자는 아닙니다.
우리가 가끔 화재 관련 뉴스를 보면, 자신의 아들딸을 구하기 위하여 불 난 집에서 겨우 빠져 나왔다가,
다시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부모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아들딸을 구해놓고 자신은
죽음을 당한 부모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이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고로 요한복음 3:17에는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예수님을 보내 주심에서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온 세상이 구원받아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생각이며 인간을 향한, 아니 바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나)둘째, 사람의 생각은 내가 살려고 하는 생각입니다.
마태복음 16:22에는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생각은 죽지
않으려는 생각입니다. 어떻게 하든 내가 살려고 합니다. 베드로는
제자들 가운데서는 물론 제법 괜찮은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생각과 달랐습 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말했다고 합니다. 마치 베드로는 자기 혼자만 할 수 있는 자기 일처럼, 강압적으로
예수님을 붙잡고 강권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물론 베드로의 인간적 적극성을 표현한
말입니다.
또 베드로가 예수님께 ‘항변했다’ 했습니다. ‘항변하여’란 단어는 헬라어로 ‘에피티마오’인데 ‘꾸짖다, 책망하다(rebuke)’라는 뜻입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는
말은 ‘결코 그러면 안 된다’ (never)라는 강한 책망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 일은 당신과는 전혀 관계없어야 한다’는 강한 어조로 예수님께 말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구원의 생각보다, 예수님께서 수난현장에
아예 가시면 안 된다는 인간적 생각을 강요하다시피 했다는 것이죠.
베드로가 왜 그렇게 말렸을까요? 그것은 결과적으로는 자신을 위해 예수님께서 죽으시면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토록 3년여를 예수님을
열심히 따랐는데, 예수님께서 만약 죽으시면 그 동안의 모든 수고가 수포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자신을 위해 예수님께서 죽으시면 안 되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왕권을 잡으셔야 제자들도 한
자리씩 할 것이 아닌가? 이런 이기적인 마음에서 예수님께서 절대 죽으시면 안 된다고 했던
것입니다.
오래 전 한국의 김형석 교수는 “사람의 사랑은 모두가 이기적인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한번은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어느 부인이 땅을 치고 통곡하면서 “나는 어찌 살꼬?”라고 하더랍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것이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자기의 앞으로의 삶의 걱정 때문에 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아쉬운 마음도 있었겠지만 …말이지요.
한국인들이 매우 존경하는 분 중에 ‘김구 선생’께서 계십니다. 김구 선생께서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실 당시, 한 청년이 권총으로 김구선생을 죽이려고 중국에 까지 와서 활동하다가 독립군에게
체포되었습니다. 그를 체포한 독립군이 김구 선생에게 와서 “선생님을 죽이러 온 한국 동포를
잡아 데리고 왔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때 김구 선생은 맨발로 뛰어나와 그를 얼싸안고 “객지에서
조국의 동포를 만났군요. 반갑습니다. 이 부족한
김구를 만나러 왔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너무도 감사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반갑게 뺨을 비비는 김구선생을 그는 미워할 수 없어 살해의 마음을 거두고 김구선생의
충성스런 일꾼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 김구 선생을 위해 목숨을 내 놓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김구선생의 어머니께서는 권사님이셨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그래서 김구 선생은 자기를 죽이러 온 원수까지 용서하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다 죽기 싫어하고 살려고 애를 쓰지만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삽니다. 이순신장군은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이라 하였습니다. 이 말은 살기를 청하는
사람은 죽고, 죽기를 각오하는 사람은 산다는 뜻입니다. 이런 삶의 원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하늘나라의 원리와 동일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은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도 하셨습니다. 이 기도는 너무도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우리의 기도에도 하나님의
생각이 들어가야만 합니다.
사도행전 21장에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 때, 가이샤라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엔 전도자 빌립의 집에 머물던 때였습니다. 몇 일이 지나,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거기에 와서는 사도
바울의 허리 띠를 가지고 자기의 수족을 묶고는 “이 띠의 임자가 결박을 당하고 이방인의 손에 넘겨지게 될 것”이라고 하여 바울의 체포와 고난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때 함께한 많은 성도들이 울부짖으며
바울의 예루살렘 여행을 반대하였습니다.
그 때 바울은 행 21:13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생각은 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죽지 말게 말리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못하게
막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미 하나님의 생각, 주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결단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말리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십니다. 베드로가 품었던 잠시의 사람의 생각이란, 결국 사탄의 생각이었다는 것이죠. 사탄은 대개 사람들의
인간적인 생각을 이용하길 좋아합니다. 우리는 항상 사탄에게 이용당하여 사람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일을 그릇 판단하는 일 없어야 될 줄 믿습니다.
결론)
요한복음 12:24에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흔히 보는 농사의 원리요 법칙입니다.
이것은 또 하나님의 생각으로 보아도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은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또한 우리가 본 받아야 할 희생의 삶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만 살고 죽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는 삶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형제를 위해, 교회를 위해, 가족을 위해 기꺼이 조금씩 죽을 줄 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항상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종종 고난이 와도, 또 풍성한 축복이 와도 그 속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를 항상 생각하여야 할 줄 믿습니다. 고난이라고
다 나쁜 것도 아니며 축복이라고 다 좋은 것도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남은
평생을, 하나님의 생각으로 가득 찬 삶을 살며,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자녀 백성들이 모두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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