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강해

호세아 11장 강해(걷잡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호11:1-12)

호걸영웅 2017. 9. 2. 02:07

호세아 11장 강해(걷잡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11:1-12)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

 

1.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2.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3.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

 

4.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

 

5.

그들은 애굽 땅으로 되돌아 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 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6.

칼이 그들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하리니 이는 그들의 계책으로 말미암음이니라

 

7.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9.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10.

그들은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여호와를 따를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내시면 자손들이 서쪽에서부터 떨며 오되

 

11.

그들은 애굽에서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그들을 그들의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12.

○에브라임은 거짓으로, 이스라엘 족속은 속임수로 나를 에워쌌고 유다는 하나님 곧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자에게 대하여 정함이 없도다

 

서론)

오늘은 호세아서 11장 말씀을 공부합니다. 우리가 3장에서 살펴본 대로 음란한 여인 고멜은 호세아 선지자의 엄청난 사랑을 받고서도 다시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가 버렸습니다. 이것은 배은망덕한 행위라 하겠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로 하여금 다시 가서 값을 주고 고멜을 사오라고 하십니다. 이에 호세아가 순종하여 가서 값을 치르고 고멜을 데리고 왔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상징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들을 회복시키실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호세아서에서 우리의 죄악이 얼마나 고질적인지 발견하게 될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무궁하신 긍휼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1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 내었거늘”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셨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내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내 아들이라는 표현은 출애굽기 4장에 처음 나옵니다. 출애굽기 4:22-23절을 보면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내 아들 내 장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여 애굽에서 불러내실 그때는 아직 어렸다고 하십니다.

(1). 여기서 ‘어리다’라는 말은 아직 이스라엘이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무엇을 이루어 낼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러내신 것은 그들이 강하거나 잘난 것이 있어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7:7절에 보면 오히려 그들은 다른 많은 나라들보다 작은 나라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7: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기 때문이라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아들로 삼아 불러내신 이유는 그들의 조상에게 하신 언약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반응이 어떠하였습니까?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부르면 부를수록 그들은 더욱 멀리 떠나 갔다 했습니다. 또“선지자들이 저희를 부를수록 저희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2). 그들은 하나님께서 부르면 부를수록 더욱 멀리 떠나갔습니다. 곧 그들은 바알들에게 제사하고 아로새긴 우상에게 더욱 열심으로 분향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스라엘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가 죽던 말던 내버려 두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 3절을 보면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을찌라도 내가 저희를 고치는 줄을 저희가 알지 못하였도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르면 부를수록 더 멀리 도망가는 이스라엘임에도 불구하고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아비가 아들을 사랑하듯이 그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에게 걸음을 가르치시고 팔로 안아서 인도하시리라고 하십니다.

 

반면 이스라엘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랑으로 안아 주시며 고쳐 주시는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쯤 되면 이제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들을 내팽겨지고 관계를 끊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4절을 보면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저희 앞에 먹을 것을 두었었노라”고 하십니다.

 

걸음을 가르치고 안아서 인도 하여도 그 사랑을 알지 못하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제 아예 사랑의 줄로 묶어서 이끌었다는 것입니다. 저희의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그들의 멍에를 벗겨 자유롭게 해주시고 저희 앞에 먹을 것을 두어 살려 주셨다는 것입니다.

 

. 요한복음 6:4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요셉의 아들로 알고 수군거리는 유대인들에게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살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이제 하나님께서 이만큼 사랑하시고 이끌어 주셨다면 그들은 그 사랑의 품 안에 거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스라엘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5-7절을 보면 “저희가 애굽 땅으로 다시 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칼이 저희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 하리니 이는 저희의 계책을 인함이니라. 내 백성이 결심하고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저희를 불러 위에 계신 자에게로 돌아오라 할찌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라고 합니다.

 

 참으로 완악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무리 돌아오라고 하여도 듣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의 오늘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소를 물가에 끌고 가더라도 물을 먹고 말고는 소에게 달렸다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최종 결정권을 사람에게 있으며 그 책임도 그 사람이 지는 것이 성경적 원리입니다.

 

8-11절을 보면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발하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임이라. 나는 네 가운데 거하는 거룩한 자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저희가 사자처럼 소리를 발하시는 여호와를 좇을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발하시면 자손들이 서편에서부터 떨며 오되 저희가 애굽에서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저희로 각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하십니다.

 

‘에브라임이여!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고 하셨지요?

 

 아드마와 스보임은 신명기 9장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함께 불살라지고 사해 남쪽에 가라앉은 소돔 근처의 인근 성읍들 입니다( 29:23).

 

이스라엘의 소행을 보자면 아드마와 스보임처럼 유황불에 불살라져 멸망하고 사라져야 마땅한 짓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아니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8b절을 다시 보면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라고 하셨어요.

 

하나님의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았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불쌍하여 마음이 격하여지신 것(뭉클하여 걷잡기 어려운 상태)을 말합니다. 요셉이 자기의 동생 베냐민을 만났을 때 마음이 타는 듯하여 뒷방으로 물러가서 흐느껴 울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마음이 긍휼이 불붙듯 하셨기에 에브라임과 이스라엘을 차마 버릴 수가 없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소행대로 하자면 천번 만번 버림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하나님의 긍휼의 무궁하심을 인하여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에 대해 성경을 통해 조금 더 살펴 볼 수가 있습니다.

 

 예레미야 31:20절을 보면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마음이 측은한즉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에브라임을 향하여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기뻐하는 자식이라고 하셨어요. 그러므로 책망을 하여도 깊이 생각하시고 그를 위하여 하나님의 마음이 측은한즉 하나님께서 반드시 긍휼히 여기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예레미야애가 3:19-23절을 보면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오직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심으로 주의 성실이 크심으로 이스라엘과 유다가 진멸되지는 아니하리라 했어요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버림을 받지 아니하고, 아드마와 스보임처럼 멸망을 받지 아니하는 것은 그들이 잘났기 때문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크신 긍휼 때문이었습니다.

 

10절 말씀에 보면 “저희가 사자처럼 소리를 발하시는 여호와를 좇을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발하시면 자손들이 서편에서부터 떨며 오되 저희가 애굽에서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오리니.  ”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사자처럼 일어나셔서 모으실 것입니다. 그리하시면 이스라엘이 온 세상에 흩어졌을지라도 다시금 여호와를 좇게 될 것입니다.

 

서편에서라는 말은 지중해 바다를 말합니다. 애굽은 남쪽이고, 앗수르는 북쪽입니다. 

 

결론)

처음 하나님의 아들로 부름을 받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에 정착했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이루어 내지 못하고 실패합니다. 그리고 바벨론 포로 시대가 끝나고 그들은 결국 돌아와 해방을 맞으면서 신앙 부흥 운동이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에 일어납니다. 그러나 온전히 부흥을 유지하진 못하며 신구약 중간시대를 지나게 됩니다. 그리고 메시야의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의 역할을 100% 완성하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아들 안에서 긍휼이 로마시대의 이스라엘과 바로 우리 세대의 참된 하나님의 긍휼이 되셨습니다.

 

이 아들의 십자가의 죽으심 안에서만 이스라엘 백성들도 온전한 긍휼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이란 단지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해주마 하는 차원이 아니라, 끝없이 반항하고 거역하고 결심하고 돌아서는 그들을, 또다시 찾아내시고 안으시고 사랑의 줄로 묶어서, 결국 하나님께로 이끄시는 긍휼입니다. 이것이 또한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불붙듯 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며, 그 긍휼을 힘입어 하나님께로 돌아가기에 늘 힘써야 합니다. 날마다 그 긍휼을 찬양하며 전파하는 그의 자녀와 백성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081717 안익선 목사 / 참고: 손재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