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자 (고전 13 : 8 – 13)
서론)
한 해가 지나고 새해를 맞이하면 나이를 한 살 더 하게 되고 일 년을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일 년을 성장하면 아이들은 키가 일 년 전보다 크기도 하지만, 어른들은 생각하는 것이나 활동하는 것도 일 년 전보다 그만큼 성숙하고 세상 경험을 통해 더욱 지혜로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일 년 전보다 다르게 키가 크고 성숙하는 것을 보면 부모는 좋아합니다. 그런데 일 년이 지나도 키가 크지 않고 말도 못하고 성숙하지 못했다면 부모는 염려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잘 먹어서 키는 제법 자랐는데 말을 못한다든지, 지능이 자라지 않았다면 ‘이 애가 잘못되는 것은 아닌가?’ 상당한 염려를 할 것입니다.
또 우리의 삶 속에 성장이란 재산이나 소득 등도 늘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나간 해 보다 뭔가 새로워지고 더 좋아지고 더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해 보다 더 못하고 줄었고 더 나빠졌다면 새해를 맞는 마음이 무거울 것입니다.
한 해가 지나면서 그만큼 환경이 달라지고 시대가 바꾸어지고 있습니다. 시대적으로 성장 속도는 빠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교통, 문화, 경제가 하루가 다르게 변합니다. 과거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요즘엔 “삼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이렇게 빠르게 변화되는 세상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공부하지 않으면 뒤처지게 됩니다.
교회도 시대를 따라 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교회당은 신성하며 강단은 아무나 올라가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와 기도하는 장로 외에는 올라가면 안되는 곳이었습니다. 전도사가 설교를 해야 할 때는 아래 강단에서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강대상은 일반 교인들에게는 접근도 할 수 없는 절대구역이었습니다. 옛날에는 성탄절 때 성극을 해도 강단 밑에서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교회마다 높은 강대상을 낮추고 이제 누구든지 부담 없이 오르는 연극 무대가 되기도 합니다. 요즘은 옛날처럼 강대상을 신성시하는 교회를 보면 전통을 지키는 경건한 교회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시대적으로 뒤처진 답답함을 느끼게 됩니다.
본론)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11)고 했습니다. 어렸을 때는 어린 아이와 같았지만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려야 한다는 말씀입 니다.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도 어린 아이와 같으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말하는 것이나 깨닫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아야 하지만 장성해서는 말이나 깨닫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장성한 만큼 성숙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이러한 말씀을 하게 된 것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신앙 성장에 대한 교훈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여 정성을 쏟아 가르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고린도를 떠나 다른 교회들을 살필 때 고린도 교회는 외적으로 성장하였지만 신앙생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교회는 성장해서 대형교회가 되었는데 성도들은 마치 어린 아이와 같이 신앙생활이 성숙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내 편, 네 편, 편 가름으로 분쟁이 있었습니다. “나는 바울 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 하는 것입니 다(고전1:12). 바울에게 전도를 받고 침례를 받았으니 ’나는 바울파다’라고 하고, 바울이 떠난 지금은 아볼로가 가르치고 목회를 하고 아볼로에게 침례를 받았으니 ‘나는 아볼로파다’라고 하고, 아니다! 예수께서 게바(베드로)에게 ‘네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으니 ‘나는 게바파(베드로파)다’라고 하는 성도들이 있었는가 하면,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고 성도는 그의 몸이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 파’라고 하며 성도들간에 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러한 분쟁으로 성도들간에 다툰다는 것을 듣고 바울은 크게 책망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침례를 받았느냐”(1:13)고 하며 교인들을 크게 책망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 안에 파벌간의 분쟁 외에도 이런 저런 문제로 매우 시끄러웠습 니다. 성도간에 법정 소송문제 등도 있었고, 결혼과 이혼 문제, 우상 제물을 먹어야 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 등등으로 서로 누가 옳고 그러니 하면서 복잡했던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방언과 예언하는 성도들이 무질서하게 행하여서 교회는 더욱 시끄러웠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바울이 듣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마치 어린 아이와 같이 보여 진 것입니다. 그래서 성숙한 성도가 되기를 가르친 말씀입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의 우리 모두가 성장이 멈추고 아직도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상태 로 머물러 있는 부분은 없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해나 금년이나 믿음이 성장되어야 하는데 성장이 멈춘 것 같진 않습니까? 십 년 전이나 그보다 더 오래 전 보다 믿음이 얼마나 성장하고 성숙하였는지를 스스로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어린 아이와 장성한 어른과의 차이를 무엇입니까? 어린 아이는 부분적으로 알지만 어른은 전체를 아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단순합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만 알고 그 이상은 모릅니다. 혹 어른이 빵을 사 와서 온 식구가 모였을 때, 나중에 함께 먹도록 보관을 하였을 경우, 아이는 빵을 보자마자 먹고 싶어 그만 몰래 떼어 먹습니다. 이 빵을 먹으면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를 생각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면 당장 먹고 싶어도 온 가족들과 함께 먹기 위해 참을 수 있습니다. 나아가서 어른은 빵이 먹고 싶어도 아이에게 더 먹도록 하기 위해 먹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숙입니다. 그런데 어린 아이가 좀 커서 빵을 약간 먹다가 어른이 먹지 않은 것을 알고 남겨 둔다면 그 아이는 그 만큼 성숙했다는 것입니다.
어린 초등학생 때엔 무슨 일이든 책임을 지는 일에 잘 모릅니다. 겨울에 눈이 많이 오면 마냥 좋아합니다. 눈이 많이 오면 어떻게 될것인가를 전혀 생각하지를 못하고 그냥 좋아만 하는 것이 초등학생입 니다. 눈이 많이 오면 무슨 일이 발생하는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른은 눈이 오면 좋아하다가도 다음 일을 걱정합니다. 운전하기가 위험하고 비닐하우스가 위험하고 이웃 노인이 위험하고...등등을 알고 준비를 합니다.
어른은 옳고 그름을 잘 판단하고 될 것과, 안될 것을 분간할 줄 압니다. 오늘은 어렵고 힘들어도 조금 노력하면 좋아질 것을 압니다. 기다릴 줄 압니다. 지금은 손해를 보아도 조금 지나면 이득이 있을 것을 압니다. 또 어른은 멀리를 내다봅니다.
신앙세계에서도 영적 어린이가 있습니다. 몸은 성장했는데 생각이 모자라거나 전체를 보지 못하고 일부분만을 보고, 책임을 느끼지 않는 심리적 어린이가 있습니다. 믿음이 오래되지 않은 성도는 마치 어린 아이와 같지만 오래 믿었다면 그만큼 성숙해야 합니다. 오래 믿었는데도 아직도 어린 아이와 같이 유치하면 미성숙한 성도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는 수적으로는 많이 성장했는데, 성도들의 믿음은 성숙하지 못하고 아직도 어린 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사소한 것 때문에 분쟁이 있고 이런 저런 문제로 싸우다 보니 미래를 향해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만 보고 전체를 보지 못하는 마치 어린 아이와 같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마치 초등학생처럼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현재만 보고 손에 쥔 것만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자기만을 알고 자기 중심입니다. 남에게 배려할 줄 모릅니다. 받는 것만을 좋아하고 남에게 베푸는 것은 모릅니다. 미래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미래를 향해 열심을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도 생활이 몸에 익숙지 못합니다. 말씀이 주는 맛을 아직 모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거나 성경 공부를 하고자 하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전도나 선교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를 않습니다. 예배를 소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가족 가운데 누군가가 아직 믿음 생활을 하지 않고 있어도 그가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에 관심이 없습니다. 마치 빵을 들고 나눠 먹을 줄 모르고 자기만 먹고자 하는 어린 아이와 별 다름이 없습니다. 할 일이 많은데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하지를 못합니다. 이것을 하라고 했는데도 하지 않는 책임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내 주장만을 합니다.
바울은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11)고 했습니다. 어린 아이일 때는 말하는 것이나 깨닫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았지만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장성하고서도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지 못하면 미성숙한 사람으로 사람이면서 사람답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오래 믿었으면 오래 믿은 만큼 성숙해야 합니다.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버렸노라’는 말은 8절과 10절에 “폐하리라”는 말과 같은 말로 ‘쓸모없게 만들다’는 의미의 말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방언하고 예언하는 것을 자랑삼아 떠들어대고 있는 것을 어린 아이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장차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언과 방언은 예수 믿고 받은 작은 선물의 하나와 같은 것입니다. 더 큰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숙한 성도가 되면 아! 방언도 예언도 별 것 아니네! 라고 깨닫습니다. 어린 아이의 일임을 깨닫습니다.
고로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전체를 볼 줄 몰랐습니다. 무당들이 하는 일이 그 모양입니다. 당장 현세적 복 받는 일에 몰두 합니다. 진정한 미래를 생각지 못합니다. 하늘나라를 생각하지 못합니 다. 마치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부분적으로 하던 것을 폐하리라”(10) 라고 했습니다. 성숙한 신앙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하던 것을 폐하고 전체를 보고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종종 교회의 미래도 보아야 합니다. 10년, 20년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청년들이 자꾸 일어나야 하고 청소년들을 신앙으로 열심히 교육시켜야 합니다. 눈을 크게 뜨고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며 꿈을 키워야 합니다.
결론)
그러면 전체를 알고 미래를 바라보는 성숙한 신앙은 어떤 신앙입니까? 믿음, 소망, 사랑을 품은 신앙입니다. 바울 사도는 본문 13절에서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믿음, 소망, 사랑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성도들에게 사랑에 관한 말씀을 하시면서 신앙 성숙을 기대하신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 예수에 사랑! 성령님의 사랑! 이 사랑이 여러분을 지배해야 하고 여러분을 소유해야 하고 여러분을 주장하게 하셔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몸부림치며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가슴을 치시길 바랍니다. 새해 들어 이제 2월을 맞습니다. 성숙을 이뤄나가야 합니다.
이제는 성숙한 모습으로 교회를 섬기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봉사하고 행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금년 한 해, 몸과 마음이 성장한 만큼 믿음도 성숙하여져서 아이 일을 더욱 버릴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어지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011519 안익선 목사/ 참고:허창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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