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하

열왕기상 20장 강해(아합 왕을 규탄한 하나님의 선지자)

호걸영웅 2019. 4. 14. 08:58

열왕기상 20장 강해(아합 왕을 규탄한 하나님의 선지자)

 

오늘은 열왕기상 20장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어느 하나님의 선지자가 벤하닷 왕을 살려준 아합 왕을 꾸짖는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아합이 하나님께서 죽이도록 붙여주시는 적군의 왕, 벤하닷을 살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합이 자기이 명예를 위하여 교만으로 벤하닷을 살려줌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망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사람이 망친다고 해서 아주 망쳐지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이 말씀을 통해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계시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살펴 본대로 여호와께서는 아합 왕에게 아람 왕 벤하닷의 군대를 붙여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합 왕에게 아람 왕 벤하닷의 군대를 붙여주신 것은 아합의 어떠한 공적 때문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듯이 아합은 여호와 보시기에 매우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목격하고도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합은 엘리야 선지자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갈멜 산에서 대결하여 승리한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당시 아합 왕에게는 군사라고는 약 7천 명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람의 벤하닷 왕의 군대는 32명의 왕들이 연합한 군대였기에, 그 수가 무려 십이만 칠천이 넘었습니다(이스라엘의 약 18배의 대군). 그런데도 아합과 이스라엘은 벤하닷과의 전쟁에서 두 번이나 이겼습니다. 아합이 벤하닷과의 전쟁에서 두 번이나 승리를 하게 된 것은 그의 공적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벤하닷을 붙여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를 통하여 아합 왕으로 하여금 여호와가 참 신이심을 알게 하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이를 통하여 여호와께로 돌이키게 하고자 하심이었습니다.

 

본문 20:28-30절을 보면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아람 사람이 말하기를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 하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 큰 군대를 다 네 손에 붙이리니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진이 서로 대한지 칠일이라 제 칠일에 접전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하루에 아람 보병 십만을 죽이매. 그 남은 자는 아벡으로 도망하여 성읍으로 들어갔더니 그 성이 그 남은 자 이만 칠천 위에 무너지고 벤하닷은 도망하여 성읍에 이르러 골방으로 들어가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아합 왕을 위한 승리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아합에게 붙여 주신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두 염소 떼와 같은 보잘 것 없는 아합의 군대가 벤하닷의 대군에게 두 번이나 승리한 것입니다.

본문 31-34절을 보면 “그 (아람의)신복들이 저(벤하닷)에게 고하되 우리가 들은즉 이스라엘 집의 왕들은 인자한 왕이라 하니. 만일 우리가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테두리를 머리에 이고 이스라엘 왕에게로 나아가면 저가 혹시 왕의 생명을 살리리이다 하고 저희가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테두리를 머리에 이고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러 가로되 왕의 종 벤하닷이 청하기를 나의 생명을 살려주옵소서 하더이다. 아합이 가로되 저가 오히려 살았느냐 저는 나의 형제니라. 그 사람들이 징조로 여기고 그 말을 얼른 받아 대답하여 가로되 벤하닷은 왕의 형제니이다. 왕이 가로되 너희는 가서 저를 인도하여 오라 벤하닷이 이에 왕에게 나아오니 왕이 저를 병거에 올린지라. 벤하닷이 왕께 고하되 내 부친이 당신의 부친에게서 빼앗은 모든 성읍을 내가 돌려 보내리이다. 또 나의 부친이 사마리아에서 만든 것같이 당신도 다메섹에서 당신을 위하여 거리를 만드소서. 아합이 가로되 내가 이 약조로 당신을 놓으리라 하고 이에 더불어 약조하고 저를 놓았더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붙여 주신 적을 아합이 왜 살려주는 것입니까? 자기 유익을 위해서였습니다. 아합은 벤하닷이 쳐들어와서 은금과 처자들의 아름다운 것이 다 내 것이라고 했을 때 얼마나 벌벌 떨었습니까? 나는 당신의 종이라고 하며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위해 붙여주신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니 여호와의 전쟁은 간데 없고 자기가 잘나서 이긴 줄로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합에게 자비를 요청하고 나오는 적을 살려주는 정도가 아니라 아에 형제로 맞이하였습니다. 그러자 적들이 얼른 그 말을 받아서 ‘벤하닷은 왕의 형제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합이 벤하닷을 자기 병거에 올립니다. 이것은 형제로 맞이하는 모습입니다. 아합이 여호와께서 붙여주신 적을 형제로 맞이하는 것은 자기의 이름을 위한 것입니다.

 

그려면 아합이 벤하닷을 형제로 받아들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34절을 다시 보면 “벤하닷이 왕께 고하되 내 부친이 당신의 부친에게서 빼앗은 모든 성읍을 내가 돌려 보내리이다. 또 나의 부친이 사마리아에서 만든 것같이 당신도 다메섹에서 당신을 위하여 거리를 만드소서. 아합이 가로되 내가 이 약조로 당신을 놓으리라 하고 이에 더불어 약조하고 저를 놓았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아합은 완전히 패배한 왕을 살려줌으로 자신에게 돌아 올 이익을 생각한 것입니다. 자기의 이름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경제적인 이익도 노린 것입니다. 이것을 벤하닷이 모를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아버지가 아합 왕의 아버지에게서 빼앗은 성읍을 다 돌려줄 것이며, 또 자기 아버지가 사마리아에 그 이름으로 도로를 만든 것처럼 아합 왕도 다메섹에 아합왕의 이름의 도로를 만들수 있다고 합니다. 요즈음도 유명 인사들의 이름으로 거리를 조성하고 있습니다만 이 말을 들은 아합은 벤하닷과 조약을 맺고 풀어줍니다.

 

이러한 아합을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하여 책망하십니다. 35-37절을 보면 “선지자의 무리중 한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그 동무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치라 하였더니 그 사람이 치기를 싫어하는지라. 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나를 떠나갈 때에 사자가 너를 죽이리라. 그 사람이 저의 곁을 떠나가더니 사자가 그를 만나 죽였더라. 저가 또 다른 사람을 만나 가로되 너는 나를 치라 하매 그 사람이 저를 치되 상하도록 친지라”고 했습니다.

 

선지자의 무리 중 한 사람이 그의 친구에게 자기를 치라고 합니다. 그냥 치라고 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임을 밝혀 말하며 그의 친구에게 전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나를 치라고 하였는데 이 선지자 친구가 농담으로 여겼는지 친구를 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치라고 하셨을까 하는 마음으로 친구 선지자를 치지 않은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치라고 한 선지자가 말하기를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나를 떠나갈 때에 사자가 너를 죽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말대로 그 선지자를 사자가 죽였습니다. 그가 또 다른 사람을 만나 자기를 치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그 사건을 알았는지 모르지만 선지자를 상하도록 칩니다.

 

그러면 이 사건이 왜 일어나는 것입니까? 결국 아합에게 말씀하시기 위하여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치라고 하신 것을 아합은 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아합이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음으로 마치 선지자의 친구가 사자에게 찢겨 죽듯이 아합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그렇게 침을 당한 채로 아합에게 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친구를 치지 않았다고 사자에게 찢겨 죽은 선지자를 통하여 여호와의 말씀의 엄중하심을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도 평소에 본문의 사자에게 찢겨 죽은 선지자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인간의 도리를 앞세우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들을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가 인간의 도리를 앞세우기보다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38-40절을 보면 “선지자가 가서 수건으로 그 눈을 가리워 변형하고 길 가에서 왕을 기다리다가 왕이 지나갈 때에 소리질러 왕을 불러 가로되 종이 전장 가운데 나갔더니. 한 사람이 돌이켜 어떤 사람을 끌고 내게로 와서 말하기를 이 사람을 지키라. 만일 저를 잃어버리면 네 생명으로 저의 생명을 대신하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은 한 달란트를 내어야 하리라 하였거늘. 종이 이리 저리 일 볼 동안에 저가 없어졌나이다. 이스라엘 왕이 저에게 이르되 네가 스스로 결정하였으니 그대로 당하여야 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맞은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고 아합 왕에게 나아가 판결을 요청합니다. 자신이 전쟁의 포로를 대신 맡은 것으로 말합니다. 만약 그를 잃어버리면 자신의 생명으로 대신 하든지 아니면 은 한 달란트(현 싯가로 약 5~6억원,6000데나리온)를 내어야 한다는 약속을 하고 그 포로를 맡았는데 자신이 볼일 보는 동안 없어져 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왕에게 묻습니다. 왕은 네가 결정하였으니 그대로 당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마치 다윗을 책망하는 나단 선지자처럼 비유로 왕의 죄악을 들추어내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자를 너의 이익을 위하여 놓아주었으니 네가 책임져야 한다는 말씀을 비유로 전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합은 알아듣지를 못하였습니다.

 

41-43절을 보면 “저가 급히 그 눈에 가리운 수건을 벗으니 이스라엘 왕이 저는 선지자 중 한 사람인 줄 알아본지라. 저가 왕께 고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 네 목숨은 저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저의 백성을 대신하리라 하셨나이다. 이스라엘 왕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그 궁으로 돌아가려고 사마리아에 이르니라”고 했습니다.

 

아합 왕의 말을 들은 선지자가 수건을 벗자, 아합은 그가 하나님의 선지자인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왕의) 손으로 놓았으니 네 목숨의 그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그의 백성을 대신하리라”고 전합니다. 곧 죽으리라는 게시입니다. 이스라엘 왕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그의 왕궁으로 돌아가려고 사마리아에 이르렀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을 인간이 얼마나 망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왜 여호와의 일을 망치고 있습니까? 자기의 이름과 자기의 이익을 위한 것으로 인해서 망치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 때에 보면 롯의 사위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긴 그들은 불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뒤돌아보지 말라고 하신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고 뒤돌아본 롯의 처는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롯의 사위들과 롯의 처와 같은 자들이 아닙니까? 우리가 이들과 별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오바마 전 대통령을 보십시오. 그 가문이 아합과 같이 되지 말란 법이 어디 있습니까? PCUSA(미국장로교단)를 보십시오. 무엇이 아합과 다릅니까?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까? 정말 우리가 사람의 도리보다, 자신의 이름과 유익보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웁니까? 자기 생각보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십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된 자들인지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가 아합과 같이 사람의 도리나 이익을 앞세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죄를 깨닫고 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여 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 길이 우리가 진정으로 사는 길임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040219 안익선 목사/ 참조:창원한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