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고백에서부터 (마 16:13 ~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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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 2000여년 전 예수님께서 유대 땅에 오셨을 때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란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 라는 질문을 수없이 하게 됐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대한 평가는 양 극단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자는 “예수님은 미친 사람이다.” 라고 했고, 혹은 “예수는 먹고 마시기를 즐겨하는 애주가요 탐식가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정치적 적대자들은 “로마의 평화를 방해하는 선동자이며 난동자이다-라고 했습니다. 종교적인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은“하나님을 모욕하는 신성 모독자이다.”혹은 “사단의 앞잡이다” 라고 분노 했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는 =“예수는 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다.” 혹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었다.”혹은 “엘리야 같은 선지자다”, “선하신 랍비다”라고도 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던 젊은 시절의 바울은 “세상의 구주이며, 세상의 소망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며 예수님을 만나 후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지금도 그러합니다. 예수님의 대한 평가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때로는 정치적 혁명자, 때로는 고독한 명상자, 때로는 기득권을 뒤집어엎은 자, 때로는 삶의 현장을 그대로 수용하는 철저한 현실주의자. 때로는 영적인 카리스마적 지도자. 때로는 엄청난 사랑을 표현한 도덕적 윤리적 성인으로 추앙 받기도 합니다. 어쨌든 오늘날도 이 세상에 어떤 분보다 강한 영향력을 여전히 끼치고 계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2. 예수님의 외모는 잘 설명된 부분이 거의 없습니다. 초상화나 동상도 없습니다. 이사야서만이 그 외모가 볼품없다? 는 식으로 표현합니다. 마른 땅에 나온 줄기같다, 연한 순(싹) 같다는 식으로 표현 합니다. 그것은 결국 예수님과 외모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과 외모는 별로 잘 연결되진 않아요. 그래서 성도는 외모 때문에 열등감 가져선 안됩니다. 할렐루야! 예수 믿으면 외모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아멘?
한번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이스라엘 북부 헬몬산 아래 지역. 갈릴리에서 25마일 혹은 40킬로미터 북쪽)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질문을 하십니다. “세상에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제자들은 이 예수님의 물음에 대해서 아주 긍정적으로 대답을 합니다. “침례 요한이라고 합니다.” “정의의 사도, 악을 고발하는 사도라고 합니다.” “엘리야라고 말합니다.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하면서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들을 물리친 능력 많은 예언자라고들 합니다.” “예레미야라고 하더군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묻습니다.“그러면… 그렇다면 나를 3년 동안 따라다니던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하십니다. 직접 체험한 너희들의 생각은 어떠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피상적으로 예수를 알 때가 많습니다. 어디서 들은 것 조각 조각을 누더기처럼 덧대어 꿔매어서 평가하기를 즐겨 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모든 자유가 사라지고 종교적 틀에 얽매여 사는 것이라고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타협적 신앙을 찾기도 합니다. 과거 한국에선 술 좋아하고 담배 좋아 하는 분들이 카톨릭을 많이 믿었어요. 제사드려야 하는 분들도 그랬습니다. 옛 삶을 포기하지 않아도 돼니 참 좋은 거예요, 그래서 예수가 좋고 교회가 좋아 믿긴 믿어야겠는데 즐거운 삶은 포기하고 싶지 않아 카톨릭을 택하는 거죠. 그런데 예수를 바로 알면 그런건 별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술마시지 말라고 하셨어요? 술에 취하거나 중독돼지 말라고 하셨죠. 성찬식에 포도주 안마시나요? 예수님이 담배 피우지 말라셨어요? 단지 건강을 위해 금연하라는 권면이 있는거죠. 미국 근대의 대 부흥사 ‘찰스 스펄젼’ 목사도 골초였다고 합니다. 그래도 수많은 미국인들을 구원시키고 복음 증거 했거든요. 난 예수 믿어도 건강엔 자신있다든지 난 금연하고 싶어도 잘 안돼서 이런 저런 시도를 하는 중이라던지… 아니면 조금씩 줄이려 한다든지 하면 돼는 거지요. 제사는 그냥 추모예배로 바꾸면 되고요. 그런 건 그리 중요한 건 아니예요. 너무 금욕주의 율법주의로 나가면 전도가 안 되고 살 사람이 죽어 나갑니다. 성령 충만 받고 하나님이 은혜주시면 술 담배는 자동으로 끊어질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어떤 분들은 나이 들어 예수 믿겠다는 분들이 있어요. 여러분이 잘 아시는 성자 어거스틴이 엄청나게 방탕하게 살다가 30살이 넘어서 회심하고 예수 믿었어요. 그 말을 들은 젊은 사람들이 “나는 어거스틴처럼 예수를 믿을래요.(?) 젊을 때 좀 방탕하다가 즐길 거 다 즐기다가요.”라고 합니다.
20~30대에 즐길거 너무 즐기다가 불치병 걸려서 40세 경에 죽는 사람도 전 여러 번 봤어요. 술 많이 마시다가 위암으로, 담배 많이 태우시다가 폐암과 위암으로… 바람 많이 피다가 에이즈나 성병으로 돌아가시는 분들 꽤 많아요. 예수는 어려서부터 믿어야 정답이에요.
바울이 젊은 목사 디모데한테 뭐라고 했어요? 딤후 1: 3~5절에 보면…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라고 했어요. 디모데에게 가정에서 어려서부터 외할머니와 어머니 신앙이 교육되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디모데를 신뢰한다는 거예요.
잠언 22:6절에도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주일학교 교육이 중요합니다. 가정에서 성경 읽고 외우고 배우기가 중요해요. 부모가 먼저 본을 보여야 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 다.”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했어요. 예수님을 가장 바로 안거예요. 정답이었어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곧 아들이지만 하나님이란 거예요. 사람의 몸을 입은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고 잠자면서 예수 안에 계신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성령의 역사와 숱한 이적들을 보면서 또 성경의 예언들이 다 맞아 들어가는 보면서 예수님 안에서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신 아들 하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고백을 그렇게 듣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매우 기뻐하시면서 베드로를 칭찬하십니다. 이것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자들을 위해서입니다. 당신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길을 가도 이제 제자들이 넉넉하게 자기 인생들을 복음을 위해 살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확신한 기쁨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선 “베드로야, 너는 반석이다. 그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제자 중에 대장이 된 겁니다. 대장다운 믿음이었기 때문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고백하느냐에 따라 교회가 세워지느냐, 교회가 무너지느냐 결정된 겁니다. 즉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하는 그 고백 위에 예수님의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성도’란 바로 이런 고백을 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거룩한 성전이 되고 여러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역사가 이 땅 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예수님은 또 베드로에게 이르시기를 “네게 이것을 알게 한 이는, 그런 신앙고백을 깨닫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이시요 성령이니라”고 하십니다.
이런 신앙고백이 없이는 우리의 신앙을 시작할 수가 없습니다. 이 신앙 고백이 내 것이 되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도 거듭 날 수도 없습니다.
‘쉘던 메네컨’이라고 하는 사람이 ‘엄격한 자비’라는 책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믿기로 결심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 결정이야말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전부다.”라고 했습니다. 믿기로 결정한다는 말에는 의심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의심을 해보고 시험해 보려고 시도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나는 의심을 품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을 할 수가 없다. 단 의심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사 간구할 따름이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내게 믿음 없음을 도와 주시옵소서.”라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토마스 머튼’이라고 하는 사람은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너무 쉽게 발견했다면
아마도 그분은 당신이 찾던 하나님은 아닐는지 모른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면서 또 이렇게 다른 면을 얘기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겸손한 복종과 사랑으로 하나님께 완전하게 자신을 드리는가 에 비례해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그 분을 본 다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행동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누구인지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믿기도 전에 그 분을 분명하게 보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은 믿음에 여정을 시작조차 할 수가 없다.”라고도 했습니다.
여러분, 믿음이란 다 보고 다 알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어느 부부가 결혼 할 때 평생 다 살아보고 그 결과로 결혼을 해요? 아니잖아요. 믿음으로 하는 거예요. 우리가 다 버스를 타 본 후 안전하면 그때 버스표를 사나요? 아니죠. 비행기를 타든 버스를 타든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갈거라고 믿으니까 표 사고 그걸 타는거죠. 안 그러면 무서워서 어떻게 타겠어요? 오히려 내 속에 의심이 있지만 성경 말씀을 의지하고 믿음의 사람들을 의지하며 믿어 가는 거죠.
‘벤허’라는 영화도 처음엔 예수를 의심한 사람에게서 나온 거예요. 그 원작 소설의 작가가 예수를 수없이 의심하고 연구하고 연구하다 보니 예수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닫게 된거지요.
믿음 생활의 성공도 고백에서 옵니다. 마9:27~31절입니다.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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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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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가 우리 입술로 무엇을 시인하고 고백하느냐는 매우 중대한 문제입니다. “내가 죽겠다, 힘들다, 어렵다,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없다 “고 하면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비록 지금은 이렇지만 나는 다시 일어난다, 나는 소망이 있다, 나의 하나님이 날 도우신다, 우리 기도를 들으신다, 의인은 일곱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다, 나는 낫는다 “ 라고 고백하고 시인하면 그리 될 줄 믿습니다.
노래도 소망의 노래를 부르세요. ‘내일은 내일 또 다시 새로운 태양이 뜰거야’ 라는 소망의 노래를 수도 없이 부른 송대관 집사 보세요. 빚도 다 갚고 재판에서도 이기고 다시 연예계에 나와서 열심히 노래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쟎아요? 할렐루야!
결론)
우리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성령이 함께하시고 예수가 함께하시면 소망이 있습니다. 시편 81:10절은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고 하
셨습니다.
예수께서도 요15:7 에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셨어요.
예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으면서 기도하면 다 이뤄진다고 하신거예요. 할렐루야!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라는 자꾸 찬송을 부르세요! 할렐루야!
이번 한 주도 믿음을 고백하고 시인하십시오. 우리의 인생은 바로 혀의 권세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의 말을 하세요. 믿음의 노래를 하세요. 그런 믿음으로 감사하고 믿음으로 봉사하고 믿음으로 전도하시길 바랍니다. 그런 한 주간이 될 때 이번 한 주도 넉넉히 승리하는 믿음으로 살아가게 될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102020 안익선 목사/ 참조: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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