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시작(단9:18-24)
18.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 19.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20.내가 이같이 말하여 기도하며 내 죄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고 내 하나님의 거룩한 산을 위하여 내 하나님 여호와 앞에 간구할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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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 여러분!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은 계십니까? 이 두 질문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은 곧 나를 아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 서있는 자신을 볼 수 있는 것은 은혜를 받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의 나 자신의 길을 찾는다는 것은 사막이나 큰 바다 가운데서 나아갈 방향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2. 어느 장로님의 간증입니다. 이 장로님은 제법 큰 사업을 하던 중 부도가 나서 사업체가 무너지는 시련을 맞게 되었습니다. 사업이 망하자 그렇게 찾아오던 사람들의 발걸음이 뚝 끊겼고 친지들의 방문도 끊어졌습니다. 장로님은 좌절감과 배신감을 안고 기도원에 올라가서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그 기도 중에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큰 은혜를 깨닫고 사업을 다시 크게 일으켰습니다. 장로님은 그 당시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난을 받고 크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멀어지면 하나님과는 가까워진다는 섭리였습니다.”
그 장로님은 평상시에 느끼지 못했던 하나님께 대한 마음이, 인생의 고난을 통하여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시편34:18절에는,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 즉, 하나님 앞에 서있는 자신의 모습을 깨닫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이처럼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차원 위에 역사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언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론)
가)바벨론 포로였던 다니엘
본문의 배경을 봅시다. 본문은 단9장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멸망한 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다니엘의 기도 내용 중 일부와 기도에 대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한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기록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성전에 까지 우상을 섬기는 방을 만들었던 남 유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바벨론에 멸망 당하여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갈 때, 함께 기원전 586년 경에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당시 다니엘은 어린 나이였으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롭고 총명한 소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을 바벨론의 총리가 되게 하셨고, 성년이 된 다니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안타깝고 힘든 포로로서의 현실을 더욱 실감있게 깨닫게 됩니다.
고로 다니엘은 자기 민족이 노예 생활을 해야 하는 이유가 하나님을 거역함으로 인한 징계임을 시인하였으며, 그리고 그 징계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70년이란 기한이 있음을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한 말씀 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안 다니엘은 자기 민족을 위한 금식 기도를 결심했습 니다. 다니엘의 기도는 백성들을 대신한 처절한 회개의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인 4절부터 19절까지가 참회와 함께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기도 내용이 된 것 입니다.
나) 절망적인 이스라엘의 현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작지만 찬란한 왕국을 이루었던 이스라엘 백성의 현실은 이제 망국의 한을 안고 사는 오도가도 못하는, 감옥에 갇힌 듯한, 그런 절망적인 민족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는 일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10년 20년 세월이 흐르면서 …유대인들 은 노예로서의 삶에 길들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멸망 당하기 백 여년 전부터 여러 선지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경고가 있었음에도 그 경고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름은 가지고 있었지만, 실상은 세상적인 평안과 안일을 누리면서 자신들 마음대로 온갖 우상을 더욱 사랑하며 살았습니다. 그 현실을 하나님께서 이렇게 증언하십니다. 다음 구절들을 보십시오.
“ 렘7:1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제 너희가 그 모든 일을 행하였으며,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지 아니하였느니라.”/ 렘35:17= “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거민에게 나의 그들에게 대하여 선포한 모든 재앙을 내리리니, 이는 내가 그들에게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며 불러도 대답지 아니함이니라 하셨다 하라.”/사66:4= “나도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청종하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 악을 행하며 나의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오늘날의 얼마간의 성도들은 어떠합니까? 입술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라 !섬기노라!’라고 하면서도 생활 속에서는 말씀을 무시하고 자신의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갑니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같이 많이 증거 된 때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숱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서 더욱 멀어지며 환호하고 있습니다. 바벨탑을 쌓으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시대에 더 많은 재앙과 더 많은 질병과 더 많은 전쟁과 환란으로 징계하며 경고하고 계십니다. 제발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대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롯의 때와 같이 소돔과 고모라 성 사람들 같이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도 농담으로 여겼듯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하나님의 경고를 여전히 무시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창19:14).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 시대도 이미 절망과 환나의 날들이 다가왔습니다.
다) 아직은 기회가 남아 있다.
그런 절망의 날에도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신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하여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사람인 다니엘을 예비하셨습니다. 다니엘은 이스라엘의 현실을 알고, 하나님의 계획을 깨달았습니다. 다니엘은 지체함이 없이 기도를 결심했고 곧 시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시대에 소망의 기회를 부여하고 계십니다. 우리 자신들과 이 시대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수 있는 기회가 아직은 있습니다. 이 기회는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이킬 수 있는 길입니다.
이사야30:18절에서,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저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준비해 두고 계십니다. 다만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기다리고 의지해야만 은혜를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5:25절에서 이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했습니다. 곧 ‘하나님의 은혜 받는 길’은 우리 죄 대신하여 십자가 달리시고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고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 일이며 그분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메시야, 곧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일입니다. 자, 그러면 이런 회복의 은혜, 해방의 은혜, 예비하신 은혜는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옵니까? 24절=일흔 이레 후 그리스도가 오신다고 했습니다. 다니엘이 가브리엘을 만난 후 70*7=490년 후입니다. 놀라운 예언의 부분입니다.
라) 하나님의 은혜는 자기를 포기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의 은혜의 시작은 자포자기가 아니라, 자기 포기에서 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우ㅝㄴ하거나 죄를 사하거나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즉 자신의 생각과 계획과 생사여부조차도 하나님께 맡기며 나를 포기해야만 합니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는 것에서 나를 포기하는 일이 가능해 집니다. 그 출발점이 바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또 예수님은 나의 왕이요 나의 삶의 주인임을 믿고 영접하는 일입니다. 그 다음이 예수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순종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도 내가 펄펄 살아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다 합니다. 소고집을 부리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인에 대한 종의 월권행위요, 불법행위입니다. 자기마음대로 하고 싶은 일을 주인의 뜻과 상관없이 마구 해대는 참으로 괴상망측한 종이 되는 것입니다. 주인보다 더 높은 주인이 된 것입니다.
다니엘은 바로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과 계약을 맺고 ‘선민’이 된 이스라엘이 종이 아니라 괴상망측하고 뻔뻔한 주인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높은 주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주인을 마구 물어 뜯는 개처럼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본래 하나님께 속했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삶이 자기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멋대로 살았으니, 주인에 대한 반역이며 계약의 파기행위를 한 것입니다. 이 잘못된 길을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역시 자기 자신의 포기입니다. 다니엘은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들을 잘못을 뉘우치고 또 뉘우쳤습니다.
결국 다니엘의 회개 기도는 곧 자신과 민족에 대한 완전한 포기각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잘못된 소유욕에 대하여 회개했습니다. 그 사실이 본문 19절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의 기도를 즉각 들으셨고 응답하셨습니다(본문20~24절에).
20.내가 이같이 말하여 기도하며 내 죄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고 내 하나님의 거룩한 산을 위하여 내 하나님 여호와 앞에 간구할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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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엔 지극히 거룩한 이, 곧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하시리라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무슨 말이예요? 기름 부음 받음자란 뜻이죠. 맞죠? 예수를 믿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가 죄를 그치게 하고 용서받게 하실거라 했습니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예수를 구주로모시고,‘내’가 ‘나’이기를 포기할 때, 하나님은 ‘나’를 위한 당신의 계획을 시행하십니다. ‘내’가 ‘나’이기를 고집할 때는 하나님께서 일 하시지 않습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자기의 고향에서는 아무런 능력도 행하실 수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하찮은 노동자 목수 곧 요셉의 아들, 코 흘리던 꼬맹이? 라고 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따르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8:34)고 말입니다.
*여러분 낙타를 보셨지요? 저는 낙타를 생각하면 하나님께선 참 놀라우신 분이구나 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낙타는 오로지 사막에서 10일 정도라도 아무것도 먹지 않고 물도 안 마시고 살 수 있는 동물입니다. 수천년 동안을 사람들은 낙타의 도움으로 사막을 수없이 건넜습니다. 이 낙타는 유난히도 눈썹이 깁니다. 왜 눈썹이 길게 창조됐겠습니까? 그래야 사막에서 무섭게 몰아치는 모래바람을 막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모래바람이 눈 앞을 가릴 때, 오직 길을 잃지 않고 앞으로 갈 수 있는 것은 낙타 뿐입니다. 또 낙타는 커다란 지방이 든 혹이 등에 달려 있습니다. 낙타는 무려 10일 동안 아무 것도 먹거나 마시지 않아도 혹에 있는 지방이 분해 되면서 물과 영양분으로 변해 체내에 공급이 됩니다. 가도 가도 뜨거운 사막에서 굶주림과 갈증을 넉넉히 이기고 가시나무도 마구 씹어 먹을 수 있고 두툼한 발로 사막에 빠지지 않고 잘 걸어갑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다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낙타는 무릎에 굳은살이 유독 눈에 띄게 두껍습니다. 짐을 싣거나 사람을 태우려면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낙타의 등은 생각보다 매우 높습니다. 말보다 더 높아요. 그래서 주인을 태울 때 낙타는 조용히 무릎을 꿇고 오랫 도안 기다릴 수 있습니다.
한편 유태교 전설에는 사도 야고보는 낙타의 무릎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열심히 그리고 많이 하는 사람들을 흔히 ‘낙타 무릎’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무도 많이 무릎을 꿇었기 때문에 무릎에 굳은살이 두껍게 변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이라 할지라도 삶의 고난은 피해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면…그들은 다만 인생의 깊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 무릎을 꿇으며 살아 가기에 기도의 응답을 받으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결론)
하나님께서는 지금의 나를 너무도 잘 알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의 나의 삶의 필요를 채워 주고 계십니다. 결국 우리들의 삶은 하나님께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의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비를 고루 내려 주십니다. 왜 일까요? 의인은 더욱 의인 되라고, 악은 은 악에서 떠나 의인이 되라고 기회를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기회를 놓치면…재앙이 나를 치게 될 것입니다. 징계가 임할 뿐 입니다.
저는 낙타를 보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감탄하게 됩니다. 그런 낙타를 지으신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신묘막측!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살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은혜 주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그분은 우리의 창조자시요 주인이시요 보호자이십니다. 오늘 나의 생각을 버리십시요. 내 방법을 버리십시오. 내 자랑을 버리십시오. 나의 죄악을 십자가 아래 내려 놓으십시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일을 시작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과연 여러분의 삶을 온전히 맡기고 있습니까? 그분이 진정 주인이십니까? 혹 절반은 주인이고 절반은 내가 아닙니까? 아니면 전부가 나 뿐입니까?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 시오. 하나님이 부르실 때 대답하십시오. 그리고 듣고 배운 말씀을 행하십시오. 하나님을 무시하고 외면한 죄를 버리고 돌아와 하나님을 좇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가 진정 기도의 응답을 받고, 은혜를 받고, 사함을 받고, 축복 된 사람으로서 계속 살아 갈 수 있습니다.
101320안익선 목사/ 참조:대복교회 & 배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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