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모음(Korean sermons)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면(시편 23:1~6)

호걸영웅 2020. 11. 13. 00:24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면(시편 23:1~6)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서론)
오늘 읽은 성경의 시편 23: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시편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서부영화나 전쟁영화에서 장례를 치룰 때 가장 많이 등장하고 사용되는 시편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편의 저자는 다윗이라 했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기록한 시편입니다.
다윗은 본 시편에서 두 가지 고백을 합니다. 첫째는 자신은 양처럼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라는 확신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숱한 은혜를 체험한 어린 목자요 왕이요 군인이요 선지자입니다. 고로 그는 하나님 앞에서 매우 겸손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라고 고백합니다. 그 말은 자신은 하나님의 양에 불과하다는 이야깁니다. 이 시편을 쓸 당시에, 그는 막강한 유다 왕국의 왕으로서 풍성한 경제력과 강력한 백전백승의 군사력을 갖춘 나라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런 부강한 나라의 왕이 자신을 하찮은 양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시편 23을 통해 왜 여호와가 우리의 목자이셔야 하는지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길 원합니다.)

본론)

)양에 대하여

1. 양은 보잘 것 없는 약한 동물의 하나입니다. 또한 양은 대단한 근시라고 합니다. 그래서 멀리를 내다볼 수 없습니다. 방향감각도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시냇물을 찾는다든지, 길을 잃었을 때 자기 우리를 잘 찾아 올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양은 철저한 무방비 상태의 동물입니다. 동물들은 저마다 적들로부터 자기를 방어하거나 공격할 수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컹크는 독가스액으로 자신을 보호합니다. 사슴은 도망 질을 매우 잘하는 긴 다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카멜레온은 보호색이 있어 자신을 잘 숨길 수 있습니다. 뱀은 독니가 있고 소도 나름 강한 뿔이 있어요. 그러나 양은 그렇지 않습니다. 숫양의 뿔도 둥그스름하게 말려서 별 신통한 방어수단이 못됩니다. 거의 무방비 상태인 존재가 양입니다.

미국에서 어떤 사람이 고양이를 자루에 넣어서 삼십 리(2마일) 밖에 버렸답니다. 그런데 그 고양이가 주인보다도 먼저 집에 와 있었다고 합니다. 고양이나 개는 예민한 방향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양에게는 그러한 감각이 없습니다. 양은 왔던 길도 잘못 찾는 답답한 동물입니다. 또 양은 지능도 낮은 동물이라 합니다. 힘이 없으면 지혜라도 있거나 머리?라도 좋아야 살아남을 텐데 양은 다른 동물들과 비교해도 IQ가 낮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양은 겁이 많은 동물입니다. 사소한 소리에도 놀라서 막 도망을 칩니다. 양 한 마리가 뛰게 되면 다른 양들은 영문도 모르고 따라서 뜁니다. 한번은 양들이 지나가는 길에 막대기로 낮은 장애물을 만들어 놓으니 막대기를 앞 선 양들이 뛰어넘습니다. 바로 뒤에 따라오던 양도 앞에 가는 양을 보고 그대로 따라서 펄쩍 뜁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막대장애물을 치워도 그 다음 따라오는 양들이 영문도 모르고 여전히 펄쩍 펄쩍 뛰더라고 했습니다. 고로1절에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고백하며 자기는 양 같은 존재라고 고백합니다.

) 여호와 목자셨음에 대하여
그래서 양에겐 목자가 절대로 필요합니다. 그런데 왕년에 어린 목자였던 다윗이 여호와가 자기의 목자가 되셨기에 자기에게 부족함이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여호와가 목자가 되시면 어떤 면에서 부족함이 없습니까?

1)
환경적인 면에서 부족함이 없었다.
2
절에 보면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고 고백합니다. 양에게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는 최상의 환경입니다.
다윗은 왕이 되기 까지 참으로 어려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15살에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약 15년의 고난의 세월을 억울한 누명을 쓰고 도망자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고난을 통해 다윗을 점점 강성하게 하시면서 진정한 왕이 되는 훈련을 받게 하시고 결국 그의 모든 환경들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환경을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고 문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4절의 고백대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된 우리를 더 좋은 곳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게도 하십니다. 목자가 양을 이끌고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을 찾아 일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양떼가 험한 골짜기도 지나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자가 함께 합니다. 양만 보내진 않는 것입니다. 함께 위험을 무릅쓰게 됩니다. 고로 해를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팔레스틴의 목자들은 대체로 네 가지를 몸에 지니고 다닙니다. 우선 동물 가죽으로 만든 작은 가방입니 다. 여기에는 자기가 배고플 때 먹을 음식과 물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투석기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다윗이 물맷돌을 던진 바로 그 물맷돌 투석기입니다. 그리고 막대기와 지팡이입니다. 4절에 보면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고 했습니다. ‘안위한다’는 말은 ‘안심시키다’, ‘위로하다’라는 뜻입니다.

목자가 가지고 있는 긴 지팡이는 길고 끝부분이 구부러져 있어서 양이 골짜기를 지나다가 빠지면 그 지팡이를 양의 목에 걸어서 잡아 당겨 끌어내 올려 줍니다.
목자는 자기가 가까이 있다는 것을 양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피리를 불기도 하고 노래를 하기도 하고 가끔씩 가지고 있는 막대기로 바위를 톡톡톡 두들기기도 합니다. 그 목자의 막대기 소리는 양들에게 안도감을 주고 다른 짐승들에게는 위협을 주는 소리가 됩니다. 목자의 막대기 소리가 들리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라도 양은 안심하고 누울 수 있었습니다. 장소가 좋아서 눕는 것이 아니라 거기 목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런 선한 목자되신 여호와의 음성과 인도를 받아 살아 온 것입니다. 그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수없이 지났지만 부족함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2)
원수를 만나도 부족함이 없었다.
양들은 자신을 보호하거나 적을 공격할 능력이 없다 했습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가 있기에 곰이나 사자가 나타나도 걱정 없습니다. 목자는 투석기를 가지고 물맷돌을 던져서 맹수를 물리칩니다. 다윗은 그런 물맷돌 투석기로 거인 장수 골리앗도 쓰러뜨렸습니다.
목자가 가지고 다니는 막대기는 나무로 만든 곤봉에 구리나 철을 입힌 것입니다. 이것은 들짐승이나 도적들과 싸울 때 사용했습니다. 목자가 양을 보호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다윗을 보호하셨기에 다윗에게는 어떤 원수가 있어도 이기는데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3)일상의 삶 속에도 부족함이 없었다
5
절을 보면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리시고 기름을 머리에 발라 주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은 밥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상을 베푼다는 것은 잔치를 베풀어준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원수의 눈앞에서도 잔칫상을 받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멋진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원수의 앞에서도 음식을 잘 먹고 잘 쉴 수 있다면 얼마나 큰 복입니까? 거기다가 머리에 기름을 부어주신다고 했는데 이 말은 원수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받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한편은 치료해 주신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원수 앞에서도 일상생활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4)
고로 미래에도 여전히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다윗은 이 시를 지을 때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해서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평생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자신을 따랐으니 남은 여생이라고 변하실 하나님이 절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목자로 삼은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 조차 벗어버리고 소망과 기대로 미래를 맞이합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목자로 삼은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한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연합군들은 집 없는 아이들을 모아 커다란 캠프 안에서 함께 살도록 했답니다. 거기서 아이들은 배불리 먹었고 안전하게 보살핌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이들은 밤이면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어느 심리학자가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 냈습니다. 아이들이 침대 속에 들어간 후에도 각자가 손에 쥘 수 있는 있을 빵을 한 조각 씩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잘 때 먹으라고 준 것이 아니라 그냥 손에 들고 자도록 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그마한 빵 한 조각이 놀라운 효과를 가져 왔습니다. 아이들은 내일도 먹을 것이 있다는 안도감에 서 평안히 잠을 잘 수 있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내일 먹을 것을 염려해야만 했던 그 아이들이 내일의 염려를 해결 받았을 때, 비로소 평안히 잠들었다 했습니다. 이것이 어찌 전쟁 고아들만의 심리 상태이겠습니까? 이것이 현대인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한 아들이 노모를 모시고 살았습니다. 하루는 어머니가 중얼중얼 합니다. “우리 집은 망했어요. 이제 모두 굶어 죽을 것 같아요.” 밤에도 자지 않고 걱정만 했습니다. 이제 곧 망한다는 생각에 식사도 거부하고 방에 불도 켜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실 이 할머니는 재산도 많고 자녀들도 다 훌륭하게 양육시켰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이상한 증세를 보이자, 그 아들은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곳간에 쌀을 많이 쌓아 놓고, 드실 것도 풍족하게 갖다 놓았습니다. 그리곤 말하기를“어머니, 이 광에 쌀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머니가 이번에는 눈물을 흘리면서 “이것 다 먹으면 어떻게 하지? 이제 우리는 곧 굶어 죽을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정신과 병원에서 진찰을 받게 했더니 노인성 우울증 환자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이 어머니는 예수 믿고 시편 23편을 자꾸 외우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현재의 목자만이 아닙니다. 앞으로도 여러분의 평생에 아니 영원토록 목자이십니다. 여호와를 목자로 삼아서 영원토록 부족함이 없기를 바랍니다.

) 여호와를 목자로 삼은 양의 삶에 대하여
오늘날 하나님이 다윗의 목자이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십니다. 40:11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 로다”고 합니다. 이 선한 목자의 이미지는 신약에서 예수님 자신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요 10:11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양된 우리들이 목자 에수님의 인도함을 잘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따라가야 합니다.
전남 순천에 참 존경받는 목사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 목사님이 여순 반란 사건 때, 순천에 있다가는 잡혀 죽을 수밖에 없어서, 순천에서 조금 떨어진 별량이라고 하는 곳에 가서 숨어 지내다가 그 동네 공산당원들에게 붙잡혔습니다. 그는 순천 사람인지라 순천으로 보내졌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데 불안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으니 독 안에 든 쥐 꼴로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반란군 장교 하나가 들어오더니 여기 예수 믿는 놈 있으면 나오라고 소리칩니다. 처음엔 아무도 손을 못 들었 습니다. 그 목사님이 가만히 보았더니 자기 교인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치미를 떼고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신앙 양심의 가책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는데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다고 하면 당장에 죽을 형편이었기에 꾹 참고 있었습니다. 장교가 나가더니 한참 있다가 다시 들어 왔습니다. “여기 목사 놈 있으면 나와” 라고 거듭 소리칩니다. 그 당시 순천에는 목사님은 그 목사님 한 분 밖에는 없었습니다. 분명히 자기를 두고 하는 소리였습니다. 그렇지만 손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마음 속으로 “이놈아, 너 목사가 아니냐. 바로 너를 부르는 소리 아니냐. 왜 그렇게 목사가 아니라고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느냐. 손 들어”라는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 목사님은 견디다 못해 “내가 목사요” 하고 손을 들었습니다. 그랬더니 장교가 목사님의 목덜미를 잡고는 “이 반동은 괴수니까 내가 직접 처리할테니 너희들은 가라”며 다른 사람들을 못 따라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을 산기슭으로 끌고 간 장교는 공포탄만 쏘고는 목사님에게 “목사님! 빨리 도망가십시오. 내가 어떻게 하다가 지금은 이렇게 됐는데, 사실은 내 아버지, 어머니도 다 예수 믿습니다. 나도 주일학교에 열심히 다녔습니다. 듣자 하니 순천 지방에서 유명한 목사님이 잡혀 왔다고 하길래 살려 주려고 ‘믿는 사람 나와라’ 해도 안 나오고 ‘목사 나와라’ 해도 얼른 안 나오니 참 답답했습니다. 마지막에라도 손을 들어줘서 감사합니다. 내가 내 손에 권세가 있을 때 돕는 길은 이것 밖에 없지 않습니까? 빨리 도망가십시오.” 라고 했더랍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이 살아났습니다. 그 목사님이 바로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장까지 지내신 나덕환 목사님이십니다. 만약 나덕환 목사가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불순종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목사님은 아마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따라가는 길이 사는 길입니다.


2)
목자의 우리 안에 거해야 한다.
6
절에서 다윗은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살리로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는 직역하면 ‘돌아가리로다’라는 말이라 합니다.
목자는 날이 어두워지면 양떼가 들짐승들의 공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 집어넣습니다. 그때 목자는 양의 문에 지팡이를 가로 질러 놓습니다. 그러면 양들이 그 밑으로 한 마리 씩 지나갑니다. 그 때 목자는 양의 숫자를 헤아리고 또 하루 동안 다친 데는 없는지 무슨 문제는 없는지 살펴보아 줍니다.

양은 저녁이 되면 목자의 우리에 거해야 합니다. 만약 목자의 우리에 들지 못한 양은 들짐승의 밥이 될 뿐입니다. 참 목자이신 하나님은 이 땅에 목자의 양 우리를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곳이 바로 교회입 니다. 영원한 영적 세계에서 목자의 양 우리는 천국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는 교회에 거해야 하고 죽어서는 천국에 거해야 합니다.

결론)

양은 언제나 목자와 함께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양이 사는 방법입니다. 사자나 늑대는 짐승을 잡아먹고 살고, 소나 나귀는 일하면서 삽니다. 그러나 양은 목자를 보고 살아야 합니다. 양이 사는 방법은 목자밖에 없습니다. 이번 한 주간도 헛된 세상일에 한 눈 팔지 말고, 선한 참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만 바라보고 또 그 음성에 순종하며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할렐루야!

 

110220 안익선 목사/ 참고: 마경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