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좋은 부활을 사모하자(빌 3:10-12)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서론)
1.성경에서 가장 믿기 힘든 부분이 무엇이냐 라고 제가 여러분께 묻는다면 여러분은 어느 부분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부활이라고 답하는 분들이 꽤 계실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재림이 아닐까? 라고 말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사실 성경의 많은 사건들이 믿기 힘든 부분들이 많이 있음은 사실입니다.
2.서점에선 종종 성경 난해 구절들을 모아 책으로 만들어 설명하는 목사님들이나 신학자들도 꽤 있습니다. 그리고 제법 잘 팔리는 인기 도서 목록에 올라가기도 합니다. 저도 그런 책을 서너 권 읽어 본적이 있는데…꽤 신앙에 도움이 됐습니다. 아무튼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과학은 자연현상의 법칙이나 원리를 발견해 나가는 학문이지 창조하는 학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오늘은 부활절 절기인 이유로 … 성경의 기적 중 정말 믿기 힘든 것들 중 1, 2위를 다투는 “부활”에 대해 잠시 증거해 보겠습니다. )
본론)
가)초대교회의 최대 관심사였던 예수의 부활
1.신약성경에서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장이라는 별명을 가진 장’입니다.
이 부활장을 잘 읽어보면 초대교회 당시에도 이 부활을 믿지 못하고 의심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전혀 이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도 당시에는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지가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고 그 당시에 현장에서 그 사실을 목격한 사람들이 태반이나 살아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역시……그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수 밖엔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예수님에 대해 다른 것은 모두 믿지만 이 부활에 대한 확신은 가지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뭐 저도 사실 그랬으니까요.
그러나 부활의 신앙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리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기에 피해 갈 수는 없는 부분입니다.
2. 어쨌든 초대교회 신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었습니다.
본문 10절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또 그 부활의 권능에 대해서 더 확실하게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그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했습니다.
바울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알고자 하고 믿고 따르고자 했던 일이 이 일이었습니다. 고로 그들은 서로 만나면 이 부활에 대해서 서로 아는 바를 증언했고 이 부활의 신앙을 전하는 일에 매우 큰 힘을 쏟았습니다. 왜냐하면…기독교의 우수성이나 참된 우월성,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전하려면 부활 보다 더 강력한 증거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초대 기독교 교회도 없었으리라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일입니다.
그들의 교주인 예수가 보잘 것 없는 죽음을 당하였다면, 그 종교는 별 볼일 없는 종교이고 구저 그런 잡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 하에서는, 그들은 남을 설득하여 그들을 따르게 할 수도 없고, 기독교 신앙의 전파는 부흥은 꿈도 못 꾸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 지도자와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다는 확신을 가졌고, 그들은 세계를? 누비다시피 하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널리 알려,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살아나시고 하늘에 오르신 예수를 믿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이나 사도들의 서신서들에서도 부활의 의미는 중요하였습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은 그 첫 장을 열면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자라고 확증하였고, 요한을 만나신 부활하신 에수께서도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라고 스스로 밝히셨음을 증언합니다 (계 1:5, 18).
나)그들은 부활을 확신할 수 있는 증거들이 너무도 많이 있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의심을 하는 사람들의 큰 두가지 반론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 반론들을 요약하면 첫째,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죽으신 게 아니라 다만 기절하고 있다가 깨어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또 둘째는, 예수님께서 죽기는 죽으셨으나, 부활하지는 않았고 유령이 나타난 것이다 라는 주장입니다.
여기에 대해 그들의 주장이 헛된 것이라는 증거들이 여럿 있습니다.
1)첫째, 시신에서 물과 피가 흘렀다는 점.
먼저는 예수님의 죽으심의 확증을 위한 증거는 로마 병사들이 십자가 달린 예수의 죽음을 확인코자 창으로 그 옆구리를 찔렀을 때 물과 피가 흘렀다는 것입니다. 의학적 상식은 살아 있는 사람의 상처에서는 피만 나오지만, 사람이 죽으면 그 죽은 사람에게서 물과 피가 같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확실히 돌아 가신거라는 거죠.
2)둘째, 예수님의 돌무덤의 인봉 (마 27:66)이 끊어진(뜯겨진) 점.
만약에 누가 일부러 이 인봉을 뜯어냈다면 엄청난 각오를 가진 사람이 한 짓일 것입니다.
이 일로 붙잡히게 되면 로마군에 의해 즉시 처형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사건이죠. 예수님을 가까이서 따르던 제자들조차도 모두 자기가 잡힐까 두려워서 겁을 잔뜩 먹고 몸을 피해 숨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쓸데없이 이런 일을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천사 외에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겁니다.
3)셋째, 예수님의 빈 무덤을 막은 큰 돌.
무덤 입구를 막았던 큰 돌은 대략 1360~1800kg의 무게라고 합니다. 몇 사람이 힘을 합치지 않으면 절대 옮길 수 없는 돌입니다. 천사 외에는 이런 일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덤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던 로마 병정들의 눈과 귀를 막지 않고서는, 이같이 큰 돌을 그들에게 들킴 없이 옮기는 일이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죠.
4)넷째, 로마 병정들이 도망 쳤다는 사실.
만약, 빈 무덤 사건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들이 도망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무덤이 멀쩡한데 왜 도망 가겠어요. 천사의 임재가 있었고 천사의 두려운 영광이 무덤을 둘러 쌓기 때문에 그들이 무서워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을 친 것이죠.
5)다섯째, 잘 정리된 세마포와 수의
제자들이 무덤에 가보았을 때, 예수님의 몸은 온데 간데없고, 세마포만 그대로 놓여 있었으며, 머리를 쌓던 수건 또한 가즈런히 접어 놓아져 있었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도적질 해갔다면, 그렇게 수의를 홀딱 벗기고 또한 가지런히 정돈까지 할 정신이 있었겠습니까? 통째로 들고 도망치기도 바빴을텐데 말이죠.
6)여섯째,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증인이 너무나도 많고 또한 다양하다는 사실입니다 (고전 15:1-8).
단순히 눈으로만 목격된 게 아니라, 도마는 직접 손으로 손에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까지 상세히 확인했고 (요 20:24-29), 어떤 제자는 같이 식사도 하였으며 (눅 24:13-35; 요 21:1-14), 엠마오 마을로 도망치던 제자들에게도 나타나시고, 예수를 박해하는 자였던 사도 바울에게 까지 나타나셨습니다 (행 9:1-9). 그리고 오 백여명의 성도들에게도 일시에 나타나 보이셨다고 했습니다.
7) 일곱째,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자들이 여자들이라는 것도 기록된 점.
당시 유대인의 풍습에 따르면, 여자들의 증언은 법정에서도 거의 인정이 되지 않을 만큼 무시 되었습니다. 따라서 만일 부활의 사건이 날조되어진 것이라면, 여자들의 목격은 의도적으로 성경의 기록에서 삭제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매우 확실한 증거로 인정되었기에 성경에 기록에서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주장도 부활의 확실성을 증거한다고 합니다.
8) 여덟번째, 예수님의 죽음 이후 180도 달라진 제자들의 변화된 삶이 예수님의 부활을 매우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예수의 11제자가 다 순교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거짓말이나 거짓 사건을 위해 목숨을 내 놓겠습니까? 절대 아닐 것입니다.
만약에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왜 무엇 때문에 그들은 목숨을 바쳐 이를 증거하려고 목숨을 내놓고 무수한 고난을 자처했겠습니까?.
9) 아홉번째,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의 가장 큰 주제(이슈)도 부활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11-12절 말씀에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 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무슨 일을 다해서라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신대로 온전하고 영광된 부활에 동참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 소원을 위하여, 이미 얻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온전히 다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아직 되지 않은 일을 되게 하려는 사람처럼 최선을 다하여 그 길로 달려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장 크게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을 분명히 만나 본 후, 회심하여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부활에 동참하기를 가장 강렬하게 사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예수의 부활에 동참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남은 고난에 동참시키기를 원하십니다.
결론)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부활을 하되 더 좋은 부활이 있다고 믿고 더 좋은 부활을 하기 위해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고난의 길을 택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히11:35-37) =“…….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치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라고 했습니다.
‘더 좋은 부활’이라 함은 예수님을 더욱 잘 따르고 순종하여 더 큰 상급을 받기를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 초대교회 어떤 성도들은 세상에서의 고난을 자초하면서 살았습니다. 하늘나라에 더 많은 것을 쌓으려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고 떵떵거리며 사는 것이 전부입니까? 그렇다면,뭔가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은 부활, 더 좋은 부활을 소망하셔야 합니다.
인생 100년은 정말 짧은 순간과 같습니다. 잠시 있다 사라질 안개와 같습니다. 이왕이면 영원에 투자하십시오. 이왕이면 더 좋은 부활, 더 나은 부활을 선택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오늘 이 부활절 감사주일에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축복의 길이요, 지혜로운결단이 될 것입니다.
033021 안익선 목사/ 참조 : 양향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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