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고린도후서 서론

호걸영웅 2021. 9. 30. 23:40

고린도후서 서론

 

1.   들어가는 말

고린도전서가 객관적이고 실제적인 서신이라면 고린도후서는 주관적이며 개인적인 서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로부터 고린도 전서를 받은 후, 거짓 교사들의 미혹을 받아 바울을 배척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바울이 변덕스럽고, 거만하며, 외모나 언사 가 출중하지도 못하다고 비난했습니다.

무엇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그들의 말에 미혹 되어 바울이 전한 복음까지도 불신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바울은 이런 오해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급히 디도를 고린도 교회에 파견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디도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잘 수습하였고 그리고 다시 바울에게 돌아와서 그들이 회개하고 바울을 만나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그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고린도 후서를 다시 써 보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후서를 화해의 서신이라고도 합니다.

바울은 회개한 대부분의 성도들에게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와 위로를 보냈고, 여전히 거역하는 소수의 문제 교인들에 대해서는 매우 엄한 책망과 경고를 했습니다. 특히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부인하는 거짓 교사들의 문제들을 지적하고, 그들의 정체를 분명히 밝히고, 자신의 사도권을 힘써 변호 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를 바울 자신의 사도직을 위한 변증서라고도 하며, '사도 바울의 자서전'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는 고린도후서를 통해서 첫째, 사도 바울의 목자의 심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에게 미혹되어 바울을 비방하고, 대적하는 양떼들 을 위해 눈물의 편지를 보내고, 어찌하든지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고 자 몸부림치는 바울의 목자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또 파괴된 관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하며, 마침내 모든 관계성을 회복 하고 기쁨이 충만한 모습을 통해서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둘째, 사도 바울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을 배울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은 온갖 간교한 말로 바울을 비방하였습니다. 양 떼들의 마음 속에 바울에 대한 불신을 심었습니다. 바울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서도 불신을 심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요, 새 언약의 일꾼이요, 사도로서의 증거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밝힙니다. 그리고 거짓 교사들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바울은 누가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않는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사단의 공격을 이기고 결국 승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바울의 복음 진리에 대한 확신과 복음 역사에 대한 책임감과 불타는 사명감을 배 울 수 있습니다.

  셋째, 사도 바울의 범 세계적인 교회관을 배울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방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 하나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많은 기도를 했습니다. 이 일은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에, 많은 오해를 받으면서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을 거두었으며, 자기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마침내 예루살렘에 가서 그 헌금을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의 기도지원을 받아 로마 선교를 감당하고자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울의 물질관, 헌금관을 배울 수 있습니다. 또한 물질을 맡아 관리하는 사람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바울은 물질 관리를 투명하고, 분명하고, 철저하게 했으며, 어느 누구도 흠을 잡을 수 없도록 만전을 기했습니다.

이 외에도 고린도 후서를 통해서 바울의 도전정신과 개척 정신, 그리고 투철한 복음전파의 열정과 살아 있는 믿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 모두가 고린도 후서를 통해서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감당하는 바울의 실제적인 믿음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   배경

  고린도 후서를 공부하기 전에 고린도 도시와 고린도 교회, 그리고 고린 도 후서를 쓰게 된 배경을 살펴 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고린도라는 도시

고린도는 로마의 행정구역이자 마케도니아의 남부 지방인 아가야 지방의 수도였습니다. 예로부터 고린도는 "희랍 모든 영토의 빛"이라 하여 그 번영을 자랑하였으나, B.C. 146년 로마 장군 뭄미우스(Mummius)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그 후 약 100년 간 고린도는 황량한 도시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BC 46년 줄리어스 씨저가 고린도를 로마의 식민지로 재건하였고, 그후로부터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는 아가야 지방의 수도로 정해졌습니다. 고린도는 지리적으로 이오니 아해와 에게해 사이의 폭이 4마일밖에 안 되는 지협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무역이 발달했습니다. 고린도를 경유하여 이탈리아와 소아시아 간의 화물을 운반하는 선주들은 그리스도 남단의 위험한 항해를 피하여 고린도를 통해서 무역을 했습니다.

서쪽 이탈리아에서 오는 배들은 고린도 만에 있는 레기엄 항구에 짐을 풀고, 육로로 지협을 건너 동쪽 겐그레아 항구로 화물들을 보내어, 거기서 대기하고 있던 다른 배에 다시 실어 에베소와 아시아로 보냈습니다. 동방 소아시아에서 가는 배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스 남단 주위를 도는 해로는 시일이 많이 걸리고 물결이 거칠어 항해가 위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좌우편 바닷가에는 두 개의 좋은 항구가 있어서 동서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또 세계 각국에서 장사군들이 모여들어 국제적인 도시가 되었습니다. 고린도 거주민은 혼합인종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직업의 분포도 유동적인 인구인 선원과 상인들이 많았습니다. 당시 고린도 인구는 약 60만이 되었으며, 그 중에 20만이 자유민이었고, 40 만의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고린도는 상업의 도시라 사람들의 재리에 밝고 이기심도 강했습니다.

 한편 고린도에는 예술과 과학의 연구가 성행했습니다. 고린도에는 언어 연구 실과 철학 학교들 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옛 희랍인의 자랑이던 예술적 교양은 사라지고, 천박한 지식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고린도에 는 올림픽 경기에 버금가는 이스드머스 경기가 2년에 한번씩 개최되었습니다. 고린도는 희랍(그리스) 도시들 중에 제일 처음으로 로마 검술 경기를 시작한 곳입니다. 또 고린도는 많은 우상 신들과 우상숭배가 성행했습니다. 특히 애굽의 알렉산드리아 로부터 선원들의 왕래가 심해서인지, 애굽의 갖가지 우상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유대교는 고린도에 있던 동방 종교들 가운데 한 종교였으며 유대인의 회당은 바울이 처음 고린도에 당도했을 때 복음을 전한 장소가 되기도 했습니다( 18:1-4).

무엇보다 고린도는 향락과 방탕의 도시로 유명합니다. 고린도 성 앞에는 600미터 가량 솟은 돌산이 있었는데 그 위 에는 아프로디테 신당이 있었고, 그곳에는 천명의 여사제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밤마다 고린도 거리를 휩쓸며 매음을 일삼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에서 로마서를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1:21-32에 온갖 부도덕, 불경건 등 입에 담기조차 힘든 죄악들을 열거했습니다. 아마도 이 모두가 바울이 고린도에서 목격한 타락과 방탕의 모습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고린도인들은 낮에는 상업에 종사하고 밤에는 유명한 아고라(Agora) 시장 뒷골목에서 주색에 빠져 들었습니다.

고고학자들의 발굴에 의하면, 당시 고린도에는 대형 나이트 클럽 같은 곳이 33곳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인같이 행동한다는 말은 '간음을 범한다'라는 뜻이 되었습니다. 어떤 작가는 고린도를 '선원의 낙원' '주정뱅이의 천국' '정숙한 여인의 지옥' 등으로 묘사했습니다.

. 고린도 교회에 관하여

고린도 교회는 AD 50년경,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때 가장 힘써 개척한 교회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개척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18:1-18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아덴에서 냉대를 받고 무거운 마음으로 고린도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났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심고 동역자로 삼았습니다. 그 후 마게도니아에 머물던 실라와 디모데가 합 류하자 힘을 얻어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18:5).

바울은 처음에는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맹렬한 반대를 받게 되자 회당 옆에 있는 유스도의 집으로 옮겼습니다(고전 1:14, 16:23). 이에 회당장 그리스보를 비롯하여 수다한 사람들이 믿고 침례를 받음으로써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18:6-8).

당시 바울은 대적 하는 자들로 인해 심히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밤에 주께서 환상 중에 나 타나 바울을 위로하시고, 승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셨습니다 ( 18:9, 10). 그 후 바울은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일 년 반 동안 고린도에 머물며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대부분 이방인들이었고, 귀족이나 부유한 사람들도 좀 있었지만 대부분 사회적으로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었습니다(1:26-28).

그래도 스데바나의 집( 18:15, 고전 1:16), 집주인 가이오( 16:23), 회당장 그리스보와 그 가족( 18:8, 고전 1:14) 같은 유력한 인사들도 있었습니다. 바울의 전도를 어찌하든지 막으려고 하던 유대인들은 그 때 새로 부임한 총독 갈리오에게 바울이 율법을 어기고, 전도한다고 하고 고소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종교에 관심이 없는 갈리오는 "너희 율법 문제는 너희끼리 해결하라"하여 그 고소를 기각시켜 버렸습니다( 18:12-17). 결국 바울은 심히 연약한 가운데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고린도 교회를 성공적으로 개척하였습니다.

1년 반 동안의 고린도 개척을 마친 바울은 아굴라 부부와 함께 에베소로 건너갔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떠난 후 고린도 교회에는 많은 문제 생겼습니다. 교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세상 죄악에 물들게 되었습니다. 음란하고 부도덕한 세속주의의 누룩이 급속도로 교회에 파고들 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안에 분쟁이 일어났습니다(1:11). 부도덕한 자가 나타나 불륜의 죄를 짓고, 정욕의 누룩을 퍼뜨렸습니다(5:1). 신자 간의 소송 사건이 터졌습니다(6:1), 음행하는 자도 생겼습니다(6:12). 바울은 디모데를 고린도에 보내어 고린도 교회를 말씀 위에 굳게 세우고자 했습니다(고전 4:17).

그런데 디모데의 도착이 늦어지자 고린도전서를 써 보 냈습니다. 바울은 편지를 통해서 고린도 교회에 일어난 여러 가지 문제들, 곧 당파 싸움, 불륜의 사건, 소송 사건, 음행 등에 대해서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이 질문해 온 결혼문제(7:1), 처녀의 결혼 문 제(7:25), 제물을 먹는 문제(8:1), 집회 때 여자들이 나서는 문제 (11:2-16), 성만찬 때의 불경건 문제(11:18), 은사에 관한 문제(12:), 부 활을 부인하는 문제(15:12), 연보 문제 (16:1), 아볼로의 문제(16:12) 등에 대해서 성경적인 해답을 써 함께 보냈습니다. 이처럼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떠난 후 세속주의에 물들게 되었고, 인본주의자들과 율법주의자들의 악영향으로 혼란스럽게 되기도 했습니다.

. 고린도 후서를 쓰게 된 이유

바울이 고린도 전서를 써 보낸 후, 잠시 문제들이 수습되는 듯했으나 다시 어려운 문제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특히 예루살렘에서 건너 온 거짓 교사들이 공공연히 바울을 비방하고, 바울이 전해준 복음에 대한 불신을 심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거짓 교사들에게 미혹을 받아서 바울에 대한 불신이 깊어졌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큰 영적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급히 고린도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수습되지 않고, 오히려 불신만 깊어졌습니다.

그후 바울은 에베소로 돌아와 다시 눈물 어린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고후 2:4). 이 편지도 현재 남아 있지는 않습니다. 그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불신과 거짓 교사들의 미혹에 넘어 간 신자들을 돕고자 그의 신실한 동역자 디도를 파송했습니다.

디도가 고린도 교회의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는 대로 아시아로 돌아와 소아시아 서부에 있는 항구도시 드로아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에베소 개척 역사를 마무리하고 드로아를 개척하고자 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디도가 돌아올 즈음에는 바울이 드로아에 있을 예정이었습 니다. 그런데 은장색 데메드리오의 소란으로 인해 바울은 더 이상 에베소에 머물지 못하고, 예정 보다 빨리 에베소를 떠나게 드로아로 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드로아에 전도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정했던 시간이 지나도 디 도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염려 되어서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디도를 하루라도 속히 만나기 위해서 마게도니아로 건너갔습니다(2:12-13). 바울은 그곳에서 고린도에 서 돌아온 디도를 만났습니다. 디도는 고린도 교인들이 그들의 죄를 회개 하고, 바울을 다시금 사모하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7:6-16). 바울은 너무나 기뻤습니다. 바울은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가운 데 고린도 후서를 써 보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바울을 불안하게 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거짓 교사들에 관한 소식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거짓교사들은 바울 의 사도적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거짓 복음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혼란케 하고 있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바울은 이랬다 저랬다 하며 약속을 지키지 않는 불성실한 사람이라고 비난했습니다(1:15-17). 또 그들은 바 울은 추천서가 없으므로 사도의 자격이 없으며, 바울이 전한 복음도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고 악선전을 하였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거두는 구제헌금도 교묘한 방법으로 돈을 착복하려 한다고 모함하였 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말에 미혹되기 쉬운 교인들을 생각하며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자신이 사도인 증거를 제시하고,거 짓 교사들의 문제점과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밝혀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전 편지를 통해서 거짓 교사들 이 퍼뜨린 거짓말들을 반박하고, 자신이 왜 그리스도의 사도인가를 변증 하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지만 '사단의 일꾼'에 불과함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곧 고린도교회를 방문할 것과, 방문해서 거짓 교사들과 회개치 않는 범죄자들을 엄히 징계할 것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 고린도후서를 쓴 장소와 시기

3차 전도여행 중에 있던 바울은 A.D.55년 오순절 때까지 에베소에 머 물며 고린도 전서를 쓴 후 에베소를 떠나 드로아를 거쳐 마게도냐로 들어 갔습니다(고전 16;5-8;고후 2:12,13). 바울은 마게도냐에 머물면서 본 서신을 써 보냈습니다(참조. 2:13; 7:5; 8:1). 그러므로 이 서신을 기록한 때는 고린도 전서를 기록한 후 늦어도 1년 이내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때가 AD 55년 봄 유월절 이전이므로, 이 서신은 55년 가을이나 이듬해인 56년 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091421 안익선 목사 /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