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상하

사무엘하 10장 강해(은총을 모독한 암만 왕 하눈)

호걸영웅 2021. 11. 19. 07:18

사무엘하 10장 강해(은총을 모독한 암만 왕 하눈)  

 

서론)

사무엘하 9장에서 다윗은 요나단과의 언약을 따라 그 자손에게 은총을 베풀기 위하여 사울의 집에 남은 자를 찾았습니다.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살아 남았는데 양 발을 다 저는 므비보셋입 니다.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기업과 신분을 회복케 해 주는 은총을 베풉니다. 그리고 10장에선 암만왕 하눈에게도 은총을 베풀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다윗이 암몬 자손의 왕 나하스의 죽음 소식을 듣고 그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기 위하여 사절단을 보냅니다. 사울 때에는 암몬과 전투가 있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었던 때는 암몬도 다윗에게 복속이 되었지만 왕권을 상당부분 보존해 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눈은 이러한 다윗의 은총을 모독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 안에 있는 자와 언약 밖에 있는 자의 모습으로 비교됩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면 날 때부터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 은총, 자비, 긍휼들을 한량없는 감사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런데 언약 밖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일방적은 은혜를 모독하는 모습을 드러냅니다. 

 

본론)

)사절단을 모욕한 하눈(10:1~5)

다윗의 사절단을 맞이한 하눈의 신하들은 다윗의 사절단을 자기들을 공격하기 위한 정탐꾼으로 오해하고 왜곡하여 억울한 스파이 누명을 씌웠습니다. 그러자 귀가 얇은 하눈이 다윗의 신하들을 잡아서 수염을 깎아 버리고 의복의 중동볼기까지 잘랐습니다.

 

이것은 유대인 남자들에겐 죽음만큼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율법에서 유대인들은 수염을 깍지 못하게 합니다(19:27, 21:5). 수염은 남자다움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극한 분노와 슬픔을 표할 때는 수염을 잡아 뜯거나 깎기도 합니다(9:3, 41:5). 그리고 제사장 외에는 고대의 유대인들은 속옷을 입지 않는다고 합니다. 겉옷을 잘라서 엉덩이 절반 이상이 드러나 도록 잘라버렸으니왕 앞에 서는 일이 부끄러워 예루살렘에 들어오지도 못할 지경입니다. 그래서 여리고에서 왕에게 그런 소식을 전합니다. 왕은 황당해 하며 사절단에게 수염이 자라도록 기다렸다가 궁으로 돌아오라 합니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은 약 43.2 킬로미터 정도 거립인데 걸어서 7시간이 걸리는 거리입니다. 왕의 사절단을 모독한 것은 곧 전쟁의 선포와 다름이 없습니다. 

 

)용병을 고용한 아몬 왕 하눈(6~14)

구 후, 암몬 자손들이 다윗을 분노케 했음을 알고는 미리 겁을 먹고 아람(시리아)에 용병 삼만 삼천을 고용합니다. 반항의 조짐을 알아 챈 다윗은 요압과 군대를 보냅니다. 그런데 암몬과 아람의 용병이 이스라엘의 군대를 앞뒤로 포위하여 공격해 옵니다. 요압이 이스라엘 군대 중에서 선발한 자 중에서 또 선발하여 요압이 거느리고 용병을 치려고 나가면서 나머지 군대는 아비새에게 맡겨 암몬의 군대를 치게 합니다.

 

12절에서 요압의 신앙적인 자세를 보게 됩니다. 아비새를 격려하면서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 하자고 합니다. 그 승패의 주권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요압이 이러한 믿음으로 아람의 군대를 대항하여 나아가니 그들이 도망을 갑니다. 이 모습을 보고 암몬 자손들도 아비새 앞에서 도망하여 그들의 성읍으로 들어갑니다. 

 

)하닷에셀의 실패하는 저항(15~19)

. 아람 사람이 이스라엘에서 패한 것을 보고 하닷에셀을 중심으로 다시 아람의 군대를 다시 더 모읍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윗이 직접 참전하여 적을 죽인 숫자가 병거 칠백 대와 마병 사만명과 군대 장관 소박을 죽입니다. 다른 보병과 도망간 자들은 계수를 하지 않습니다. 병거 칠백 대와 마병 사만을 죽인 것은 엄청난 대승입니다. 이로 인하여 하닷에셀에게 속했던 왕들이 다윗과 화친하고 다시는 암몬(오늘날의 요르단 지역) 사람들을 돕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려 했던 다윗을 모독한 암몬을 돕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승리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 모든 인생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야만 삽니다. 그런데 그런 은총을 거부하는 것이 죄와 불행의 씨앗이 된다는 사실을 직시하여야 합니다. 

신명기 20장에서 그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신명기 20:10~18절입니다.10 네가 어떤 성읍으로 나아가서 치려 할 때에는 그 성읍에 먼저 화평을 선언하라 11 그 성읍이 만일 화평하기로 회답하고 너를 향하여 성문을 열거든 그 모든 주민들에게 네게 조공을 바치고 너를 섬기게 할 것이요 12 만일 너와 화평하기를 거부하고 너를 대적하여 싸우려 하거든 너는 그 성읍을 에워쌀 것이며 1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네 손에 넘기시거든 너는 칼날로 그 안의 남자를 다 쳐죽이고 14 너는 오직 여자들과 유아들과 가축들과 성읍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을 너를 위하여 탈취물로 삼을 것이며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적군에게서 빼앗은 것을 먹을지니라 15 네가 네게서 멀리 떠난 성읍들 곧 이 민족들에게 속하지 아니한 성읍들에게는 이같이 행하려니와” 

 

이 말씀은 진멸해야 할 가나안 일곱 족속 외에 다른 지역과의 전쟁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말씀합니다. 암몬은 진멸의 대상은 아니였습니다. 그래서 먼저 평화를 선언했는데 받지 않았기에 전쟁을 한 것입니다.

이 원리가 복음을 전하는 원리이기도 합니다. 복음을 들고 가는 자들이 먼저 평화를 전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보게 됩니다. 

 

)복음과 관련한 적용

요한복음 3:16~21절입니다.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했습니다.

 

우리는 대개 요한복음 3:16절만 가지고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적어도 한 단락은 함께 보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을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17절에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정죄)하려 하심이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도 그를 믿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지만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정죄)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정죄(죄목)가 무엇인가 하면 빛이 세상에 왔는데 사람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한 것입니다. 이 어두움을 사랑했다는 이 악한 행위는 세상의 윤리 도덕적인 그런 악한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원래 악한 행위임을 어느 누구나 가 다 아는 일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악한 행위란 율법적인 자기 의라는 행위입니다. 이것이 어두움의 일입니다. 이들은 결코 예수님에게 나아와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심판의 죄목이요 근거입니다.

 

은혜, 혹은 은총을 받으려면 겸손하고 솔직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언약 안에 있는 백성이 라면,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러한 간구가 나와야 합니다. 자기들의 의로 무장한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 되는 현장을 두 곳에서 살펴볼 때, 동일한 상반된 경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3:13~15절입니다. 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이 말씀은 베드로가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고쳐주었을 때에 사람들이 베드로를 주목하여 볼 때에 전한 내용입니다. 너희가 예수를 부인하고 생명의 주를 죽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예수의 이름이 이 사람을 낫게 하였다 라고 증거 합니다. 

 

사도행전 13:44~52절입니다.44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45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거늘 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47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49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50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51 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고 헸습니다.

 

이 부분은 오늘날 터어키 지역인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과 그 추종자들이 복음을 증거한 때의 상황과 결과에 대한 증언입니다. 비시디아는 터어키 지역 중부 고원지대에 위치한 도시로서 바울이 회심 후, 맨 처음 갔던 1차 전도 여행 때에 갔던 매우 중요한 선교 지역 중 하나입니다.  반면 수리아 지방에도 안디옥이 있었는데, 그곳은 터어키 동남부 끝자락에 있으며 시리아 지역이나 이스라엘 지역과 꽤 가깝습니다.

 

결론)

결국 구원 받음이란, 혹은 복음의 영접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과 자비를 일방적으로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거절한 자들(유대인들을 위시하여)은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는 자로 자처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증거 되었는데 누구만 믿게 되는가 하면, 영생 얻기로 작정된 자만 믿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영생 얻기로 작정 된 자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복음을 전할 때, 므비보셋과 같은 반응을 보이는 자들입니다. 영생 얻기로 작정되지 않은 자는 하눈처럼 은총을 모독하는 행위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심판의 기준은 매우 단순하지만 강력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10:28~29절입니다.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 은혜로 받아야 합니다. 거절하면 심판이 임합니다. 무엇이 인생의 지혜입니까? 은혜를 은혜로 깨닫는 것입니다.

  

 111121 안익선 목사 / 참고: 이장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