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의 신비들(마 1:16-23)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17]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서론)
1989년 경?, 성탄절 전에, 독일 남부 뮌헨에서 웃지 못할 사건(해프닝?)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독일 남부 뮌헨에서는 대강절(성탄절을 기다리는 4 주간의 기간)이 되면 시청 앞에 첫 성탄 모습을 재현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배경으로 한 인형이나 장식물 등을 벌여 놓는데 이를 ‘오픈 세트’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게 중세 때부터라고 하니 수백 년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픈 세트를 만든지 이틀 만에 누군가가 아기 예수님 인형?을 훔쳐간 것입니다. 뮌헨과 그 시가 속한 바이에른 주가 난리가 났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울며 예수님 돌려 달라고 하고, 시장도 대중매체를 통해 방송에 나와, 제발 아기 예수님 돌려달라고 간절히 요청하는 방송을 하고, 주지사도 아기 예수를 훔쳐 간 사람을 처벌하지 않을테니 제발 아기 예수님만 돌려 달라고 특별담화까지 발표했습니다.
다행히도 성탄 전야(이브)에 아기 예수님 인형이 무사히 돌아왔 습니다. 훔쳐간 사람이 누군였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시청 근처 건물 옥상에 아기 예수님 인형을 갖다 놓고는 전화를 해서 가져가라고 하여 되찾아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사건을 통해 뮌헨 시민들이 깨달은 게 있습니다. 아무리 성탄절을 화려하게 준비했다 하더라도…… 주인공이신 주님이 없으면 그게 다 무의미하다는 사실입니다. 반면에 아무리 환경이 열악하더 라도 성탄하신 주님만 모시면 그곳이 가장 아름답고 복된 처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첫 성탄을 회상해 보십시오. 불쾌한 냄새가 나고 거칠고 추웠던 외양간이 성탄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님이 탄생하시자 그 외양간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차고, 천군천사가 나팔을 불고, 별이 비치고, 목자가 달려오고, 동방박사가 달려와서 아기 예수께 예물을 드렸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초라하고 남루했던 외양간이 졸지에 세상에서 가장 성스럽고 밝고 아름다운 성지가 된 것입니다.
마찬가집니다. 우리도 내 안에 거룩하게 탄생하신 예수님을 모시면, 그 어둡던 마음이 당장에 밝아지고, 누추하던 내 심령이 그 시간 이후로 거룩해집니다. 예수로 인해 죄사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메마르고 그늘지고 삭막했던 내 가정도 하나님의 영광으로 풍성해 집니다. 부디 오늘 성탄하신 예수님을 여러분 심령과 여러분 가정에 모시셨길 바랍니다. 그래서 성탄의 밝은 빛이 여러분과 온 누리에 가득하길 빕니다. 그러면 성탄과 관련된 비밀(신비)을 몇 가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론)
가)족보의 신비
우선 족보입니다. 본문 17절입니다.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주님의 족보를 열네 대 단위로 묶어놨습니다. 왜 주님의 족보를 열네 대 단위로 편집했었을까요? 성경이 말씀하는 완전수가 7입니다. 그 완전수 7이 두 번이나 겹쳐 14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더 완전하겠습니까? 14가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14대가 3번입니다.
다른 나라는 어떠 한지 잘 모르겠으나……한국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삼세판을 좋아합니다. 유대인도 삼세판을 좋아하는 듯 합니다. 우리는 승부를 가를 때 항상 삼세판으로 합니다. 한 번은 아쉽고, 두 번은 뭔가 억울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세 번은 해야 확실하고 미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 번을 해야 그 결과에 승복합니다. 가위 바위 보를 해도? 또는 윷놀이를 해도 항상 삼세판은 해야 합니다. 유대인들도 그랬습니다. 에수님의 성탄에도 삼세판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럭키 7이 두 번 겹치고 그게 다시 삼세판을 거듭합니다. 역사상 가장 완전하고도 완벽한 시점에 에수님이 탄생하신 것입니다. 3이란 숫자느 안정, 고정, 확정의 의미입니다. 하나님도 3위 일체십니다.
누가복음 3장에도 예수님의 족보가 나오는데, 23절 이하 38절까지를 세어보면 총 77대입니다. 77대라는 것도 완전수 7이 횡으로 두 번 나란히 배치되었습니다. 더 없이 완전한 시점에 주님이 성탄하셨다는 뜻입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날,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성탄이 성사되었다는 것입니다.
나)성탄의 현장의 신비
다음은 성탄 현장입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거기는 다윗의 동네입니다.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고향이고, 다윗 왕도 거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베들레헴은 다윗 후손의 집성촌입니다. 다윗 가문의 원적지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그 다윗 가문의 후손이었기에 호적령이 내리자 만삭이 된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까지 갔다가 거기서 출산하게 된 겁니다.
실은 이것도 우연이나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의한 필연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연출하신 완전한 구속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주님은 반드시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셔야 했습니다.
이미 700년 전에 미가(Micah) 선지자가 그렇게 예언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태초)에 있느니라”(미 5:2). 베들레헴의 히브리어로 집이란 뜻의 <벧>과 떡이라는 <레헴>의 합성어입니다. 떡집입니다. 그런데 에수님이 자신을 생명의 떡(혹은 빵)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시기에 당연히 떡집인 베들레헴에서 성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동네 이름은 떡집이지만,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시되 따뜻한 안방이나 여관이 아닌 외양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성화에 나오는 외양간은 평화롭고 따뜻하고 목가적(낭만적)입니다만, 현실적으로 외양간은 어둡고 춥고 퀴퀴한 동물들의 변?도 냄새나고 더럽기 그지없는 공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탄생하셔서 그런 가축들의 처소에서 가축들의 여물통인 구유를 요람 삼아 눕힘을 당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중 아무리 가난한 시대에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었다 해도 외양간에서 태어난 사람은 없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낮고 천한 자리에서 탄생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 조차도 절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막 산통이 급히 오니까 외양간에 뛰어 들어가 출산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은 그것도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의 외양간 탄생이 왜 구속사적 사건이 될까요? 침례 요한이 예수님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셨습니다. 이것이 에수님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입니다. 에수님은 우리를 위한 희생 양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린 양이 태어날 곳이 어디 입니까? 안방입니까? 왕궁입니까? 외양간입니다. 예수님의 외양간 성탄도 본의 아닌 게 아니라 제대로 오신 것입니다. 희생양의 정체성에 맞게 오신 것이죠. 한마디로 예수님은 완벽한 출생 목적에 맞는 처소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나아가서 외양간에서 희생양의 운명으로 탄생하심으로써 이미 그 성탄 자체에서 당신의 죽음까지도 계시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희생양으로 온 예수는 앞으로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에서 대속의 십자가 까지 다 볼 수 있어야 주님의 성탄을 제대로 해석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예수의 외양간 탄생이 뜻하는 구속사적(구원을 위한 역사적) 메시지가 얼마나 신비하고 놀라운지요!
다)아기로 나심의 신비
다음은 예수님이 성탄하신 모습입니다. 누가복음 2장 12절입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징표)이니라 하더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강보에 싸인 아기로 오셨습니다. 왜 주님이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을까요? 어차피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의 자연관계로 오신 게 아니라 성령을 통해 기적적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까? 최초의 인간 아담을 보십시오. 아담은 몇 살짜리로 태어났습니까? 아담이 1살로 태어났습니까? 아닙니다. 아담은 처음부터 청년으로 태어났습니다. 창조된 즉시 에덴동산을 관리하고, 하와를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적어도 20대 청년은 되었을 것입니다. 아담은 처음부터 20대 청년으로 태어난 듯합니다.
하나님이 처음 태양계나 지구를 창조하셨을 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1살짜리 우주를 창조하셨는지, 수십억, 수백억 살의 우주를 창조하셨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과학자들은 지구의 나이를 고학적으로 연구하여 45억년 전 지구가 만들어졌다-라고 합니다. 성경은 지구의 나이를 7천년 정도로 봅니다. 그런데 지구를 만들던 재료가 45억전 전에 이미 준비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과학적 현재의 결론이 곧 진리는 아닙니다. 과학적 정답일 수는 있어도 반드시 사실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이런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예술가가 도자기를 만들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예술가가 만든 도자기의 흙은 어떤 것을 사용하겠습니까? 최소한 수천년 전에 만들어진 흙입니다. 자 그러면 그가 만든 도자기는 수천년 전에 만든 것이 될까요? 아닙니다. 수십년 전이거나 수백년 전일 것입니다. 재료와 예술품의 제작은 수천년의 차이가 있는거죠. 고로 재료만으로 년대를 확증할 순 없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이 원하시면 언제나 상식과 자연 법칙을 뛰어넘어, 초자연적 이적을 행하셔서 처음부터 갓난아기가 아니라 30대 혹은 40대 나이의 메시아를 우리에게 천사를 보내듯 보내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면 얘수의 태생이 굳이 왜 갓난아기입니까?
우리의 진정한 상담자와 구주가 되게 하시려고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삶의 애환을 실제 겪어보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우리를 알고, 우리를 보듬는 메시아가 되게 하기 위한 섭리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보다 우리 기도를 잘 알고 공감하십니다. 우리 아픔, 고독도 다 아십니다. 아기로 태어나서 33년을 사시며 친히 겪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영원한 구주요, 우리의 친구요, 우리의 상담자요, 유일한 메시아이실 수 있었습니다.
라)별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별을 움직이시기까지 성탄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연인들끼리 사랑을 속삭이며 자기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하늘에서 별을 따다 주겠다”는 허무맹랑한 약속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말이 그렇지 하늘에서 별을 어떻게 따며 어떻게 그 별을 운반하고 움직이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증거하시고자 하늘의 환히 빛나는 별도 움직이신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동방박사들이 예수를 경배코자 별을 보고 따라 왔으돼 베들레헴까지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예수가 하찮은 신분이면 별까지 움직이셨겠습니까? 온 인류의 진정한 구세주요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이죠. 마2: 1~12절을 봅니다.
5.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
결론)
사실 예수님의 성탄이 얼마나 신비하고 놀랍고 복된 사건의 연속입니까? 구약의 말씀이 성취된 것은 창세기부터 미가서 5:22절까지…수도 없이 많습니다. 동정녀 탄생도 얼마나 놀라운 신비인지!
그런 신비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계신 것과 사신 것과 약속을 지키심과 일하심을 발견하고 꼭 믿어라-라는 메시지 입니다. 부디 사랑 많으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이러한 성탄의 이 신비와 비밀을 깊이 묵상하고 믿으셔서 성탄의 축복을 더욱 많이 발견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121421 안익선 목사/ 참조:푸른 교회 & 조성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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