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모음(Korean sermons)

임마누엘의 징조와 위로(이사야7:10~16)

호걸영웅 2021. 12. 19. 08:47
임마누엘의 징조와 위로(이사야7:10~16)
 
 
 

 서론)

1. 오늘 말씀은 좀 딱딱하고 질긴 말씀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음식에 비유하면 부드러운 상추쌈이나 두부 같은 음식이 아니라, 좀 질긴 소고기 육포나 기름기 없는 칠면조 다릿 고기 같은 말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도 귀한 양분이 많고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선포된 당시 유대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다면 그래도 좀 이해가 쉬운데, 2,700년이 지난 지금, 이 말씀을 듣는 우리에겐 도대체 무슨 뜻의 말씀인지 알 수 없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래도 언뜻 많이 들어 본 말씀은 14절의 말씀입니다. ,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라는 말씀입니다.

 

2. 이 말씀이 주어진 배경은 이렇습니다. 유대왕 12대 왕 아하스 때에 이 말씀이 주어졌습니 다.  본문 초반에 보면 전쟁의 두려움에 떠는 아하스 왕과 유대인들이 나옵니다. 아하스 왕은 유대 나라의 왕 중에 가장 끔찍하게 우상을 숭배한 악하고 악한 왕입니다. 얼마나 우상을 열심 히 섬겼느냐하면 앗수르 신전의 설계도를 얻어 다가 앗수르의 우상을 섬기고자 제단을 성대 하게 예루살렘에 만들고, 하나님 성전의 문은 대못질을 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악랄하게 아예 금지시킨 왕입니다.  그리고 앗수르 신에게 자기 아들을 산 채로 제물로 드린 왕이었습니 다. 그의 하나님은 오히려 앗수르였습니다. ? 그 당시 앗수르는 매우 강성했습니다. 떠오른 슈퍼스타 같이 힘이 강력했고 여러 나라들을 정복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북 이스라엘(혹은 에브라임)과 아람나라가 연합하여 남 유다를 침공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회초리였습니다. 그러자 남 유다는 앗수르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아람은 앗수르와 같은 북쪽의 나라였지만 북서쪽에 가까이 있는 나라고, 앗수르는 북동쪽, 즉 바벨론의 북서부에 있는 나라였습니다. 이 말씀이 주어진 당시는 이미 북 이스라엘과 아람 나라가 예루살렘을 제외한 대부분의  남 유다를 다 잡아 먹었고 남유다 군의 포로는 20만명이나 잡혀 갔었습니다. 소망이 끊어질 지경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2 절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1.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의 아하스 왕 때에 아람 르신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1. 어떤 사람이 다윗의 집에 알려 이르되 아람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라고 했습니다.

 

아하스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라고 했지요? 두려움에 가득 차 어쩔 줄 모르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그 말씀은 소망의 말씀이었어요. 3~7절 말씀입니다.

3.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기혼샘)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에 나가서 아하를 만나
  1.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2. 아람 에브라임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악한 꾀로 너를 대적하여 이르기를
 

 

  6. 우리가 올라가 유다를 쳐서 그것을 쓰러뜨리고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무너뜨리고 다브엘의 아들을 그 중에 세워 왕으로 삼자 하였으나
7.주 여호와의 말씀이 그 일은 서지 못하며 이루어지지 못하리라-하십니다.

 

그리고 또 다른 위안을 주시기 위해 징조를 맘대로 구하라 하십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이미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하나님의 징조를 더 주심에 대해 거절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강제로 떠 먹이듯 징조를 주십니다. 그것이 사 714절 말씀이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라는 말씀입니다. 이제부터는 이 말씀들이 주시는 의미들을 좀 더 세밀하게 꼭꼭 씹어 먹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론)

가) 다윗의 왕조와 한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 이 본문 상황이 의미하는 더 근본적인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다윗왕 간에 맺어진 약속입니다. 다윗 왕조가 시작했을 때, 하나님은 다윗의 왕가가 영원히 굳게 서고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 다윗 왕조를 통해 온 인류의 구원자인 메시아를 보내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고로 하나님께서는 당시에 유대 왕 중에 가장 악하고 못된 아하스가 이뻐서가 아니라 더 큰 무리였던 다윗 왕조와 그 전체 가문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준수하셨다고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지 못하고 수시로 죄와 의심으로 흔들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살도록 성령님의 도우심과 말씀을 통해 우릴 붙잡아 주시고 세월 주시고 격려해 주십니다. 늘 새로운 기회를 주십니다. 실패를 통해 깨닫게 해 주십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믿되 굳게 믿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하스의 죄악을 책망하기 위해서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를 보내서 유다 왕 아하스를 쳤습니다. 아하스는 이들과 싸워서 예루살렘만 간신히 지켜 냈습니다. 그리고 피해가 엄청났습니다. 이스라엘은 유다인 12만 명을 죽이고, 이십 만 명을 포로로 잡혀갔습 니다. 왕자와 궁내대신과 총리대신이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들이 징벌 당한 것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채찍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재 침공을 준비한다는 소문이 또 들렸습니다. 예루살렘을 다시 공략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아하스 왕과 백성들은 사시나무 떨듯이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들은 과거 전쟁의 악몽이 되살아났습니다.
그때.3,4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 야숩’은 윗 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두려움에 떠는 유다 백성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아들 스알야숩과 함께 아하스에게 보내셨습니다. 아하스는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 물의 근원을 찾아 다녔던 것 같습니다. 아하스는 하나님보다는 물을 더 의지했습니다. 이곳에 예루살렘의 식수를 공급하는 성 밖의 기혼 샘이 있습니다. 그 물을 성 안으로 끌어 들인 자는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 왕입니다. 아뭏든 그는 시설정비를 위해서 갔습니다. 그는 인간적인 노력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사야는 아하스 왕을 윗 못 수돗 가에서 만났습니다. 이사야는 아들 스알야숩과 함께 아하스에 게 유다에 대한 위로의 말씀을 해 준 것입니다.

이사야의 아들의 이름은 스알야숩’인데, 이는 “남은 자는 돌아오리라”는 뜻입니다. 유다는 포로로 잡혀가지만 남은 자는 돌아온다는 예언을 상징합니다. 스알야숩은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소망과 위로를 보여 주십니다. 대개의 사람의 이름엔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름을 통해서도 예언하십니다. ? 하도 믿음이 없이 살기 때문에 이름을 통해서라도 믿음을 가져라 라는 의미입니다.

곧 하나님이 유다를 징계하시는 것은 죽이고자 하심이 아니요. 사랑하여 살리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얼마 안 있다가 북 이스라엘과 아람이 망했습니다.  

아람은 이 예언이 있은 지 65년 후 망했고 북 이스라엘 왕조는 12년 후에는 앗수르의 침략으로 망했어요. 놀랍지요?

9절을 보십시오.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유다를 도와주시는 대신에 한 가지 조건을 요구하십니다.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굳게 서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하스왕에 게 딱 한 가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별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징조를 거절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인도하시고 채워주시고 공평한 대우를 해 주심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하나님의 축복은 오다가 돌아서 버립니다.

 

*1950,한국 6.25동란 때 이야기입니다. 남한은 북한의 침략으로 거의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였습니다. 부산과 대구 이남으로 좇겨난 많은 주의 종들과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에게 우리나라를 건져주시도록 간절히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유엔군이 한국 동난에 참전할 수 있도록 도우셨습니다. 유엔에서 유엔이 한국전쟁에 참여하느냐 마느냐를 결정할 회의가 열렸을 때, 반대를 하려 했던 소련 대표가 오는 도중 설사가 나서 화장실에 가느라 지각하는 바람에, 반대표가 적어져서 유엔이 한국전쟁에 참예하는 것이 통과되어, 유 엔군의 참전이 결정되었다는 사실! 그것이 너무도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였다는 것입니 다. 

낙동강 전투에서는 좋은 날씨를 주셔서 일본 오키나와에 있는 비행기가 이륙이 가능하여  북한을 공격하게 되어 전투에 유리한 고지들을 점령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하스는 앗수르를 의지하다가 많은 피해를 봅니다. 그는 앗수르를 의지하고 앗수르의 신을 의지했습니다. 앗수르에서 흙을 가져다가 앗수르와 같은 우상의 제단을 만들고 앗수르의 신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앗수르가 유다를 도와준 것은 결국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도와준 것입니다. 나중에는 유다의 수많은 보물들을 마구 빼앗아 갔습니다.

요즘에도 우리의 눈에 보이는 앗수르가 많습니다. 물질의 앗수르, 권력과 명예의 앗수르, 현대 문명과 과학의 앗수르, 쾌락의 앗수르입니다. 그것들은 약간의 도움은 될지 모르지만 전적인 도움이 되진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는 온전히 믿는 믿음이 있을 때만 도우십니다. 하나님께서도 체면이 있으시고 자존심이 있으시고 질투심이 있으십니다. 죄를 보고도 마냥 방관하시는 분이 아니십니 다. 우리가 온전한 믿음을 가져야만 하나님께서는 정확히 우리를 도우십니다.

)최고의 하나님의 위로의 징조, 임마누엘

13,14절을 다시 보십시오.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백성들에게 친히 표적을 더욱 보여주십니다. 하도 그들이 의심이 많아서 입니다. 하나님은 멸망할 것에 너무 두려워 떠는 유다 백성들을 를 구원할 메시야를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표적을 보면 믿게 되리라! 그리고 제발 좀 믿는 자들이 되어라! 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믿음을 가질 수 있는 모든 환경을 거듭 만들어 주십니다.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는 약속입니다. 

이사야 41 10절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하십니다. 대통령이 우리와 함께 해도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하물며 천지 지으신 하나님께서 저와 우리와 함께 하신다? 참으로 감당 못할 은혜요 감격이요 영광입니다. 이 예수를 영접하십시오. 이 예수를 모셔 들이시길 바랍니다.

결론)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끊임없는 전쟁이 있고 재앙과 재난이 있으며 어려운 경제적 문제, 인간 관계의 문제들이 밀려오고 있습니다. 사단의 공격도 쉬지 아니하고 밀려 오고 있습니다. 우리 는 이런 때에 두려워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우리에겐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계십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는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죄를 이기셨습니다. 유혹을 이기셨습니 다.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그분이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미의 말씀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들리며 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굳게 믿지 않아서 입니다. 성탄절이 가깝습니다. 여러분 모두의 믿음을 더욱 굳세게 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승리하시길! 예수, 곧 이기신 자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120721 안익선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