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6장 강해(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한 당부)

호걸영웅 2022. 2. 20. 02:06

갈라디아서 6장 강해(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한 당부)

 

서론)

갈라디아서 마지막 장, 마지막 부분입니다. 4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본문 1~5절엔 초반에는 1)서로 짐을 지라는 당부의 말씀을 주었습니다. 2) 6:6-10에선 심은 대로 거두리라 고로 성령과 사랑으로 심으라 하십니다. 3) 6:11-15 에선 할례의 진정한 의미와 동기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4)16~18절은 예수의 흔적을 통한 설득의 말씀이 있고, 아울러  마무리 당부의 인사로 서신을 마치게 됩니다.

 

본론)

)서로가 서로의 짐을 져야 한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많은 이웃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죠. 혼자 사는 사람도 없고 혼자 살수도 없죠.
우리가 다같이 이렇게 사는 이 공동체 혹은 교회 공동체 속에서 우리가 문제를 만납니다.  첫째는 모두가 다 같지 않다는 것. 얼굴이 다르듯이 생각이 다르다는 것, 이 다양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나와 같지 않을까? 왜 나를 이해 못할까? 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어떤 사람은 말이 많은 것을 좋아해요. 어떤 사람은 말하는 것은 질색이예요. 취미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배경도 다르고 세계관도 다르단 말이죠. 이 다르다는 것을 우리가 이해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는 영적으로 보아도 나이가 달라요. 조금 미숙한 사람이 있고 지금 조금 높은 수준에 있는 사람이 있고, 이렇게 수준이 달라요.

 

오늘 본문에 보니까 "너희 신령한 사람들은" 이라고 했어요. 이는 성령을 경험한 사람들을 의미하죠. 우리는 다같이 예수를 믿고 중생해서 거기서부터 출발해서 주님 앞에 갈 때까지 성화의 길을 가는 것이죠. 이 중생은 단회적(일회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이 성화는 일생동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조금 앞서 나간 이가 있고 아직 뒤에 서는 사람이 있단 말이죠. 그런데 그럴 경우 앞에 나간 사람이 뒤에 선 사람을 보면 유치해 못 보겠거든요. 어떤 때는 저게 예수 믿는 사람인가? 안 믿는 사람인가? 뭐 저럴 수가 있나! 하지요. 그러나 사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고 다만 미숙한 것뿐이지요. 그걸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이런 관계는 마치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자의 손을 잡고 길거리에 나선 것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나이가 좀 더 든 사람이 어린아이를 손목을 잡아 주거나 돌아봐야지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긍휼히 여겨야죠? 먼저 배운 자가 잘못된 초보자의 잘못을 교정해 주어야죠? 미숙한 사람의 잘못을 미워하고 꾸짖고 책망하고 그것 만이 능사가 아니지요. 이것을 말하는 것이죠.
오늘 본문은 그래서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이라고 했어요.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가", 영적으로 수준이 좀더 높은 너희가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특별서 "형제들아"라고 의미는?. 형제=깊은 관계, 그런 사랑의 관계를 얘기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저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요 저의 슬픔이 내 슬픔이요 저가 실수한 것은 내가 실수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내 몸에, 내 인격에 그것이 감지되고 아프게 느껴야 됩니다.

 

또 특별히 여기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의 경우를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의 범죄-라는 단어를 보면 파라부토타티라고 했어요. 이 말의 뜻은 뭐냐하면 '빗나갔다'는 뜻이죠. 이건 과실을 말하는 것인데, 바로 가려고 하는데, 내가 본래부터 넘어지고 싶었던 것이 아니고, 똑바로 가려고 하는데 그만 잘못 딛어서 넘어졌단 말이예요. 이 사람이 고의적으로 실수한 것이 아니에요. 거기에 악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이런 범죄함을 보거든 이 사람을 바로 잡으라 그랬어요.

 또 바로 잡으라는 말의 뜻은 원래 탈골이나 위골된 것을 제자리에 바로 잡는다는 그런 뜻입니다. 뼈가 삐었어요. 그러니 바로 잡아야 되지요. 그와 같은 것을 말합니다. 조정이지 정죄가 아닙니다. 그리고 "온유한 심령으로" 라고 했어요. 모르고 저지른 실수니 아량을 가지고 온유하고 교정해 주라는 겁니다.  

 

또 하나는 추가적으로 같은 잘못이 내게는 혹 없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했습니다. 타산지석의 마음을 가지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 말씀을 보니까 "짐을 서로 지라" 그랬어요. 여기서 짐이라는 말은 돕고 협력해야 할 만큼 큰 짐이나 문제를 의미합니다. 그런 경우, 할 수 있는 대로 부끄러움도 같이 당하고 고통도 같이 당하고 아픔도 같이 당하고. 그게 책임과 부담을 같이 지는 거예요.
(
실례;예루살렘 교회가 기근으로 힘겨울 때 마케도니아 교회와 고린도 교회가 큰 구제헌금을 함)

 

성경에 보면 참 위대한 인물 중 예수의 아버지 요셉이 있습니다. 요셉이 마리아와 약혼을 했는데……. 약혼하고 얼마 후에 결혼하겠다는 사이였는데, 소문이 들려오길 약혼한 마리아가 배가 불렀다는 것이죠. 이건 분명히 자기 애가 아니거든요. 약혼한 여자가 배가 부르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 하면 좋았겠는가? 내 책임은 분명 아닙니다 . 그러나 그렇다고 말해 버리면 마리아는 간통 죄로 맞아 죽는 사회였습니다. 율법은 간음한 여인으로 취급하기 때문이죠. , 이럴 때에 요셉이 취한 태도를 보세요. 가만히 끊으려고 했다 했어요. 이런 사람을 의인이라고 말해야죠. 요셉을 의인이라 그랬어요. 위대한 남자죠. 그는 가만히 끊고자 했어요. 얼마나 그의 마음이 아팠겠어요. 아주 그 고운 처녀와 결혼하려고 했다가 그걸 파혼하려니 맘 상하고, 또 이렇게 되면 나중에라도 누군가 알게 되면 사내자식이 영 못나 가지고 약혼한 여자를 누구한테 뺐겼구만! 그럴수도 있어요. 이런 부끄러움, 그 아픔, 이런 걸 다 자기가 감수하고서 마리아에게 피치 못할 일이 있었겠지…… 하고 이걸 잘 덮으려고 했어요. 이 요셉이 얼마나 훌륭한가요? 이 얼마나 참 은혜롭고 멋있는 남자인가? 이것이 바로 요셉의 위대한? 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로 내 일은 내가 가능한한 남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하고, 혹 형제 자매 중에 큰 어려움이나 환란의 경우엔, 서로 책임을 함께 지고 짐을 나누는 일이 중요한 성도의 아름다운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 심은 대로 거두리라 ( 6:6-10)
 심는대로 거두리라=간단한 이야기 같지만사실은 아주 무서운 말씀입니다. 악을 심으면 악을

거두고 선을 심으면 선을 거두고 의를 심으면 의를 거두죠.

자 그럼 이제 무얼 심으란 말이죠?  오늘 본문에 주신대로 보니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하십니다.

가르치는 자는 심는 자요 가르침을 받는 자는 지금 심기움을 받는 자입니다. 이 말은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가 좋은 관계를 이루라는 것입니다.  교역자의 가르침을 아멘 아멘 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참 행복한 성도입니다. 어떤 교회 목사와 장로님은 관계가 매우 나빠 항상 회의마다 으르렁거립니다. 행복할 수 없습니다.

 

또 다음에 가르침을 받는 자가 가르치는 자에게 잘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여기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의미에 말입니다. 물론 교역자가 생활하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도록 마음을 써주는 일도 중요하고요. 안 그러면 돈 벌러 세상 일을 하러 가야 되요. 목회를 집중해 할 수 없어요.  또 더 나아가서 존경하거나 아니면 존중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례로, 여러분이 주일날 교회 갔다 와서 가정에서 아이들 앞에서  , 참 오늘 목사님의 설교가 좋았다. 오늘은 참 은혜가 많았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목사님을 존경하는 이야기로 꽃을 피울 수도 있고, 교회 갔다 와 가지고 목사님 흉이나 보고 앉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목사의 어디가 어떻고 어디가 어떻고. 옷차림이 이상하더라. 잔소리가 많더라, 고지식하더라 등등  흉만보고 앉아 있으면, 그런 것 많이 들은 아이는 절대로 신앙생활 잘 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나서 여기 곧 말하기를 "심은 대로 거두리라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는다." 합니다. 만홀히 여긴다는 말은 코를 들고 비웃는다는 뜻이죠.  심은 대로 거둔다는 진리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 할례의 진정한 의미와 동기( 6:11-15)
이 부분 즈음에선 갈라디아서의 결론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1절 부터는 다시 할례 문제로 돌아가서 말씀을 하게 됩니다. 갈라디아서의 주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이것이 진짜 근본적 교리요 원칙적 교리죠. 오직 믿음으로입니다.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창세기에서부터 율법까지, 또 그 모든 제사 의식까 지, 그리고 신약에 와서 예수님의 말씀 전부가 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이라 는 그런 은혜 중심적이고 믿음 중심적인 교리를 확고하게 세우고 있습니다.
,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니까 세 가지 이유를 들어 할례주의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1)첫째는 핍박을 면하려는 것이다.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정치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 당시 더욱 그러했죠. 유대교라고 하는 종교는 이미 로마 정부가 정식으로 인정하는 종교죠. 그런고로 유대교를 믿는데 대해서는 핍박을 받지 않아요. 이건 아무 문제도 없어요.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문제가 되요.  이건 새로운 종교이기 때문에, 아직도 로마 정부가 인정하지 않아요. 특별히 기독교의 시작이 되는, 아주 창시자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빌라도가 십자가에 못박았죠. 그런 교리야 어쨌든 간에 또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의 생활이 아무리 선하던 의롭던 뭐 정결하던 상관없어요. 문제는 기독교의 맨 처음 창시자를 십자가에 못박았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다 한 마디로 말하면 반 로마 정부적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고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건 핍박을 자초하는 것이죠.

 

2) 둘째로 옆에서 권하기도 하는 편법이다.

예수를 믿어도 할례만 받으면 핍박 안 받고 믿는데 왜 하필이면 핍박을 받으면서 믿으려고 하느냐? 이 바보 같은 사람들아. 할례만 받으면 다 되는 거야. 문제없다. 그러고 예수 믿으면 되지 않느냐? 이렇게 나오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나약한 사람들이 너도 나도 잘 알지도 못하며 할례를 자꾸 받게 되거든요. 사도 바울은 이게 마음이 아픈 것이죠.

 유명한 어거스틴도 기독교인들은 고난받지 않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들의 삶에 고난이 없다면 그들은 여전히 아직도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라고 했어요.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셨어요.
내가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아느냐? 아니다. 검을 주러 왔노라.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또 딸이 어머니와 불화할 것이다. 라고 하셨어요.

 

3)세 번째로, "너희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라고 합니다.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라는 말씀은 겉보기에 좋게 한다는 의미입니다.실상은 갈라디아 사람들은 율법을 잘 지키지 않지만 남 보기에 좋기 때문이라는 의미입니다. (;주일날 약국 문 닫고 주일성수라고 종이에 써 부친 후, 놀러 간 약사님 이야기)

 

)마치는 말과 마지막 당부 (16~18)

   16=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 - "이 규례"란 것은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의 규례"

,그 리스도의 십자가와 복음(14)을 중심으로 하는 그 교훈을 가리켜요. 그러므로 "행하는

" 란 말은 기독교인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 = 이것은 육체적으로만 이스라엘이라고하는 유대주의자들에게 대조하여 말한, 참된 영적 이스라엘를 가리킵니다. , 이것은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새로운 이스라엘(기독신자)에 대한 명칭이죠. 바울은 참 이스라엘된 성도들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라며 갈라디아 교인들을 축복을 합니다.

 17=나를 괴롭게 말라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노라 = 이것은 바울의 전도를 방해하는 유대주의자들을 염두에 두고 그들을 추종함으로써 어리석은 일을 하여 바울을 괴롭게 하지 마라는 당부입니다.  18=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라며,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유대주의자들의 그릇된 교훈에 완전히 빠지지 않도록 거듭 당부하며 편지를 마감합니다.

 

결론)

갈라디아서는 우리에게 온전한 복음이 주는 자유와 그것을 누릴 것을 강조 했습니다. 율법을 지켜 구원에 이른다는 논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헛되게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도우심으로 서로가 서로를 섬기고 짐을 나눠지며 그 자유케 하심을 우리가 누릴 뿐 아니라, 내 이웃과 내 친지 친척들이 모두 함께 누릴 수 있도록 전파해야 합니다.

 

        012922 안익선 목사/ 참조:하나님나라, 믿음의 문학 & 곽선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