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1장 강해(다른 복음은 없나니)

호걸영웅 2021. 12. 19. 08:54

갈라디아서 1장 강해(다른 복음은 없나니)

 

갈라디아서는 모두 6장으로 된 작은 서신입니다.

이 갈라디아서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교회들에 보낸 편지인데 갈라디아 교회들이란 사도 바울이 복음 전도를 위해 3차에 걸친 순회 여행을 하던 때, 그 중 제 1차 전도 여행 때에 전도했던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더베, 루스드라 지역에 세워진 교회들이며 오늘날 터키 중부 고지대에 위치한 지역들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교회들에게 이 편지를 쓴 목적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여 교회를 세운 후,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복음 사역에 전념하던 중, 유대주의적 교인들이 갈라디아 지역에 들어와서,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 아닌 다른 변질된 복음을 전파하므로, 갈라디아 지역 교회들은 영적 위기에 처하게 되어, 이를 방지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 될 수 있다는 복음을 전했으나 유대주의자 들은 구원받기 위해서는 선한 행위 곧 율법도 반드시 포함해 지켜야 한다고 도전해온 것입니다. 고로 사도 바울은 위기에 처한 교회들을 거짓 교리로부터 보호하고 성도들을 바로 가르치기 위해 갈라디아서를 써 보내게 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갈라디아서는 율법과 복음에 대해 기록된 교리적인 문서로 로마서와 유사성이 있는 서신입니다. 오래 전부터 신학자들은 이 갈라디아서를 ‘기독교 자유의 대 헌장’이라고 일컬어 왔습니다. 율법의 속박에서 온전히 자유를 선포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현대의 우리들은 다른 서신들과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할지 모르지만,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이 책에 별명을 부치되 자기 아내의 이름인 ‘캐터린 폰 보라‘를 붙이면서 “나는 이 책과 결혼했다’고 말을 했었다고 합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하게 된 영적 각성이 바로 이 서신을 연구함으로써 일깨워 진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또한 웨슬레도 갈라디아서의 한 설교를 듣고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갈급했던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주신 본문을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눕니다.  [1]인사(1-5), [2]오직 하나밖에 없는 복음(6-10), [3]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11-12) ,[4]유전에 따른 사도 바울의 교회 핍박(13-14), [5]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이후의 활동(15-24)입니다.

 

 본론)

 )인사와 사도성에 대한 변론

먼저 1절부터 5절까지의 머리말에는 1절에서 사도 바울 자신이 어떻게 사도가 되었는지 자기 소개를 했고, 2절에서는 이 편지를 보낸 자와 받는 자들을 소개했으며, 3절에서는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였고, 4절과 5절에서는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1절에서 자신을 소개하기를 사람들에게서 난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사도 된 것은 어떤 인간 집단에서 임명을 받은 것도 아니요, 인간적인 어떤 방법과 수단으로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후서에서도 강하게 어필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편지 첫 머리에 이런 점을 강조한 배경은 갈라디아 지역 교회에서도 유사한 일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곧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하는 주장들이 꽤 있었다고 들려 왔기 때문입니다.

 

물론 바울의 경우, 다른 사도들과 같은 과정을 통해 사도가 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하나님 께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도 바울을 강권하심으로 다메섹 도상에서 사로 잡으 셔서 예수님의 제자를 삼으셨으므로, 사도 바울로서는 주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았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고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체험이 있으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고 사도됨의 기원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2절은 편지를 보낸 자와 받는 자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쓴 다른 편지를 보면 편지를 보낸 자의 부분에 사도 바울과 함께 있는 사람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는데 이 갈라디아 서에서는 이름을 직접 밝히지 않고, 함께 있는 모든 형제들이라고만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받는 자는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라 했습니다.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이란 사도행전 13장과 14장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제 1차 전도 여행시에 전도하였던 비시디아 안디옥(수리아의 안디옥과 다름), 루스드라, 이고니온, 더베 지역에 세워진 교회들로 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3절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을 체험하기를 바란다는 기원을 합니다. 죄 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던 갈라디아 지역 교인들에게 구원을 허락하신 그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 마음에 평안의 체험을 하기를 바란다 했습니다.

 

그리고 4 5절에서 갈라디아 지역 교인들을 악한 세대에서 건져내시고 죄 사함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이 세세토록 있기를 바란다는 찬양하였습니다.

 

[]유일 무이한 복음

갈라디아서는 다른 서신과 달리 매우 단도직입적인 서신입니다. 용건만 간단히! 라는 식입니다. 사도 바울이 보낸 편지들을 보면 대부분 매우 자상하고 친절하고 배려심이 깊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는 인사말 뒤에 무엇 무엇을 감사한다는 칭찬이 따르지 않고 바로 무엇 무엇을 이상히 여긴다는 긴장된 표현과 아울러 책망이 이어짐을 보게 됩니다. 거짓 교리에 넘어간 교인들을 빨리 바로 잡아야 하는 긴박감 때문인듯 합니다.

 

 6절에서 책망을 하고 있으며 7절에서는 다른 복음이란 없다고 했고 8절과 9절에서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으며 10절에서 그리스도의 종의 자세에 대해 쓰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6절에서 유대주의자들의 거짓 교리에 넘어간 자들을 책망하기를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신 이를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좇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나 자신의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존재들임을 아신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구원받도록 복음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구원될 수 있다는 잘못된 교리에 속아 넘어간 갈라디아 지역의 여러 교회 성도들이 정말 그렇게 쉽게 넘어간 것을 이상히 여긴다고 책망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른 복음은 없다고 잘라서 말을 했으며, 유대주의자들이 전파한 다른 복음이란 믿음에 혼동을 주고 교회를 소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조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복음이란 성경이 말씀한 것이 무엇을 빼거나 더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런 행위들은 교회를 소란케 하는 행위요 복음을 변경시키는 행위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단정적으로 말하기를 다른 복음은 없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신학(Theology)과 수많은 교리와 교파가 나뉘고 제각기 자기들의 믿음이 옳다고들 하지만, 성경에 없는 것을 시행하거나 성경에 있는 것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다른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사람인지라 듣기 좋은 말로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10절에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만일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끝을 맺었습니다. 사람의 종과 그리스도의 종 둘 중 그리스도의 종을 택한 것입니다.

 

 )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11~12)

이제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사도직과 자기가 받은 복음이 하나님께 기원을 두고 있음을 논증하기 위해 자기가 사도로 택함을 받기 전 교회를 핍박했던 시기는 사람으로 말미암고 사람들의 유전에 따라 임무를 수행했음을 다음 단원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 사도 바울의 교회 핍박에 대해 (13~14)

13 14절은 사도 바울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 자기는 자기들의 동족 중 누구보다 더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었다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자기 조상의 유전(율법주의)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므로 결국 조상의 유전에 흠집을 내는 기독교인들을 심히 핍박하고 살기 등등했던 사도 바울의 과거가 있었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은 자기가 믿고 있는 것이 바로 정통 보수이기 때문에 자기와 다른 믿음을 가진 이단자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일로 믿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변화 받기 전과 변화 받은 후의 자신을 돌아볼 때에 다 진실했고 열성을 냈지만 변화 받기 전에는 사람에게서 난 유전 즉 사람이 만들고 손질한 전통을 위해 열심을 낸 것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을 거역한 결과를 가져왔고 변화 받은 후의 자신이 열심을 낸 그 열심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좋은 열심이었음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이후의 활동에 대해 ( 15절부터 24)

사도 바울은 그 당시 유명한 가말리엘 문하에서 자랑할만한 높은 학문을 마쳤고 자기가 배운 것에 대해 보수적으로 철저히 실행에 옮겼는데 그 결과는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고 선량한 성도들을 잡아 가두고 죽였던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배운 지식과 권위와 조상들의 유전을 따랐기 때문이었음을 깨닫고 자기가 개종한 이후의 자신은 사람의 교육이나 사람의 전통과는 전연 상관이 없이 온전히 하나님의 부르심에만 따라 행한 결과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사이 교회들을 신문에 소개할 때, 자기들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하기 위해서는 사역자가 어떤 어떤 학교를 졸업했고 어떤 학위를 받았으며 어떤 기관과 관련이 있는지를 되도록 더 많이 쓰는 것이 상식인데, 사도 바울은 자기가 사도로 불리움을 받은 이후 사람인 누구로부터 배우지도 않았고 사람인 누구의 영향을 받지도 안았으며 어떤 기관으로부터의 인준도 받은 것이 없었음을 증명하려고 자상하게 밝히고 있으니…… 사도 바울의 사상으로 말을 한다면 사역자로서 이력서를 자상하게 밝히거나 명함이 거창한 사람은 자기의 사역자 됨이 사람에게서 난 것임을 증거 하는 것이고 사도 바울과 같이 그리스도 외에 다른 어떤 사람의 교육이나 어떤 기관의 인준을 밝히지 않는 이유는 자기의 사역자 됨이 하나님에게서 난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도록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을 택하시기를 어머니의 태중에서 택하셨다고 하므로 자기의 사도됨은 인위적으로 사람에 의해 늦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찍이 만드셨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로 택함을 받을 때에 어떤 일가 친척과 의논하지 않았다고 했으며 사도 중에서 가장 이름이 있는 베드로를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찾아가지도 않았다고 했습니다.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메섹으로 다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모세에게는 미디안 광야가 있었고 예수님에게도 공생애 시작 전에 광야가 있었듯이 사도 바울도 아라비아 광야 생활 후에 곧 다메섹에 돌아와 자신이 핍박했던 사람들에게 자신의 변화를 보여주고 사죄하는 의미로 다메섹에서 전도활동을 이미 시작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년이 지나서야 베드로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갔으나 오직 15일만 머물렀고 많은 사도들이 있었지만 주님의 형제 야고보 외에는 아무도 만난 일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3년이 지나서야 베드로를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에 갔지만 15일만 머물렀다고 강조하므로 자기의 사도직은 누구의 교육으로나 예루살렘의 어떤 기관과 별 상관이 없음을 들어내 말했습니다.

 그후 자기 고향인 소아시아의 다소 마을 주변 도시들인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러 전도했으며 유대에 있는 성도들이 자신이 복음을 전한다는 소식만 알뿐이지 자기 얼굴도 모르면서 사도 바울이 변화되어 핍박했던 그 믿음을 전한다는 소문을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굴도 모른다는 말이 강조된 것은 복음을 전달하는 사역자가 된 이후 예루살렘 사람들을 대면하지 않았음을 강조하는 말이 되겠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는 다른 복음은 없다는 교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한 길만을 제시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케 하신 주님이 한 분이시오, 몸이 하나라고 했으니 교회가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침례도 하나만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다른 예수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의 나심과 죽으심과 부활을 성경과 달리 해석하는 믿음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복음과 사람의 복음이 있음을 깨달았고, 또 하나님의

종과 사람의 종이 있음을 배웠습니다. 교회이면 다 교회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교회도 있고

사람의 교회도 있음을 배운 것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신도를 가지고 있는 한국산 통일교가 그 이상 종교적인 단체로서는 문을 닫고 사업체로만 남겠다는 선포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사업체 적인 교회이거나 유사 기독교적인 교회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 교파적인 교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교회는 글자 그대로 기독교이지만 그 말씀에 손질을 해서 자기 목적과 수단으로 이용한다면 그 교회는 기독교가 아니라 기독교적인 교회나 교파적인 교회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말씀 중심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과 일치되지 않는 믿음은 넓은 길이며 성경에 일치되는 믿음은 비록 들어오는 사람이 적어도 진리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성경과 일치되지 않은 믿음과 실행은 사람의 작품이요 일치된 믿음은 하나님의 작품인 것입니다. 정통 보수란 오래되고 옛 전통대로 지켜오는 신앙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변경치 않고 가감 없이 말씀 그대로 지켜나가는 신앙을 말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고로, 다른 복음을 전하거나 따르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담대하게 외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종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적인 것은 성경적이라고 말 할 수 있고 성경적이 아닌 것은 성경적이 아니라고 말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종들이 되어야 합니다.

 

121421 안익선 목사/참조: 한인 그리스도의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