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2장 (성도들에 대한 바울의 세 가지 태도)
서론)
데살로니가 성도를 대했던 바울의 태도는 다양했습니다. 원칙주의자이며 다소 다혈질의 성향을 가진 바울이었지만 성도를 대할 때는 기꺼이 자신의 모습을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었기 때문에 가능한 자세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본론)
가) 1-2절, 복음을 전하는 방식
데살로니가 교회와 바울의 관계를 살펴보려면 사도행전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살전 1장에서는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2장과 3장에서는 바울이 일부 교인들로부터 심각한 오해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죠.
사도행전 17장으로 가 봅시다. 16장에서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 옥에 갇히게 됩니다. 귀신들린 여자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자 귀신들린 여자 아이를 통해 점을 치고 돈을 벌던 주인이 화가 난 것입니다. 그 일로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를 나오게 되고 암볼리아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이르게 됩니다. 데살로니가의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합니다.(행 17:1-2)
‘세 안식일’이란 표현을 통해 삼일 동안 유대인 회당에서 바울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은 것 같습니다. 랍비였던 바울에게 성경을 해설이 달라고 의뢰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증언을 하게 됩니다.(행 17:3) 그러자 유대인들은 바울을 회당에서 쫓아내게 됩니다. 이때 야손이란 사람의 집에 들어가 바울과 실라를 잡을 뻔 했지만 바울과 실라는 이미 그곳에 없었습니다. 누가는 ‘유대인들은 시기하여’(행 17:5) 바울과 실라는 고발했다고 증언합니다. 그들이 데살로니가 읍장들, 즉 관원들에게 고발한 내용은 반역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7:5-9] 5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6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7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8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9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니라-고 했죠.
가이사를 대신할 다른 임금인 예수를 섬긴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빌라도가 예수님께 심문했던 그 질문이었습니다. 어쨌든 이 일로 바울과 실라는 쫓겨나다시피 하여 데살로니가를 벗어나게 됩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이것을 그대로 둘리 없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자신들만의 안전을 위해서 도망갔다고 그들의 핍박은 쉽게 멈추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상황을 2절에서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했다고 말합니다. 빌립보뿐 아니라 데살로니가에서, 또 베뢰아에서 쫓기고 또 쫓기는 생활이 계속되었습니다. 바울은 자신들이 결코 자신들만을 위해 살고 싶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6절에서 바울은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 고 고백합니다. 8절에서는 오히려 우리의 목숨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럼 바울은 어떻게 복음을 전했을까요?
ㄱ. 명백하게 복음을 전하다
2절에 보면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한글 번역은 모호하지만 원문에 보면 ‘전하다’라는 동사는 ‘자유롭게’ ‘공개적으로’ ‘두려움 없이 말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바울이 이 표현을 쓴 이유는 자신들의 복음 사역 자체가 모호하거나 비밀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공개되어 있고, 분명하다는 뜻입니다.
1:5에도 보십시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사역을 함에 있어서 누구 몰래 어떤 일을 하거나, 모호하게 일을 처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명백하고 분명하게 일을 처리했고,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행동을 취함으로 의혹이 일어나지 않도록 했다는 말입니 다. 뿐만 아니라 이 단어는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교묘하거나 간사한 말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전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4절에서는 이것을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눈치를 보고,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해 복음을 조작하거나 교묘한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5절에서는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시니라’라고 고백합니다.
성도들도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사람을 무시하거나 하대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ㄴ. 고난을 피하지 않았다
두 번째 원리를 ‘고난과 능욕’이란 단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의 기분을 맞추거나 모호하게 하지 않았는데, 사실 그것이 힘든 이유는 복음을 전하는 상황이 결코 좋았거나 우호적인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고난과 능욕이 따랐고, 유대 인들은 계속하여 바울을 시기하여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바울을 괴롭히고 죽이려 들었습니다. 비록 그런 상황이라도 해도 고난을 회피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상황과 맞서 싸웠고, 하나님께 자신들의 상황을 맡겼던 것입니다.
나) 3-16절, 복음 전도자로서의 세 가지 자세
바울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막무가내로 예수 천당만을 외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효율적이고 명확하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칠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했습니다. 바울은 세 가지 자세(태도)를 통해 과거의 자신의 복음 전도 사역을 소개합니다.
ㄱ. 3-4절 청지기
3-4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복음의 청지기로 소개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하나님께 ‘복음을 위탁 받았다’고 말합니다. 즉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입니다. 마치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의 양을 치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 표현에서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복음을 전할 때 종종 특권의식을 갖지 말아야 했음을 말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는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복음은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고로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절대 우월의식이나 특권을 의식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왜? 복음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단지 하나님의 종이요 청지기일 뿐임을 늘 명심해야 합니다.
ㄴ. 5-8절 유모
두 번째 자세의 이미지는 유모입니다. 7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바울은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특권을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 같이 했다’라고 말합니다. 복음 전하는 자가 취해야할 두 번째 이미지는 바로 온유한 유모입니다. 전도자는 영적 아버지이기도 하지만 어머니이기도 해야 합니다. 어머니는 어린 자녀들에게 먹을 것을 줍니다. 바울은 이곳에 ‘온유한’이란 수식어를 붙여 사람들을 대할 때 온유해야 할 것을 설명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심지어 목숨까지 주어도 아깝지 않다고 말합니다.
ㄷ. 9-12절 아버지
세 번째 이미지는 아버지입니다. 어머니로 족할 것 같은데 왜 권위적인 아버지의 모습도 함께 지녀야 할까요? 11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한 다’라고 말합니다. 어머니가 먹이고 입히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면, 아버지는 교육하고 가르치는 이미지입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양을 많이 키웁니다. 목자는 양들을 인도하고 먹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거칠고 불량하고 성격이 나쁜 고집스럽고 게으른 양들이 있습니다. 그때 목자는 몽둥이로 양들을 좀 따끔하게 때려주거나 개를 통해서 그들을 일으켜 세웁니다.
사도 바울은 때로는 말을 듣지 않고 진리에 거스리는 행동을 하는 교인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지도하고 책망했습니다. 영적인 교육도 일반 교육과 마찬가지입니다. 위로하고 격려도 해야 하지만, 때는 강력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다) 13-16절, 데살로니가 교회의 두가지 점을 칭찬하다.
ㄱ. 바울의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을 칭찬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13절) 바울은 사실 우리와 성정이 동일한 사람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바울은 인물도 없고 키고 작고 말도 어눌하고 대머리였을 가능성이 높다고도 합니다. 어떤 곳에서는 안질(眼疾)이 있어 육신적으로 치명적인 약점을 많이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 했습니다.
그들이 바울의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바울은 13절 후반부 에서 “말씀이 너희 믿는 자 안에서 역사한다”고 말합니다. 즉 태반이 유럽 사람들인 그들이 말씀을 따라 성령의 열매들이 풍성하게 맺었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1:9-10절을 의미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상을 버리고 고난과 핍박 중에서도 온전히 하나님만을 섬김으로 말미암아 온 각처에 그들의 소문이 퍼져 나갈 정도였습니다.
ㄴ. 예루살렘 교회를 본받음을 칭찬
14절을 보면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를 본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예루살렘 교회를 지칭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교회가 예루살렘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루살렘교회는 대표성을 띠는 상징적인 교회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본받은 것일까 요? 바로 고난을 피하지 않은 것입니다.
14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말한 ‘동족의 위험’을 말합니다.
15-16절까지에서 유대인들이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대적이 되었다고 말합니다.(15절) 이것을 데살로니가 교회에 적용해 본다면, 그들도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목숨의 위협을 느꼈을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2에 의하면, 데살로니가교회를 비롯한 마케도냐의 교회들은 많은 환난과 극심한 가난 속에서 믿음을 지켜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라) 17-20절, 데살로니가에 방문하기를 원한 바울
이제 바울은 자신들이 데살로니가를 갑자기 피신하여 떠나긴 했으나 바울의 마음까지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18절에 의하면 바울은 여러 번 다시 데살로니가 교회로 가려고 했으나 사탄(추적자나 핍박자를 의미)이 막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자랑스러워하며 하나님 앞에서 영광이며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결론)
우리도 복음을 전하고 성도들을 양육하고 돌볼 때,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바울과 같은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먼저는 하나님 앞에서 청지기의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두번째는 유모와 같이 온유해야 합니다. 세번째는 아비와 같이 공정함과 강한 성령의 능력과 말씀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또 데살로니가 교인들처럼 또는 예루살렘 교회처럼 환난 중에도 잘 인내하고 잘 참으며 복음을 위해 수고해야 합니다. 비진리 앞에선 용감히 맞서야 합니다. 할렐루야!
062722 안익선 목사/ 출처: [Pensées: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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