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 전서

데살로니가전서 5장 강해 ( 주의 강림과 그 날에 대한 권면 )

호걸영웅 2022. 7. 23. 05:01

데살로니가전서 5장 강해 ( 주의 강림과 그 날에 대한 권면  )

 

서론)

우리는 종종 종말론적인 신앙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이 종말론적인 신앙은 지금이 시간에 있는 그대 로 사물과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설 것을 예상하고 멀리 바라보고 믿음을 가지라는 의미입 니다. 이는 세상의 끝을 보는 신앙, 천국을 내다보는 신앙, 역사 앞에 판단을 의뢰하는 신앙입니다. 살전 5장은 곧 종말론적 신앙에 대한 유익하고 바른 교훈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5장 초반부는 주의 강림의 날이 도적같이 이르므로 특별히 언급할 말이 없다고 하면서도 대략적인 시기적 특성에 대해서는 우리가 다 알기에 그러한 점을 생각하도록 권합니다. 

주의 강림.혹은 재림은 도적같이 불시에 임하지만 그것은 세상사람들에 대한 것이고 성도들에겐 성도들이 늘 강림을 준비하며 살기에 주께서 도적같이 임할 수 없다 했습니다. 

그리고 주를 맞이하기 위해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어찌 살아야 할 것인가에대해 몇가지 권면을 남겨 주고 있습니다 .

 

오늘은 (살전 5:14)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종말의 때에 가져야 할 5가지 정도의 교훈을 간추려 공부하도록 합니다.

 

본론)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라

 이 말은 다른 성경은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종말론으로 자기 생활에 리듬을 포기한 사람들을 의미하는 듯도 합니다.

규모가 없다는 말은 질서를 떠났다는 의미입니다. 또 이 단어는 병사가 사열을 하고 앞으로 가는 그 사열의 행열에서 벗어나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즉 생활의 무질서를 말합니다. 청소년들의 문제를 연구하다 보면 폭력과 비행을 저지르는 청소년에게는 먼저 부모의 문제가 많습니다. 아버지가 무질서하게 사십니다.

하나님은 질서를 매우 귀히 여깁니다. 질서를 깨는 세력은 주로 사단입니다.

사단은 자신이 피조된 천사라는 것을 망각하고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나님을 대적하다 쫓겨난 존재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세운 공동체를 사단은 깨려고 하죠.

 

고린도 전서 14 40절에서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 충고합니다. 고전14:33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삶에 반드시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도 질서를 존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모방하고 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귀란 말은 희랍어로 diabolos라고 하는데 dia(사이에) bolos(던진다)는 두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사이에 불법으로 끼어 들어가 혼란을 일으킨다는 뜻입니다.

마귀의 이미지가 삶의 질서를 깨뜨리는 자입니다. 사람들이 줄 서있는데 순서를 기다리지 않고 끼어 들어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삶을 규모 없이 살아가는 것이 마귀를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또 질서를 깨트릴 때 우리는 마귀를 따르는 마귀 짓을 하는 것이 됩니다.

 

성숙한 성도들이 해야 할 일 중 하나가 규모 없이 삶을 사는 자들을 훈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훈계를 듣지 않는 자는 징계해야 합니다.

엘리 제사장은 훈계와 징계를 하지 않은 아버지로 유명합니다. 자녀들에게 훈계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잘못 때문에 그 집에 저주가 임하는 화를 당했습니다. (삼상3:13)=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 하였음이니라"했어요.

그것이 말로 하는 훈계이든지 벌을 가하는 것이든지 아무튼 훈계를 해야 했다는 말씀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도 간곡히 부탁한 바 있습니다. 사도행전 20:31절에서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훈계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옛 사람을 억누르기 위해서는 하나님 말씀으로하는 훈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신앙이 약해질 경우, 우리는 다시 옛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옛사람의 본성 은 죄입니다. 우리가 옛사람으로 돌아서는 경우, 우리는 우리를 지배하는 죄에 굴복하기 쉽습니다. 죄의 지배력은 더욱 강하게 우리를 억누를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옛사람을 죽이시기 위해 보혈을 흘리셨기 때문에, 다시는 죄를 짓지 말도록 기도하고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비록 새로운 피조물이라 할지라도 쓰러지기 쉬운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훈계를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배를 폐하고 영적 지도자를 피하면 대책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매를 맞는 것만이 남은 과정입니다. 돌아온 탕자가 겪은 고난을 겪어야만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애굽으로 돌아 가야만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약한자는 붙들어 줘라

소심한자들은 마음이 작고 약함을 뜻합니다. 약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내가 부득불 자랑할찐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고후 11:30) 한바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의 생애는 완전히 약한 생애를 사셨고, 마침내는 박해를 받아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도 권력, 금력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 주님의 삶은 약한 자의 삶이셨습니다. 얼마나 약하셨는지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아무 세상적 능력과 권세도 없었습니다. 그는 참 약하신 자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그는 '난 지금껏 잘못한 것이 없다!'며 변명 한마디 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허물이 없다. 나는 죄가 없다.'고 변명도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자기를 해치는 수많은 사람들, 욕하는 사람들, 침 뱉는 사람들, 끊임없이 때리고 채찍질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얼굴을 붉히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용서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얼마나 약하셨습니까?

바울 사도는 "나는 나에 대해서 약한 것들과 부족한 것들을 자랑하노라 그 이유는 내가 약할 때에만 강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약할때에만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라고 했습니다.

 

존 스토트 박사는 오늘날 세계 곳곳을 다녀보아도 바울처럼 자기의 약함과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진정한 기독교의 지도자들을 찾아보기가 너무나 어렵다고 한바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지도자들은 모두 너무 강하고 너무 지혜롭고 너무 부요하게 되었어요. 오늘의 수많은 교회가 "나는 부자라"고 자랑했던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되어버렸다고 했습니다.

 

초기의 한국교회는 참으로 약했고 가난했고 힘이 없었어요. 그래서 한국교회는 겸손히 땅에 엎드려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만 의지한 적이 있었습니다. 초기 선교사 중의 한 사람인 블레어 박사가 지적한대로, 그 당시 한국교회는 절망 가운데서 하늘만을 바라보며 이렇게 울부짖었습니다. "선교사님, 한국 사람들처럼 불행하고 불쌍하고 소망이 없는 민족이 있습니까?" 라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적으로 약하고 힘이 없고 소망이 없는 한국교회와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시고 부흥과 축복의 손길을 피셨습니다. 결국 한국교회는 세계 교회가

놀랄만한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고 민족과 나라까지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한국교회는 너무 커지고 너무 강해지고 너무 부유해졌어요.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너무 위대해져서 거의 우상화가 되었습니다. 결국 한국교회는 복음의 능력을 점점 상실하게 되었고 사회로부터 실망과 불신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한국교회는 바울처럼 약해져야 하고 어리석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은 우리가 약할 때에 우리와 함께 하시고 그의 능력으로 우리와 함께 머무시기 때문입니다.

 

)힘이 없는 자들을 붙잡아 (Support) 주어라

성경은 우리 인간을 흙으로 창조했다고 했습니다. 빌립보 2장 에는 '질그릇'이라고 인간을 표현합니다. 깨지기 쉬운 '토기'같은 인간들 입니다.

 

우리 모든 인간은 누구나 약한 것이 많습니다. 곰은 6개월을 먹지 않아도 넉넉히 잘 삽니다. 뱀은

6백일을 먹지 않아도 산다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산소 공급 없이는 8분밖에 살 수 없고 물을 먹지 않고는 일주일 이상을 살 수 없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심장이 멈추었을 때는, 심장마비가 왔을 때는 한 5분 내에 회복하지 아니하면 생명을 잃습니다. 운동능력으로 따지면 개만도 못할 때가 많죠. 하루살이도 1킬로미터 밖의 음식 냄새를 맡는다 합니다. 사람은 여러모로 약하게 창조되었습니다.

또 사람은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 가시가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 평안한 것 같고 행복해 보여도 가만히 살펴보면 다 가시가 있어요.

 

그래서 유명한 설교가 Joseph Parker목사는 젊은 목사의 모임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고통에 관하여 설교를 하면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말씀이 된다'고 했다. 'There is a broken heart in every pew'(교회의 어느 자리에나 마음이 상한 심령이 있다)고 말했죠.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 가시를 어떻게 받아드리고 다루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의 성패가 결정되고 행복과 불행이 따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중국의 장자가 한 말 가운데 '무용지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용지물이라는 말은 들어보았지만 무용지용이라는 말은 잘 못 들어보셨을겁니다. 무용지용이라는 말은 쓸모가 없어서 쓸모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덕분에 오히려 무사하게 되고 살아남게 된 경우를 말합니다.

 

장자는 이런 실례를 들어 무용지용에 대해 설명을 해 줍니다. 한번은 석 씨라고 하는 목수가 궁궐을 짓게 되었는데, 아주 최고의 목수로서 나무를 구하러 전국을 헤매는데 가다가 큰 상수리 하나를 만났습니다. 상수리 하나는 몇 십 아름이 됩니다. 그 아래 소가 천 마리나 쉴 수 있는 큰나무였지만 이 목수가 지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제자들이 선생님 이렇게 좋은 나무를 가져다가 궁궐을 지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도 그냥 지나가는 거예요. 그 날 저녁이 되어서 잠을 자는데 그 상수리 나무가 이 석씨라고 하는 목수에게 나타나는 거예요. 얘 이놈 네가 나를 무시하고 나무로 취급을 안하고 지나가는가 본데 너는 잘못 생각했다-라고 하는 거예요. 목수는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거예요. 다른 나무와 나를 비교하지 말라는 거예요. 네가 생각하는 소나무나 향나무같이 멋지게 생긴 쭉 뻗은 나무 같으면 내가 천 년을 살 수 있었겠냐? 벌써 도끼에 찍혀서 끝났을 텐데 내가 상수리나무이기 때문에 이렇게 천 년을 살아 온 것이다-라는 거예요.

 

복숭아나무, 대추나무, 감나무 좋은 나무가 열매를 맺고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을 것 같으면 벌써 가지가 꺾여졌고 열매 맺지 못할 때 벌써 찍어 넘어졌을 것이고 버림을 받았을 텐데 그 수명이 얼마나 가겠냐? 나는 제대로 된 열매도 맺지 못하는 나무고, 그렇게 쭉 뻗은 나무가 아닌 것 때문에 이렇게 천 마리의 소들이 와서 쉬고 있지 않느냐? 꼭 궁궐에만 가야 좋으냐? -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잘났다는 것 때문에 빨리 죽는 경우가 많고 잘났다는 것 때문에 산산조각 납니다. 오늘날 이 세상의 모든 함정에 걸려든 사람은 잘났다고 하는 사람들이 걸려든다는 거예요. 약하다는 것은 오히려 축복이 될 때가 많습니다. 이들은 조금만 붙들어 주면 살수 있습니다.

 *붇들어주라-라는 말은 같이 손을 잡다는 뜻입니다. 질그릇의 능력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도우시고 지키시고 보호해 주셔야 우리는 살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사람이 얼마나 인내하며 사느냐는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분수령이 될 때가 많습니다.

농부가 땅에서 귀한 열매를 바라기 때문에 길이 참고 늦은 비와 이른 비를 기다리는 것은 자연스런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참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 아니라 자연스런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참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위해 참을 줄 아는 사람이라야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 5:10-11)="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라고 했습니다.  인내는 아름다운 것들을 만드는 필수과정입니다. 위대한 작품일수록 오래 걸리기 마련입니다. 인내가 복된 것은 모든 것에는 반드시 결말이 있을 뿐 아니라 그 결과는 욥의 경우와 같이 더 큰 은혜와 축복을 받게 되기도 합니다. 음식도 슬로우 푸드(된장 요구르트, 치즈)가 건강에 크게 좋습니다.  또 약 5:8,9=인내엔 보상이 따른다 했습니다.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보상이 멀리 있다고 낙망하거나 포기하지 말라 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보상할 때를 정해 놓고 계십니다. 그것을 베마 심판이라고도 합니다.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이 결코 아님도 명심해야 합니다.

 

) 악을 악으로 값지 말라

 창세기 4장에 보면 '라멕'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라멕은 아담의 7대손이고 가인의 6대손이죠. 라멕은 인류 최초로 축첩을 하고 살인까지 저지른 자입니다. 자기에게 가볍더라도 상처를 입힌 마구 죽여버린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살인 행위는 정당한 조치라며 만약 이 사건에 대해 가타부타 시비를 거는 자는 가만두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습니다. 자기의 6대조 할아버지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나서 하나님 앞에 두려워 떨 때, 하나님은 가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의 생명을 해치는 자에겐 일곱 배의 벌을 주겠다는 표를 주었지만, 라멕은 그보다 열한 배나 많은 일흔일곱 배의 벌로 다스리겠다고 협박을 하였다 합니다. 성서학자들은 그렇게 호언하는 부분(4:23 24) '라멕의 노래'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하셨습니다(10:30). 그리고 오히려 그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고 했어요(12:20).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지금도 '라멕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한국에선 국내 대기업 회장님이 사소한 시비 끝에 자기 아들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해서 조직폭력배를 금권으로 동원해 직접 앙갚음한 일이 있었다는 뉴스도 있었습니다. 현대판 라멕의 노래입니다.

 

사람들 사이 분란의 대부분의 원인은 자신이 입은 상처에 대해 직접적으로 몇 배로 앙갚음하려다 잘못되어서 생긴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 스스로는 자신의 갈등을 온전히 해결하지 못합니다. 우리들은 자녀들에게도 복수를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리는 습성을 자녀가 갖도록 어린 시절부터 가르쳐야 합니다.

  

            071922 안익선 목사/ 참조: 헬라어 원문성경 싸이트 & 데살로니가 전서 5장 강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