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3장 강해 (서로 주고 받는 위로에 대해)
서론)
데살로니가전서는 사도 바울이 유럽의 제2의 개척교회였던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쓴 편지이며 데살로니가는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들렸던 지역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 즉 오늘날의 튀르키예(터키)지역에서 전도를 하다가 발칸반도인 오늘날 그리스 북부 국경선 위쪽 지역에 해당되는 마게도냐로 가서 전도하게 됩니다.
바울의 수차례 전도여행의 특징 중 하나는 수리아의 안디옥이나 예루살렘을 기준으로 동쪽이 아닌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전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되돌아오면서도 전도를 하였습니다.
2차 전도여행은 1차 전도지역의 가장 서쪽이었던 비시디아 안디옥을 넘어 오늘날 터키 지역인 아시아, 무시아를 넘어가 서쪽 끝까지 다다랐습니다. 그러다가 아시아 지역에서 배를 타고 ‘에게해를 건너 발칸반도로 넘어 마게도냐 지역인 유럽 대륙으로 가게 됩니다.
발칸반도까지의 전도는 예루살렘을 기준으로 1차 전도여행보다 서쪽으로 거리가 약 3배 정도 되는 상당히 떨어진 지역입니다. 대륙을 넘어 들어갔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미지 세계에 대한 긴장감이 상당히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에서 바다를 건너 발칸반도로 간 가장 큰 이유는 사도행전 16장에 나타납니다(행16:6-10). 성령님께서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고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이 도와 달라는 요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발칸반도에서 사도 바울의 사역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마게도냐 첫 성인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실라와 함께 감옥에 투옥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몇 군데 거쳐 갔던 곳이 데살로니가입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사도 바울의 전도 사역은 사도행전 17장 전반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때 위협으로 인한 전도의 어려움을 겪었지만 복음의 결실을 맺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3,4절입니다.
“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4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이 사도 바울과 실라의 복음의 결실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사도 바울의 전도 결실은 특별한 애착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발칸반도에서 사도 바울의 전도 사역은 여러 장소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 중에 특별히 성경에 서신서로 기록이 남은 곳이 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의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 2장 17~20절입 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다”라고 했으며 또한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고 서신서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두 차례 가고자 했으나 어쩔 수 없이 가지 못했던 점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한 애정은 오늘 본문 2절에도 나타납니다. 상반절에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라 합니다.
디모데를 보낼 때, 사도 바울의 상황을 살펴보면, 데살로니가에서 시장에 있던 불량한 사람들이 일으킨 소동으로 인하여 피신하여 베뢰아 지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베뢰아에서도 사도 바울의 복음의 열정은 식지 않았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복음의 결실을 맺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처럼 베뢰아에서도 사도행전 17장 12절을 보면,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었듯이 전도의 열매가 꽤 있었습 니다.
그런데 문제는 데살로니가에서 사도 바울을 방해하였던 사람들이 약40km나 떨어진 베뢰아까지 와서 무리를 일으켜 소동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1차 전도 여행시 루스드라(터어키 남부 지역 도시,갈라디아지방이 이 곳의 북쪽에 있음))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에도 이와 유사한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나면서 걷지 못하는 사람을 그 사람의 믿음을 보고 성령님의 역사로 치유하였습니다. 이 치유 사건의 계기로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 사람들로부터 헤르메스(제우스와 마이아의 아들, 신들의 메신저)와 제우스(그리스 신들 중 최고의 신,네 자녀를 둠)라는 소리를 듣게 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이 소문이 사도 바울이 루스드라로 오기 이전의 장소인 이고니온과 비시디아(터어키 중부지역 의 안디옥) 안디옥까지 흘러 들어갔습니다. 이 두 지역은 루스드라에서 약 45km와 약 225km 떨어진 곳입니다. 이곳에서 유대인들이 루스드라 지역까지 와서 무리를 충동하여 소동을 일으켜 사도 바울을 방해하였습니다(행14:19). 이런 어려운 전도 사역을 하면서 사도 바울이 했던 말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4장 22절 하반절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와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은 자신이 환난을 겪으면서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환난 중에 흔들리 지 말 것을 권면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소동이 있어서 피신하여 환난을 당한 사람은 사도 바울뿐만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따랐던 사람도 데살로니가에서 환난을 받았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사도행전 17장 5절에 야손과 그의 형제들이라 했습니다. 이들은 사도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무리들에게 끌려 구속당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렵게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환난으로 버린 바 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루 빨리 데살로니가로 되돌아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보고 위로의 말씀을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소망한 일의 진행이 여의치 않자, 결국은 디모데를 보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대신하여 디모데를 보내서라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로해 주고 싶었습니다. 2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라고 했습니다.
초신자들의 연약함을 사도 바울은 너무나도 잘 알았습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신앙이 흔들릴 때마다 굳건하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위로하는 것입니다. 믿음에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주위에 연약한 자들이 있습니까? 애정어린 위로가 필요할 줄 압니다. 초신자들이 신앙생활에서 위로를 받아야 되는 궁극적인 이유는 3절 상반절에 있습니다.
1.“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 굳건함과 믿음의 위로가 필요한데 과연 그것을 어떻게 얻겠습니까? 사도 바울과 디모데와 같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 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위로는 강단에서의 말씀, 그리고 주님 안에서 성경을 근거한 권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곧 가장 큰 위로의 말씀이 되고 신앙을 굳건하게 할 수 있습니다. 환난으로 흔들릴 때마다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어떤 온전한 위로와 굳건함은 제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2.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처럼 초신자들만이 환난 중에 위로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먼저 믿은 자들과 신앙의 선배들도 환난 중에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어떻게 위로를 받겠습니까? 물론 이들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 받아야할 존재입니다. 7절은 또 다른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원천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르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형제들’은 초신자인 데살로니가 교인들이고 ‘우리’는 1장 1절에서 언급한 바울과 실루아노 즉 실라와 디모데를 의미합니다. 복음 전도자들은 경제적으로 궁핍하기도 하고 또는 복음 대적자들로 인해 환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럴 때 복음 전도자들을 위로해 주는 요소는 경제적 궁핍을 해결해 주는 물질이 아니라 자신이 전한 복음을 듣거나 다른 이들로부터 복음을 들어 신앙생활을 잘하는 초신자들의 믿음으로 인하여 위로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초신자들로 인해 은혜를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 교회에서 가끔씩 하는 간증이나 새교우 환영회에서 새교우 중 초신자들의 짧은 고백에서 큰 위로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먼저 믿은 자나 나중에 믿은 자나 서로서로 믿음으로 위로 받고 위로해 주게 됩니다. 이것이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이며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5절 말씀에 있듯이 예나 지금이나 우리 주변에는 우리를 시험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항상 주님 안에서 굳게 서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굳게 서기를 간절히 원하는 바를 8절에 다시 볼 수 있습니다.
3.“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이제는 살리라’는 ‘안도의 숨을 쉰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사도 바울은 목회자로서 전도의 결실인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굳게 설 때 비로소 자신이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다는 애정 어린 마음 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마음은 오늘 본문 10절과 기도 내용인 11~13절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성장을 원하고 피차 간의 사랑을 원하고 믿음을 굳게 하기를 원하고,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성도의 거룩한 삶을 원했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이 오실 때까지 시험에 빠지지 않고 믿음에 굳게 서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결론)
오늘 말씀을 근거로 교훈을 얻는다면, 위로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도 간의 믿음으로 인한 위로를 허락해 주심을 감사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이 연약한 자든 성숙한 자든 하나님의 은혜는 동일하고 놀라우시다는 점입니다. 초신자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분명히 그들 가운데서 역사하시고 영광을 받으신다는 점입니다. 어느 쪽에서든 굳건한 믿음을 보여주면 그러 인해 격려를 받습니다. 어떤 환난이 오든 우리는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서로 존중하고 서로 위해 기도하고 격려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그로 인하여 피차 간에 위로 받아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는 자들로 변화될 것입니다. 아멘.
070522 안익선 목사/ 참조: 김광욱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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