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 전후서

디모데전서 1장 강해( 다른 교훈을 경계함)

호걸영웅 2022. 10. 8. 03:29

디모데전서 1장 강해( 다른 교훈을 경계함)

 

서론)

본장은 바울이 가장 사랑하는 영적 아들로 여기는 디모데에게 그 목회에 있어서 지키고 따라야 할 교훈들과 지침에 대해 쓴 편지의 첫 부분입니다.

구성은 1)1-11, 다른 교훈을 경계함,  2) 12-20, 감사와 찬송과 당부-로 두 대지를 이룹니다.  

 

본론)

)1-11, 다른 교훈을 경계함

[1-2]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우리 구주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주’이시다는 것이죠. 그는 이사야를 통해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죠( 43:11).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주이시지만, 그를 보내주신 하나님께서도 구주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세상에는 여호와 하나님밖에 참 구주가 없죠. 사람들이 의지하는 돈이나 세상 권세는 참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146:3-4는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라고 말했고, 에스겔 7:19는 “그들이 그 은을 거리에 던지며 그 금을 오예물(옮기거나 버려야 할 것들)같이 여기리니 이는 여호와 내가 진노를 베푸는 날에 그 은과 금이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하며 능히 그 심령을 족하게 하거나 그 창자를 채우지 못하고 오직 죄악에 빠지는 것이 됨이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구원의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이유는 그분만이 전지전능하신 창조자시요 죄를 없앨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가 사도가 된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죠. 그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과 택하심으로 사도가 되었죠. 그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였으며 또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인생의 본분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 서신의 수신자인 디모데를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라고 했어요. 성도에게는 믿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기 때문이죠( 2:8). 디모데는 믿음 안에서 바울의 참 아들이었으니 그것은 디모데가 바울의 전도를 통해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뜻이든지, 혹은 믿음 안에서 아들로 여겨졌다는 뜻일 것입니다. 육신적인 아들보다 영적인 아들은 더 귀합니다. 육신적 가족관계보다 영적 가족관계가 더 귀합니다. 예수께서는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말씀하셨죠( 3:33, 35). 고로 교회는 믿음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섬기는 아름다운 영적 가족들의 모임이어야 합니다.

[3-4]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오이코노미아)[경영, 섭리, ]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라고 했어요.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에베소에 머물게 한 목적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교사로 자처하며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려 했던 율법주의자들이었던 그들은 바른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교회는 교리적 통일성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성경적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통일성을 말합니다. 그것은 2천년 교회역사의 정통적 흐름과의 일치를 뜻하죠. 바른 교훈의 기준은 성경입니다. 신구약성경만 신앙과 행위에 유일한 규범이죠.

 

우리는 신화나 족보 이야기에 빠져서는 안 된다. 신화는 사실이 아닌 것, 즉 지어낸 이야기를 말한다. 신화는 그리스 신화와 철학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역사적 사건들과 사실들의 말씀들이며 신화는 허구 요 꾸며낸 이야기들입니다.

 족보는 육신적 혈통을 말합니다. 혈통도 귀한 유산일 경우도 있으나, 진리의 보존을 보장하지 못하죠. 육신적 족보로 말하면 천주교회가 사도들의 후예일지 모르지만, 진리 사상으로 말하면 천주교회는 사도들의 신앙으로부터 많이 이탈하였고 변질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적 족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른 교훈의 계보입니다.

성경의 바른 교훈을 저버리고 신화와 족보에 착념하는 자들은 믿음에 유익을 주지 않고 변론만 일으키는 자들이 됩니다. 변론은 교묘하게 꾸며내거나 변명이나 무익하고 분란을 일으키는 말만 무성한 것을 말합니다. 그런 변론은 믿음에 아무 유익이 없고 참된 믿음의 성장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5-7] 경계(파랑겔리아)[명령,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라 합니다.

‘경계의 목적은 즉 바른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는 사랑입니다. 청결한 마음이란 회개하고 죄를 씻음 받은 마음입니다. 죄가 우리 마음을 더럽혔고 지금도 더럽힌다. 선한 양심이란 바른 도덕적 분별력을 가리킵니다. 양심은 죄로 더러워져서는 안 되며 진실한 순종생활로 선하게 간직되어야 한다. 거짓 없는 믿음이란 허풍이나 부풀림, 또는 이기적 이익과 무관한 믿음을 가리킵니다.

결국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온 사랑이 참다운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랑,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영혼부터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경건함이지 만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거짓 경건이 됩니다. 경건한 자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성경말씀을 읽고 듣고 순종하기를 좋아할 뿐 아니라 이웃도 사랑하죠.

[8-11]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정당하게 사용하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는 아노라.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베벨로스)[속된](pro- fane)(KJV, NASB) 자며 아비를 치는 자(트롤로아스)[아비를 죽이는 자](patricide)와 어미를 치는 자(메트롤로아스)[어미를 죽이는 자](matricide)며 살인하는 자며 음행(Sexual Immral)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동성애자-Homo Sexuality]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인신매매자-Enslave]며 거짓말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건전한] 교훈을 거스리는[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니라.

 

율법을 잘못 해석하면  율법교사들처럼 오류에 빠질 수 있지만, 율법을 정당하게 사용하면 율법은 선한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본 의도대로 그것을 이해하고 해석하며 복음 진리에 맞게 적용한 다면, 율법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과 유익을 줍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에 우리 에게 다 유익합니하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은 의인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요 죄인을 위해 주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은 곧 죄를 깨닫게 하려고 주신 것이죠( 3:20).

 

고로 바울은 열다섯 가지의 죄악의 목록을 열거합니다: 불법한 자, 즉 율법을 거슬러 행하는 자, 복종치 않는 자, 즉 하나님께 복종치 않는 자, 경건치 않은 자 즉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자, 죄인, 거룩하지 않은 자, 망령된 자 즉 세속적인 자, 아비를 죽이는 자와 어미를 죽이는 자, 살인하는 자, 음행하는 자(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성적 관계, 간음, 간통, 성폭행), 동성애자, 인신매매자, 거짓말하는 자, 거짓 맹세하는 자,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 등입니다. 이런 죄인들은 율법을 통하여 죄를 깨닫고 죄의 형벌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야 죄인들이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율법은 의의 표준으로서 또 우리의 부족을 깨닫게 하는 수단으로서 여전히 필요하지만, 그것은 구원의 직접적 수단이거나 성화의 효력 있는 수단은 절대 아닙니다.

)12-20, 감사와 찬송과 당부

[12-14]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暴行者)[폭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불신앙 중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물론 모르고 지은 죄도 죄지만 벌칙이 가볍긴 함)

 

사도 바울은 과거에 비방하고 핍박하고 폭행했던 자였죠.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겁없이 비방했고 예수님 믿는 자들을 핍박 폭행했었죠. 그러나 그는 과거에 불신앙 중에 무지함으로 그런 악을 행한 것이었기에 비록 그 죄악이 심히 컸지만, 구주 예수께서는 죄인 바울을 불쌍히 여겨주셨고 바울이 구원을 얻었고 사도의 직분까지 받았음을 회상하며, 그런 것들이 주 예수님의 크신 은혜, 감당할 수 없는 은혜라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께서 자신을 충성되이 여겨 직분을 주신 것이라 했습니다. 그는 비록 무지함으로 믿는 이들을 핍박했지만 그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충성된 마음을 가졌었음은 분명한 것입니다.

[15] 미쁘다[믿을 만하도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전적으로 받을 만한](KJV, NASB, NIV)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우두머리]니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소식이 신실한 말씀이요 사람들이 전적으로 받을 만한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세상에 참으로 복된 소식이죠.

사도 바울은 또 자신을 “죄인 중에 우두머리라”고 덧붙여 표현했습니다. 모든 죄들이 다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지만, 특히 아들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대적하는 행위는 죄 중에도 가장 큰 죄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하심 받은 은혜에 바울은 감격해 했습니다.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내가 이 때문에 긍휼을 입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16절은 죄인들의 괴수 같은 큰 죄인조차도 주의 놀라운 긍휼을 힘입어 구원 얻었으니, 이제 어떤 죄인이라도 주의 긍휼을 입을 수 있음이 증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크고 심각한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구주 예수께로 나와 그를 믿으면 죄사함과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17] 만세의[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이다. 아멘.

사도 바울은 감사의 표현으로 이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는 하나님을 ‘왕’이라고 표현했죠. 하나님께서는 만물의 통치자시요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주권적 섭리자이십니다. 고로  그는 진정한 의미의 영원하신 왕이십니다.

 

[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아들 디모데야, 전에 네게 주었던 예언들을 따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너는 그것들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KJV, NASB, NIV).

‘그것들로’라는 말은 그가 전에 그에게 주었던 예언들이라는 뜻이죠. ‘예언들’은 하나님의 권위로 주신 교훈들과 하나님의 통치 섭리 등을 의미하기도하지만, 바울이 디모데에게 개인적으로 한 예언도 포함하였으리라고 봅니다.  

 

‘선한 싸움’은 믿음과 진리와 의를 위한 싸움이며 예수님의 교회를 위한 싸움이죠. 우리의 몸에 있는 죄성( 5:17)은 성령의 생각과 대립되며 우리가 싸워야 할 원수 중 하나입니다. 또 우리는 이 세상의 죄악된 풍조들과도 싸워야 합니다.에베소서 6:17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귀를 물리치는 힘이 있습니다( 4:4, 7, 10).

 

[19-20]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말한다. 선한 싸움은 믿음과 착한 양심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다. 그 싸움에 지면 믿음을 잃고 불신앙과 죄에 떨어집니다. 이 영적 승리는 믿음과 착한 양심을 지키는 것에서 옵니다. 영적 싸움에서의 실패자들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었습니다. 그들을 ‘사탄에게 내어주었다’는 것은 제명 출교를 가리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세계이지만, 교회 밖은 사탄이 활개치는 사탄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우리는 믿음에서 떠난 배교와 변절에 떨어지지 말아야 하고, 자신의 죄성과 사탄과 세상의 악의 풍조와 싸워 이겨야 합니다. 고로 우리는 믿음과 착한 양심을 잘 지켜야 합니다. 믿음은 양심을 포함합니다. 믿음이 양심보다 더 크고 더 바르고 더 진리적입니다. 무론 양심은 종종 잘못된 관습을 합리화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합니다. (실례; 식인종 사회에선 사람 잡아 먹기를 일반 짐승 잡아먹듯 하며 양심에 거리끼지 않으나 복음을 알고 나면 살인죄임을 알고 금하게 됩니다.)

 

특히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말씀을 앍고 배우고 묵상하고 기도함으로써 선한 싸움을 싸우며 착한 양심 안에서 성경적 신앙을 잘 지켜 내야만 합니다.

 

                                                                082322 안익선 목사/ 참조: 김효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