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모음(Korean sermons)

탄식하는 자의 시편(시편 13편 1-6절 )

호걸영웅 2023. 2. 26. 03:55

탄식하는 자의 시편(시편 13 1-6   )             

  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2.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4.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5.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1.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서론)

본문 말씀에는 기다리며 탄식하는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1,2절을 보면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 나이까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라고 합니다.

 

사실 다윗이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의 놀랍고 큰 도우심이었습니다. 이 시는 매우 다급하고 안타까운 다윗의 탄식을 잘 보여줍니다. 시편에는 모두 서른여섯 편의 <비탄시>가 나옵니다. 시편이 150편이니까 1/5이넘는 분량입니다. 제가 생각하건데 우리 인생의 1/5 이상도 힘들고 어려운 것은 아닌가? 라고 짐작해 보게되었습니다. 탄식이 담긴 시편들이라는 거죠. 본문은 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 시편의 교훈은 무엇일까요?


본론)

)절망과 슬픔에 빠진 다윗

이 시를 지을 때 다윗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 상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다윗은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나라를 건지는 큰 공을 세우고 군대 장관이 되었으며, 아울러 사울 왕의 사위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나 빠르고 놀라운 성공은 다윗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오히려 사울 왕으로 하여금 그를 경계하도록 만들게 됩니다. 백성들이 다윗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올 때,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라는 백성들의 찬양을 듣게 되자, 사울은 다윗을 장차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자로 간주했고, 결국 다윗을 죽이기로 결심하며, 수차에 걸쳐 살해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호하심 으로 번번히 무산되긴 했지만 그 때부터 다윗은 몹시 고단하고 위험한 도망자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 기간이 거의 십오 년에 이른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께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요 그런 어려운 처지를 건져 주시고자 달려오시는 하나님의 모습입 니다. 고통 받는 자신에게 어서 빨리 하나님께서 간절히 사모했던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시길 갈망했습니다. 그러나 이전과는 달리 아무리 기다려도 하나님의 얼굴(혹은 음성)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내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한다>는 고백합니다. 그는 왜 근심하고 <번민>했을까요? 다윗은 이렇게 기도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중학교 신입생 정도로 어린 나를 선택하셔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라고 하셨죠?. 들에서 양이나 치고 어머니 사랑에 깔깔거리고 좋아할 정도의 어린 그 나이에세상도 잘 모르고 물정도 모른 나를 부르셨지 않습니까? 왕이 뭔지도 전 모르지 않았습니까? 제가 먼저 왕이 되겠다고 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 저를 하나님께선 잔인하고 치열한 전쟁터 최전방을 인도하셨고 기적적인 승리를 얻게 하셨지 않습니까? 그리고 왕궁으로 인도하시고 왕의 사위가 되게 하시고 전쟁마다 승리하게 하셨잖아요? 그런데 왜 저가 권력자의 한 가운데 놓여 살해의 위험을 당하고 자객과 군대에 쫓기는 그 세월이 십 여년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또 얼마나 더 오랫동안 저는 도망을 다녀야 할까요? 제 인생은 이렇게 끝나야만 하나요? 라는 탄식이 쏟아져 나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젠 나를 잊으신 것인가? 하나님께선 당신의 얼굴을 숨기고 더는 나타나지 않으시기로 작정하셨는가? 날 버리시는 것인가?>라는 안타까 움이 다윗에 마음에 가득 차 올랐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탄식합니다. <어느 때까지니이까! 어느 때까지니이까?>란 탄식이 무려 네 번이나 이 짧은 시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요셉은 열 일곱 살 즈음에 하나님으로부터 연거푸 신령한 예언 적 꿈을 받았습니다. 두 번의 꿈의 공통점은 그가 존귀한 사람이 되어 부모와 가족들과 세상 사람들에게 절을 받는 놀라운 인물이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분명히 요셉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높여 주실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계시(하나님이 그 뜻을 나타내심)를 확신했었을 것입 니다.

그런데 현실은 꿈과는 반대인 경우가 많다고 하듯이, 그는 높아지고 존귀해지기는커녕, 목숨 만 간신히 건져 애굽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또 설상가상으로 너무도 억울하게도 강간 미수범 이란 치욕적인 죄목으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면서 십삼 년 정도가 흘렀다고 합니다. 그 십삼 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를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었을까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지켰더니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방법으로 그를 애굽의 총리 로 세우셨습니다. 요셉에게 주셨던 어린 요셉의 꿈이 성취되게 하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한 사람 중엔 모세도 있습니다. 그는 무려 사십 년 동안이나 엉겁 결에 자기 민족을 도우려하다 살인을 하고 도망자로서 아라비아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며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하였습니다. 모세가 미디안에 머무는 사십 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철저 하게 침묵하셨습니다. 단 한 번도 모세야, 십 년이나 이십 년만 여기 있어라. 그땐 쨍하고 해 뜰 날이 너에게도 돌아온단다!라고 말씀해 주신 적도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께서는 자기 민족 이스라엘을 사랑했던 모세를 마침내 찾아오십니다. 미디안 광야 생활 사십 년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는 호렙산 떨기나무 가운데에 그를 찾아오셨고, 그의 삶을 위대하게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를 불러 200만 이스라엘 민족을 노예생활에서 해방시키게 하셨습니다.

반면, 사무엘상 13장을 보면 하나님의 침묵을 도저히 견디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로 사울 왕입니다. 사울 왕이 블레셋과 전쟁을 할 때입니다. 전쟁의 형세가 불리해지자 그 때 사울의 마음이 몹시 다급했습니다. 그는 사무엘 선지자가 오길 기다렸으나, 그의 예상대로 빨리 오지 않았습니다. 다급해진 사울은 제사장이 드려야 할 제사를 자신이 드리게 되었습니다. 제사는 제사장이 드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블레셋을 앞에 두고 불안하여 견디지 못하여 하나님의 규례를 어기게 됩니다. 물론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다른 명령도 어기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실망시키고 진노하시게 만들었습니다. 사무엘상 13 8절 이하를 보겠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사울이 이르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번제 드리기를 마치자 사무엘이 온지라 사울이 나가 맞으며 문안하매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니 사울이 이르되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라고 합니다. 결국 그는 믿음을 상실하여 비참한 댓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를 기다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우리는 믿음으로 바라봐야만 합니다. 종종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에게 고통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축복이 되기 마련입니다.
물론 기다림이 쉽진 않습니다.
그렇다면 기다리게 하실 때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간절한 기도입니다. 다윗은 기다리는 동안, 마음이 답답한 그 와중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본문 3-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라며 걱정이 많았습니다. 사망의 잠을 잘까 걱정되었고, 원수가 나를 이겼다고 통쾌해 할까 걱정되었고, 대적들이 기뻐할까 더욱 걱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걱정만 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라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눈을 밝힌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믿음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의심하지 않고 그의 도우심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한다는 의미입니다.

 

스데반은 순교한 초대교회의 집사님입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옥에서 풀어주셔서 한번에 3천명 혹은 5천명도 구원하도록 하셨는데, 스데반은 왜 순교하 도록 하나님은 그냥 방치해 두셨을까? 사실 우린 누구나 다 다른 사명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총을 만드는 사람이 위험한 전쟁터에 나가 싸우진 않습니다. 군인은 총은 안 만들지만 총을 들고 나아가 피 흘리며 싸웁니다. 다 사명이 달라요. 그러나 목적은 같죠. (신발과 안경, 타이어와 핸들, 다 바르게 전진하게 합니다)

 

또 스데반이 일찍 죽은 것에 대해 탄식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영원한 하늘나라에 삶이

있는데 이 세상에 이삼십년 더 사는 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혹 우리는 스데반의 순교를 아쉬워 할진 몰라도 스데반 자신은 전혀 그렇지 않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7:에 보면,

55;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라고 했습니다.

 

55절에서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라고 했어요. 영의 눈이 밝아졌어요. 하나님과 예수께서 순교의 고통을 이기고 남도록 도우심을 보았어요. 그는 결코 그 순교의 순간이 무섭고 외롭지 않았습니다. 순교의 영광을 체험했습니다.

 

고로 요한복음 14 1절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하십니다.  베드로전서 5 7=<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 를 돌보심이라>고 하십니다. 탄식의 위기에서 여러분은 믿음의 눈을 갖게 되셔야 합니다. 결국 믿음의 눈을 가졌던 다윗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를 사울 왕의 칼에서 건지셨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죽었고, 다윗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 되었고 블레셋을 정복 하였습니다.

결론)

결론부입니다.  5,6절을 봅니다.  다윗은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주의 사랑, 주의 구원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기도 안에서 믿음의 눈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여전히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은덕을 베푸셨습니다.

 

우리도 흔들리고 탄식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럴 때 이 시 13편의 말씀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구원을 바라는 자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 십니다. 이런 믿음의 눈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변함없이 그분을 신뢰하고 온 힘을 다해  기다리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마침내 전지전능하시고 참으로 신실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을 반드시 저와 여러분께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021423 안익선 목사/참조: 기독교 멀티미디어 사역자 커뮤니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