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민수기 23장 강해 (발람의 1,2차 예언)

호걸영웅 2023. 11. 23. 04:37

민수기 23장 강해 (발람의 1,2차 예언)

 

서론)

아람이나 메소포타미아 복술가들은 7층으로 제단을( 11:4) 쌓고 사술에 의하여 접신을 하곤 했는데, 발람도 동일한 방법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만남을 두 번씩이나 시도하였고, 하나 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셔서 그들을 영원히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직접 하나님께 듣고도 어떻게 해서든지 그 뜻을 변경시켜 자신의 이익에 맞게 저주의 말을 얻어 내려고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발람은 여호와의 신의 감동으로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 이 자신의 입으로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예언을 행하게 됩니다. 1~12절은 발람의 첫 번째 예언, 13~30절은 두 번째 예언의 내용입니다.

 

본론)

)1-12, 발람의 첫 번째 예언

1: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여기 일곱 단을 쌓고 거기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발람이 이런 제단과 제물을 준비하게 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도 고대 근동에 존재하던 여러 잡신들 중의 하나로 간주하였기에, 여호와를 불러내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이런 방식을 요청했습니다.

 

2: 발락이 발람의 말대로 준비한 후에 발락과 발람이 매 단에 수송아지 하나와 수양 하나를 드리니라. 발락은 발람의 요청에 따라 제물과 제단을 준비하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3: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당신의 번제물 곁에 서소서 나는 저리로 갈지라~

발람이 여호와를 만나려는 의도에서 특별한 장소를 선택하였습니다. 그곳은 높은 곳에 위치한다는 뜻으로서 산당(영역본)이나 꼭대기(공동번역)를 의미합니다. 고지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이교의 주술가들이 점괘나 신과 접하기 위하여 사람이 없고, 전망이 좋은 산꼭대기나 황폐하고 조용한 곳을 찾았던 관습에서 나온 것입니다.

 

4: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시는지라 발람이 고하되 내가 일곱 단을 베풀고~

발람의 사술에 의하여 하나님이 호출을 당한 것이 아니라, 발락의 악한 행동을 저지시키시려고 하나님께서 스스로 나타나신 것으로 추측됩니다.

하나님은 이방의 잡신들처럼 사술이나 마술에 의해 지배되는 존재가 아니시기에, 오히려 그것들을 장악하고 지배하시는 전능하심을 드러내시고자 발람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발람의 입에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입술을 주장하셔서 선한 말이 나오도록 역사하시게 됩니다. 발람이 다시 제단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발락과 귀족들에게 노래를 지어서 말하였습니다.

 

7: 발람이 노래를 지어 가로되, 발락이 나를 아람에서 모압 왕이 동편 산에서 데려다가 이르기를~

노래는 히브리어로 ‘마솰’입니다. 단순한 노래가 시를 의미하지 않고 ‘지혜가 함축된 글’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발람이 지은 이 노래는 문체와 형태를 고찰해 보니 B.C.15세기의 작품으로 입증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이 노래는 발람의 순수한 창작이 아닌 하나님의 신탁에 의존된 작시입니다. 이 노래는 하나님의 영에 이끌리어 수동적으로  불리워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람’과 ‘동편 산’은 동일 장소입니다. 즉 발람의 고향 ‘브돌’입니다. 아람은 메소포타미아 북부 및 수리아에 살던 셈족과 그 지역을 통틀어 지칭하던 용어이며, 고대 근동 사람들 누구나가 쉽게 알 수 있는 지명이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12:12).

‘야곱’과 ‘이스라엘’ ‘저주하라’와 ‘꾸짖으라’의 단어가 각각 병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특히 꾸짖으라는 말은 원어적으로 볼 때에 ‘위협하라’는 뜻으로, 감정을 절제할 수 없을 정도로 극한 상태에서 상대방을 협박하고 무시하는 행동을 말합니다.

 

8: 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며~

이 예언은 발람만을 전적으로 의지하였던 발락의 기대와 소망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메시지입니다. 이 말 속에는 우주와 역사를 주권적으로 운행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발람 자신도 무력할 뿐이라는 체험적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9: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처할 것이라~

‘홀로 처할 것이라’와 ‘열방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는 말 역시 반복적인 평행구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독보적인 위치를 강조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발람은 하나님의 현현 사건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므로, 그들의 성별됨과 우월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30:15; 24:15; 10:21).

 

10: 야곱의 티끌을 뉘 능히 계산하며 이스라엘 사분지 일을 뉘 능히 계수할꼬~

‘야곱의 티끌’은 야곱에게 주어진 무수한 후손들을 가리킵니다. 이는 과거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주셨던 언약의 성취를 시사합니다( 28:14). ‘이스라엘 사분지 일’은 약 45만명을 말하는데( 12:27), 바람은 사면에 야영하는 이스라엘 진영 중 가장 가까운 한 진영을 가리키면서(2:1), 이러한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이 두 구절은 사실성과 문학성을 동시에 내포하는 표현으로서 이스라엘 인구 수가 많음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하나님의 큰 복을 받은 백성으로서( 1:22; 12:1-3; 9:4,5) 이스라엘 백성들의 당당 하고 위압적인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람은 이스라엘의 위엄에 압도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게 자신도 모르게 감동되어 그들을 의인이라고 칭하며, 자신도 악한 길에서 벗어나 의인의 길을 걷다가 죽기를 원한다는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믿음과 온전함으로 위엄과 당당 함을 갖고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심지어 악의 세력조차도 성도들을 바라보았을 때에 감격하여 굴복할 수 있을 정도로 신실하고, 의로운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 다.

 

11: 발락이 발람에게 이르되 그대가 어찌 내게 이같이 행하느냐 나의 원수를 저주하라고~

모압 왕 발락은 부와 명예를 발람에게 보장함으로써 이스라엘에 대한 승리를 기대하고 있었으나, 발람의 축복의 노래로 인해 그의 심경은 격노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악인의 기대는 세상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에 의하여 반드시 허무하게 끊어지고 말 것입니다.

 

12: (발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내 입에 주신 말씀을 내가 어찌 말하지 아니할 수 있으리이까.=

이 말씀은 “유의하고 경계하고 무시하며 말할 수 있겠는가?”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에 의하여 그에게 전해진 말을 조금도 바꾸지 않고 전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한 번 더 기회를 엿보자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13-30, 발람의 두 번째 예언.

13: 그들을 달리 볼 곳으로 가자.

본래 발락은 발람의 첫 복술 시도에서 역효과를 가져오자, 그 실패 원인이 지리적 위치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며, 다른 곳으로 옮겨서 이스라엘의 끝 부분만 보게 하여, 그들의 미약함을 인식시키고, 발람의 저주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상황에 따라 변화되지 않습니다.

 

14: 소빔 들로 인도하여 비스가 꼭대기(모세가 임종한 곳인 느보산과 동일하게 봄,모압 동북부에 있음)에 이르러 일곱 단을 쌓고~

‘소빔 들’은 ‘보초 서는 자들의 벌판’ ‘파숫꾼들의 벌판’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해 북동쪽에 위치한 이곳은 아바림 산맥 줄기에서 뻗어 있는 벌판으로, 그 사면이 비스가 산을 비롯한 많은 산들로 가리워져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여기에서는 이스라엘 백성 중 일부분만을 관망할 수 있으므로 발락은 발람의 새로운 주술을 기대하 면서 그곳으로 안내하였던 것입니다.

 

15: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내가 저기서 여호와를 만날 동안에 (당신은) 여기 당신의 번제물 곁에 서소서.

이번에는 발람이 ‘내가 저기서 여호와를 만날 동안에’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4,5절에서 여호와께서 임재하신 것이 자신의 주술의 효과라고 믿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자신있게 말하면서 주술을 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발람에게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입에 또 다시 말씀을 주셨습니다.

 

17: 여호와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더냐. 18: 발락이여 일어나 들을지어다.=

발람은 발락으로 하여금 일어나서 들을 자세를 취하라고 하였습니다. 즉 자신이 하는 말에 정신을 집중하여 존경을 표하여 들으라는 것입니다. 발람이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라고 합니다. 앞에서 예언한 하나님의 말씀이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변성은( 3:6; 1:17) 하나님과 사람, 즉 창조주와 피조물의 근본적 차이를 들어내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한 말씀대로 반드시 이루십니다.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이로써 발락의 음모와 여기에 동참한 발람의 주술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강하게 질책하셨습니다.

 

20: 그(하나님)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

발람은 자신의 사술의 한계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전능하심을 고백하고 있습니 다. 그 이후에는 사술을 쓰지 않았으나, 다시 이방신의 제단을 쌓았다는 점에서 그가 얼마나 자신의 우유부단하고 갈팡질팡하는 의지를 가졌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21: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기에서 야곱은 이스라엘 백성을, 허물은 그들의 사악함, 즉 우상 숭배, 불의, 거짓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스라엘에 의하여 저질러진 모든 죄악을 말합니다. 이런 것을 하나님께 서 용서하셨다고 합니다. 이미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아무런 징계나 책망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우리 모든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김을 받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음을 통해 다시는 정죄하지 않으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왕은 곧 여호와 하나님, 만왕의 왕을 뜻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있고,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외치며 찬양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22: 그 힘이 들소와 같도다=

들소는 지중해 지역에 널리 서식하였으며, 진취성, 일사불란한 단결력, 막강한 전투력을 갖춘 동물입니다. 가나안 진입을 위해 정복 사업을 펴던 이스라엘의 용맹, 위엄, 강인함을 비유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곱을 해할 수 있는 사술이나 복술은 전혀 없다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보호하는 성도들도 그 어떤 악한 세력으로도 절대로 구원을 빼앗거나 멸망시킬 수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4: 이 백성이 암사자 같이 일어나고 수사자 같이 일어나서 움킨 것을 먹으며 죽인(것의) 피를 마시기~=

이 구절은 야곱이 유다에게 유언을 남길 때에 썼던 표현( 49:9)과 비슷합니다. 이스라엘이 강성함이 더해 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렇게 발람으로부터 예언의 노래를 들은 발락은 결국 그 어떤 세력도 이스라엘을 이길 수가 없으므로 더 이상 그들을 향하여 저주도, 축복도 하지 말라는 꾸중, 혹은 책망을 발람에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발람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은 내가 그대로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지 아니하더이까.’라고 대답하며 책임을 지길 거부 했습니다.

 

)27-30, 발락이 발람을 또 다른 곳으로 데려가서 세 번째 제단을 쌓고 저주하게 하려는 시도의 시작 부분입니다.

 

27: 내가 너를 다른 곳으로 인도하리니 네가 거기서 나를 위하여 그들을 저주하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는 발락은 또 다시 다른 장소를 택하여서라도 발람으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고집으로 망한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죄인들이 지옥가는 이유 중 하나가 고집입니다. 마음이 흔들릴 때도 있지만 다시 원래 자기 고집으로 돌아 가기 때문입니다.

 

발락은 다시금 발락을 모압의 최북단인‘브올 산 꼭대기’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곳은 아바림 산맥에서 제일 높은 산입니다. 이곳에서는 이스라엘이 진치고 있는 모압 평지를 가까이서 마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진이 다 보이진 않는 곳이긴 합니다. 그들은 결국 또 단을 쌓고 제사를 준비합니다. 그 결과는 24장에서 확인할 수 있겠습니다.

 

결론)

하나님의 뜻하심과 약속을 바꾸려는 시도는 무익합니다. 인간적인 어떤 방법도 효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높여드리며 하나님만을 경외해야 합니다. 그것이 만복을 받아 누리는 지름길입니다.

 

110923 안익선 목사 / 참조: 행함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