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1 장 강해(이방인에게 전도의 문을 연 초대교회)
서론)
오늘 행 11장은 고넬료의 집이 구원 받은 사건 이후, 예루살렘 교회가 뒤집어지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구태의연하게 유대인들에게 주로 복음을 전하던 사도들이 이제 바야흐로 하나님께서 이방전도의 문을 활짝 여시는 시점을 맞았음을 실감케 되고, 그들이 이방인들에게 더욱 적극적으로 다가 가기 시작하는 전환점을 맞이 한 장, 곧 11장이 됩니다.
본론)
가)유대적 사고에 얽매인 초대교회 유대인들( 1 ~ 18절)
1) 유대인 기독교인들의 구태의연한 사고 방식
그 동안의 행전 공부를 잠시 복습해 보면…… 1~7장에서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주로 전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 다. 당시 복음을 들은 사람들을 나타내는 무리들에 대한 표현들 중에, 행 2장은 ‘유대인’ 또는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 등으로 말합니다. 8장에서는 사마리아 지역에서 복음을 들은 사람을 나타내는 표현이 14절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라고 했습니다.
8:27절부터 드디어 유대인이 아닌 다른 민족, 다른 나라 사람 에게도 복음이 전해질 때, 빌립과 만나 내시에 대해 ‘에디오피아 사람’이라고 소개하였고, (8:27), 10:1에는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라고 소개해 줍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나는 첫 장면 10:28에 ‘유대인과 이방인’, 11:2, 3절에 ‘할례자와 무할례자’라는 대립적이고 비평등한 비교적 상황이 등장합니다.
고로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고넬료의 집에 가라고 말씀하기 전까지는 베드로뿐만 아니라 초기 교회의 모든 사도들이 이방인에게 복음 전하는 것은 고사하고 함께 어울리는 것도 함께 밥 먹는 것도 전혀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즉 구태의연함이 사로잡힌 예루살렘 교회를 발견하게 됩니다.
2. 하나님의 은혜
베드로를 포함한 할례 받은 성도들은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 교인들을 상종하고 싶지 않아 했고, 복음을 간절히 전하고 싶어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방인들 입장에서 보면, 지독히 배타적인 설교를 했고, 복음과 완전히 다른 설교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자기들이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신자들과 베드로가 모두 다 놀랬는데, 베드로가 가장 놀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아무 말하지 않았고, 베드로는 설교한 당사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말할 때에 성령이 임하셨기에 고넬료나 고넬료의 집에 함께 있던 사람들은 베드로가 배타적 설교를 했는지를 전혀 인식하지 못합니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여 하나님의 성령이 임할 줄로 알았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의도를 훨씬 앞질러 가신 것입니다.
3. 모두에게 같은 선물을 주신 하나님
하나님의 일하심과 대조되는 유대인 교인들의 반응이 11:1절에 비난 섞인 상황으로 나타납니다. 이때 베드로는 기도 중에 나타난 환상사건, 성령이 나타나서 하신 말씀(12절), 그리고 동일 시간에 고넬료가 보낸 사람이 와서 전한 말들(13, 14절), 그리고 성령이 임한 사건(15절) 등을 설명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런 과정을 거쳐서 일하시지 않았다면 베드로는 다른 유대교에서 개종한 사람들처럼 비난자들의 대열 서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15~17절에 계속하여 하나님이 하신 일만 강조하며 하나님의 계시로 이 일이 이루어 졌음을 증거합니다.
나)이방인들에게 마침내 활짝 열린 전도의 문(행 11:19-30절)
1) 예루살렘 교회의 당시 상황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의 주 활동 지역은 원래는 예루살렘이 아니었습니다. 출생은 베들레헴, 유아기는 애굽, 소년기는 나사렛에서 보내셨고, 사역의 대부분은 북부 갈릴리를 중심으로 행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은 절기에 맞추어 방문하는 정도였고, 방문할 때마다 성전에 가셔서 약간의 소란 을 일으키시는 등 예사롭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 예루살렘이 핵심지역으로 등장하는 것은 사도행전 때부터입니다. 행1:4절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지역적으로 ‘예루살렘’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8절에서는 ‘성령을 받으면 땅 끝까지 가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초기 교회에 스데반 사건이 발생했고, 지역적 상황도 변화가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8:2절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의 상황이 발생합니다. 박해가 있어 사람들이 흩어졌 는데, 유독 사도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이외의 지역에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은 사도들이 아니었습니다.
14절은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라며, 새로운 복음의 확장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25절에 따르면 사도들은 사마리아 출장을 계기로 지역적 확장을 계속 한 것이 아니 라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고, 베드로도 고넬료가 머물고 있는 가이사랴에 왔다가 결국은 11:2절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이때에도 예루살렘은 11:1절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적극적으로 전파해야 할 예루살렘과 사도들이 다른 지역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만’ 있는 수동적 상황을 지내고 있었습니다.
2) 유대적 사고의 한계에 갇혔던 초대교회
사도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은 단순히 예루살렘이라는 지역을 고수했다는
것보다는…… 다른 표현으로 하면 사도들의 생각이 ‘유대적 사고’에 갇혀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사도행전이 1장부터 10장까지 전개되는 동안 주로 지역을 중심으로 전도가 이루졌습니다. 그래서 어느 지역에 복음이 전해지든 ‘이방인’이라는 표현은 없습니다. 사도들의 복음 전하는 대상에 지역이 다소 바뀌더라도 이방인은 아예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울을 부르시면서 드디어 지역이 아닌 대상이 등장합니다.
9:15절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하십니다.
결정적 전환점이 본문 11장 19절입니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페니키아-두로외 시돈을 포함한 지중해변 북부 지역, 알파벳의 태동지)와 구브로(키프러스 섬, 길이225키로미터 넓이 100 키로미터 정도의 지중해 동부에 있는 큰 섬)와 안디옥(시라이 안디옥임)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오늘날 리비아 북부 해안 지역, 아프리카 북부임)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라는 부분입니다.
이때까지도 복음이 유대인에게만 전해졌고, 사도들이 아닌 사람들, 유대나 예루살렘 출신이 아닌 사람들 구브로와 구레네 출신 사람들, 즉 헬라인에게도 주 예수를 전파했다는 것입니 다.
이때에도 예루살렘 교회은 뭘하고 있었을까요? 본문22절 =“예루살렘 교회기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라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계속 듣는 일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3)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일하심
자세히 사도행전을 보면, 본 행전은 사도나 제자들은 배타적 집단으로 매도하고 집사나 일반 성도들을 마치 선구자적인 인물로 높이려는 의도는 물론 전혀 없었습니다.
물론 행 6장에서 사도들은 복음 전파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는데, 집사들은 예루살렘의 영역을 벗어나 유대와 사마리아까지 복음을 확장시켰다는 것이 핵심이 아닙니다. 핵심적 내용은 사도와 집사를 대조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다”라는 내용입니다.
11:19. 20절에도 어떤 사람들은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했는데,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였습니다. 성경이 이 사람들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라, 21절의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 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이 강조됩니다.
4)결과적으로 주께 돌아오더라의 상황을 맞음.
21절은 앞부분에서는 ‘하나님이 하셨다’고 강조하고 뒷부분에는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의 핵심이 결국 구원입니다. 인간들이 죄인이
되었기에 죄인 된 인간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내용 전체가 인간이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고, 복음서도 예수께서 전적인 은혜로 구원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구원사역이 실제로 인간들에게 적용되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신다 또는 하나님이 구원하셨다’는 것을 사도행전에서는 ‘주를 믿는다, 주께로 돌아온다, 성령을 받았다’고 표현하였습니다. 2:47, 4;4, 5:14, 6:7 8:12, 9:35, 11:2절 등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람들이 믿었다, 돌아왔다는 표현들이 있을 때마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신 사역이 전제되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감화감동하시지 않으면 죄인들을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누가 전했느냐’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복음을 전하든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야 결과가 나타날 수 있는 것이고, 복음이 전해진 결과는 ‘주께로 돌아오는 것’ 즉 구원의 사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인간이 구원받았다는 것은 인간이 ‘죄의 소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속’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인간이 ‘죄의 속성과 성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갖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자들이 ‘죄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의 열매 또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죄인되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소속이 되고,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갖고, 하나님의 가치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원리로 행동하고 하나님의 열매를 맺으면? 그 결과 가장 이익을 보는 것은 바로 인간들입니다. 인간들의 삶이 기쁘고 즐겁고 신나고 자유롭고 평화롭고 안식하고 행복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결과는 인간의 행복입니다.
결론)
사도행전의 핵심은 악하고 무지한 인간들이 변화하는 것입니다. 죄인에서 성도가 된 것, 그래서 원래의 악한 인간으로서의 죄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으로 생각의 방향이 바뀐 것, 그래서 성도가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성취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대표적 인물들이 바로 베드로와 사도 바울(사울)입니다. 고넬료 사건은 이방인 고넬료의 개종사건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유대인 베드로의 개심사건? 이기도 합니다. 이 사건 이후에 드디어 복음이 배타성을 극복하고 유대인을 넘어 헬라인에게와 모든 이방인들에게도 힘차게 전해져, 세계 선교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070924 안익선 목사/ 참조:누림성경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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