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6장 강해(아그립바 왕에게 복음을 전한 바울)
서론)
예수님께서는 지상사역 가운데 제자들에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게 될 것”(마 10:18)이라고 예언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바울이 동일한 사명의 예언을 받았으니, 바울은 이런 예언의 성취자가 되어, 로마에서 보낸 총독 벨릭스와 총독 베스도, 그리고 이제 아그립바 왕에게까지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본론)
가)바울의 설교(1-23절)
아그립바 왕이 바울이 변론하여 말하기를 허락함으로써, 바울의 변론적이고 간증적인 설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바울의 설교가 당시 1세기 경의 변론의 표준적인 패턴을 따랐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서론, 즉 왕에 대한 서론적인 언급(2-3)으로 시작해, 서술, 곧 사건에 대한 이야기(4-18)를 진술합니다. 이어 논증, 즉 사건에 대한 증거(19-23)로 마무리된 형식입니다.
먼저 바울은 서론을 통해 아주 정중한 어조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이 자신을 고소하는 일에 대하여,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변론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긴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아그립바가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말을 너그럽게 들어달라고 부탁하며 변론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서술 부분에서 바울 자신의 간증을 담고 있습니다. 그의 간증은 자신의 기독교 이전의 활동과 회심, 그리고 자신이 전도자의 삶을 살게 된 소명에 대해 말합니다.
바울은 먼저 유대인들이 자신의 성장과 생활을 모두 잘 알고 있다고 말한 후, 자신이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엄격한 배경을 증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은 유대 백성들의 (신앙적) 소망에 관한 것 때문이라고 말하며, 청중들 역시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고로 자신이 유대 백성들의 소망, 즉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에 심문을 받는 것이므로 이것은 로마에 대한 반항이나 적대적인 행위가 아니며, 정치적인 문제일 수도 없음을 변론했습니다.
바울은 지금 자기를 반대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하는 것처럼 예전의 자신도 기독교에 대한 동일한 핍박을 가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때, 곧 자신이 복음을 반대하고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던 때의 포악함에 대해 생생히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의 권한을 받아 기독교인들을 기소했던 사람이었고, 기독교인들을 죽이려고 할 때, 찬성하는 표를 던졌던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는 타국의 도시들에까지 가서 박해를 가하던 열정적인 인물이었다고 스스로를 증언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바울도 회심을 하고 거룩한 소명의 길을 걷게 됬음을 고백합니다. 박해를 위해 다메섹으로 향해 가던 바울에게 죽었다고 생각했던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는데,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처벌하기 위해 가는 길에서 도리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기회가 되었다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증거했습니다.
[(14-18)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라고 했습니다.
고로 이 만남은 바울의 생애에 절대적인 전환점이 되었고 살아 계신 예수님이 자신을 찾아와 주셨고 자신의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변론을 함으로써, 이는 빌라도에 의해 죽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확실한 증거요, 자신이 그 일의 증인임을 말한 것입니다. 이는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논증을 통해서 자신의 경험이 완전한 증거임을 재차 확인하고, 지우려해도 지워지지 않은 확실한 경험으로 인해 자신은 결코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심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까지 빛을 전하는 것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심지어 그는 자신을 심문하는 아그립바와 베스도 앞에 서 있는 지금도 복음을 증거하게 되었다 -라고 했습니다.
나)설교의 결과(24-32절)
바울의 설교는 유대 신앙을 거의 알지 못했던 베스도에게는 너무 황당한 이야기였습니다. 바울의 학식이 뛰어남을 전해 들은 바 있던 그는 그의 많은 학식이 그를 미치게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에 대해서도 참되고 온전한 말을 했다고 답변했습니다.
바울이 베스도보다는 아그립바 왕에게 한 설교였기에 베스도는 그 내용을 얼른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 아그립바는 바울의 설교 내용을 너무나도 잘 이해했을 것입니다. 고로 바울은 아그립바에게 한 번 더 적극적으로 그의 유대 신앙에 도전하게 됩니다.
[(26-27)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일련의 사건들이 한쪽 구석에서 행해진 것이 아니고 소문이 떠들썩 했던 사건들이기에, 아그립바가 모를 리 없다고 말하며, 선지자들이 말한 것이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일이라며 믿어주기를 바라며 말했습니다.
아그립바는 비교적 유대 성경을 밝히 아는 자였기에, 바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바울이 말하는 것을 연관지을 수는 없었습니다. 즉 바울이 말하는 기독교를 인정하기에는 부담이 많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결정으로 기독교에 대한 어떤 결정이 내리기엔 그의 신앙은 부족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엄연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아그립바는 대답을 회피했습니다. 교묘히 답변을 회피하는 아그립바를 향해 바울은 마지막 메시지를 전합니다.
[(29)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아그립바를 향한 마지막 메시지, 그 뿐 아니라, 자신의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다 자신과 같이 되기를, 즉 예수를 믿어 모두가 다 구원에 이르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심문을 받기 위해 죄수의 자리에 선 바울은 오히려 당당했으나, 그를 심문하는 아그립바는 오히려 주눅이 들어있는 듯이 여겨집니다.
피고인으로서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고, 담대하게 말씀을 전하는 바울의 마지막 메시지는 자신의 사명이자 소망이었기에…… 그 말씀을 전함에 있어, 한치의 물러섬이나 거침이 없었습니다.
바울의 마지막 메시지를 끝으로 모든 심문은 끝나게 되었고, 이제 최종 판결만이 남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베스도와 버니게(아그립바 왕의 누이), 그리고 함께 있던 사람들은 모두 별도의 장소로 이동하였고 의견을 하나로 모으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에 대하여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라며 실제적인 판결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그립바 역시 동일한 의견을 내었습니다. “이 사람이 만일 황제에게 상소되지 않았더라면 석방이 되야 했으리라…”고요. 이로써 바울이 죄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황제에게 상소한 이유 하나로 재판을 받으러 로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결론)
결국 바울의 고난은 이유 없는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이유 없는 고난은 바울의 마지막 메시지,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곧 복음을 전하는 하나의 씨앗이 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의 무고와 그의 열심은 그를 심문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자극이 되었을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무고와 고난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 준 것과 같이 사람들에게 큰 의미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이후 베스도와 아그립바가 회심한 것에 대해서 밝히지는 않았지만, 바울의 학식과 메시지에 큰 관심을 갖고 회심하게 되는 기회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또한 더 큰 그림에서 이 이유 없는 고난을 되새겨 볼 때, 이를 통해 바울은 로마를 향한 첫걸음을 떼게 되었습니다. 당시 세계의 중심인 로마를 향해 바울이 발을 옮기고, 그곳에서 복음의 사역이 이어지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큰 계획이 차근차근 전진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유 없는 고난은 없습니다. 이유 모르는 고난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혹은 이유모를 고난으로 우리의 삶이 답답하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안에 살아 간다면, 그 이유를 알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102224 안익선 목사 / 참조: 정인철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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