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한 복음 5장 강해 (1/2부, 1~15절)

호걸영웅 2025. 2. 23. 05:31

요한 복음 5장 강해 (1/2, 1~15)

 

 서론)

세상을 한번 둘러보면, 여러가지 질병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 니다. 특히 예수를 믿은 분 들 주에도 이런 많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경우를 볼 때마다,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신데. 이런 사람들 살리는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실까? 아니면 안하시는 걸까, 혹은 못하시는 걸까? 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병든 사람들, 지쳐있는 사람들, 장애가 있는 사람들, 또 경제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 정말 궁지로 몰려서 도움이 간절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정말 이 사람들 싹 고쳐주시고, 문제도 다 해결해 주시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물질적 축복도 주시고, 또 병들어 있는 사람들은 기도하면 바로 기적같이 질병이 치유되고, 또 사람들과 관계에서 문제가 있는 사람에게는 주변사람들의 마음을 다 변화시켜 주시면 하나님을 믿거나 구원받는 사람도 엄청 쉽게 마구 마구 늘어날 텐데..라고 생각되기도 하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시는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기적은 절대 자주 일어나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만으로 하나님을 평가하긴 아직 이르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 5장을 통하여 하나님의 기적을 맛본 38년 된 병자의 이야기를 통해 몇몇 교훈을 배워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론)

)베데스다에서의 기적(1~4)

 베데스다란 옛날 예루살렘 성전의 양문(양의 문, 예루살렘 성의 8개의 문 중 동편에 있는 문의 하나, 스데반 문, 사자문, 황금문, 베냐민 문 등의 다른  이름이 있음)이라는 곳 옆에 있던 작은 연못의 이름입 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었습니다. (2).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는 “은혜의 집, 자비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성경 본문의 “베데스 다라 하는 못”이란 말을 전체로 번역하면, “은혜의 집이라고 불리는 연못”입니다.

이 베데스다 연못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 가는 양의 문; 근처에 있었습니다

 

양문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성전 안으로 들여보내는 문이었습니다.

양은 대속물, 즉 죄의 사함을 상징하는 제물입니다. 또한 베데스다 연못은 은혜의 집이라 불리는 몸을 씻는 연못이라고 하였고 몸을 씻는다는 것 자체가 더러움을 씻어냄을 상징합니다.

양문이나 베데스다 연못이나 둘 다 죄의 씻음, 죄의 사함과 관련된 장소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병자들이 병을 고쳐보고자 엄청나게 많이 모여 있었지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뭘 믿었냐 하면 그 잔잔한 연못에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앉으면  물이 요동친다는 것이고 그때 재빠르게 가장 먼저 연못에 들어가면 병이 낫는다는 믿음이 있었어요. 그럼 이런 믿음이 과연 미신이냐? 대개는 미신에 가까운 이야기지만 실제로 낫는 경우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 가장 먼저 들어가야 낫는다는 게, 일등을 무지하게 좋아하는 보통 사람들의 정서에 맞을 지는 모르나, 어쨌든 하나님의 구원 방식과는 전혀 상관없다고 봐야 합니다.

이런 논리적 주장은 장터에서 농장에 일군을 구하던 농장 주인이야기를 생각할 때 이해가 되리라고 봅니다.  하여간 거기 베데스다 연못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몸만 병든게 아니라 믿음도 병들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베데스다에 오신 예수님(5~ 13 )

바로 이곳, 많은 사람들이 육신적으로나 영적으로 병들어 있는 그곳에 예수님이 나타나십니다.

 

이 병자는 38년 동안 아팠으니 참으로 오랜시간 고통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더욱이 이 병자의 병을 표현한 헬라어 “아스데네이야”는 불의의 사고등으로 갑자기 생긴 병을 표현하기 보다는, 서서히 몸에 힘이 없어지고 움직일 수 없게 되어 죽음ㅇ에 이르는 병을 표현할 때 쓰는 단어라고 합니다.

, 이런 희망 없는 자를 예수님이 만나 주십니다. 그리고 그 병자를 보자마자 예수님은 그가 누구이고 왜 아픈지, 지금 현재 무엇을 믿는지에 대해 정확하게 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6)

 

오랫 동안 병든 사람한테 “낫고 싶으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병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몸이 불편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낫고 싶은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왜 이런 당연한 질문을 하셨을까요?

 

사실 이 질문은 그렇게 간단한 질문이 아닙니다.

원어의 뜻과 마태복음 928절에서 눈먼 자들을 치유하실 때의 말씀을 연관해서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이 이렇게 질문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내가 너를 치유할수 있다는것을 믿느냐?.

둘째로, 지금 당장 너의 죄에서 돌아설 준비가 되어있느냐, 너의 치유는 모든 것을 끊어낼 만큼 그토록 간절하냐? 라는 질문이라고 합니다.

 

이 엄청난 질문 앞에 이 병자는 뭐라고 대답합니까?

물이 움직일 때, 천사가 와서 물이 움직일 때, 내가 제일 먼저 들어가야 하는데.. 내 몸이 안움직여서, 누가 도와줘야 하는데…… 아무도 안도와 줘요, 저 좀 도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라고 합니다.

 

그런데 8=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병자에게 도와주겠다는 의미 이상의 명령을 하십니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더 이상 주저앉아 있지 말고, 더 이상 무기력하게 있지 말고, 더이상 아프지 말고, 더 이상 좌절하지 말고 일어나라! 나를 믿고 일어나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또 네 자리를 들어라. 그리고 가지고 가라! 하십니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이 병자는 아마도 돗자리나 양가죽 깔개 같은 것을 깔고 눕혀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병자의 자리는 이 사람의 가난과, 병과, 나약함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 병자는 바로 이 자리, 즉 연약함의 상징인 이 침구에서 꼼짝도 못하고 잡혀 있듯이 누워 있었겠지요.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이제는 그 자리를 들어 옮겨라! 너의 연약함을 이제는 네가 직접 들어 치워버려라!는 의미입니다.

 

끝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걸어가라. 계속해서, 멈추지 말고!

우리의 믿음의 여정은 어느날 한번 반짝 감동으로 믿고 끝나는 일회성이 아니고 우리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날마다 불신의 세상이나 죄성과 싸워 이겨가면서 꾸준하게, 쉬지 않고 걸어가야 할 긴 여정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그런 의미의 말씀을 하셨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순종했더니! 그 순간 그 병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요?

38년 동안, 아주 오랫동안 한번도 느끼지 못한, 뼈 마디마디에 힘이 들어가고, 몸을 짓누르 던 근육의 무력함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병자는 즉시 일어나서 땀과 먼지와 때에 쩔어 묵직하기만 한 깔개 자리를 들었더니…… 가뿐히 들어 올려지는 것이 아닙니까? 병이 나았어요. 그런데 자기를 고친 그가 누구기에 이런 기적을 일으켰을 까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어느 덧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꿈인가 생시인가? 놀랍게도 생시(현실)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났으면 그저 훈훈할 이 이야기일 뿐이었겠죠.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 라는 말이 있듯이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이 날은 안식일이니…” (9, 16절 이하)라 했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독하도록 철저하게 지키도록 매우 까다로운 조항들을 만들었어요.  물론 출애굽기 2010=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 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하셨지만 노동도 아닌 것도 노동인양 법규를 만들어 사람들을 통제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병자가 자기 침구를 들고 걸어 갔으니까, 유대인의 눈으로는 이 사람이 지금 안식일날 이사를 가는? 것 같은 엄청난 죄를 저지른 겁니다. 병이 낫자마자 엄청난 죄를 저지른 거죠. (당시 유대교인들의 관점에서?)

 

우리 생각에는 에이 뭐 그래도 38년이나 된 병이 나은게 중요하지. 안식일 좀 어긴 것이 대수냐? ……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건 그 당시 안식일을 어긴 사람이 받는 벌을 전혀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당시에 유대인 사회에서 안식일을 어긴 자가 받는 벌은 참수 또는 돌에 맞아 죽는 것이었습니다. 병이 낳으면 뭐합니까 바로 죽게 생겼는데....유대교인들이 협박을 하니까 이 병자가 뭐라 했지요? “몰라요 누가 시켰어요, 제 병을 고쳐준 분이 시켜서 그랬는데요. 그 사람이 누구신지는 저도 도통 몰라요.”라고 합니다.

 

이 병자는 책임을 회피하고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지요. 그는 그 후에 성전에 올라갔다가 전에 자기를 고쳐 주신 분(예수님)을 딱 만납니다. 그리고 자신을 고쳐준 분이 예수님이

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과 재회한 병자( 14~18 )

세상이 좁으니 예루살렘도 좁았습니다. 예수님과 고침 받은 병자가 성전에서 딱 만났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 사람에게 뭐라 하셨습니까?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4)하십니다.

 

물론 그가 죄로 인해 38년을 앓긴 했음은 분명하긴 하지만 더는 그런 병 이상의 병을 앓지 말기를 예수께서 권면하십니다. 물론 육체의 병도 무섭지만 하지만더 무서운 병도 잇습니다. 그렇다면 더 심한 것, 38년이나 움직이지 못한 병보다 더 심한 병은 무엇일까요? 영적인 병, 사망과 멸망에 임하게 하는 병을 포함해 말씀하신 듯합니다.

 

자 이쯤 되면 이 병자는 어떻게 하는 게 맞는 태도일까요? 여러분이 이 병자였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여! 어찌하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고, 더 심한 병, 영원한 죽음을 면하겠나이까? 라는 질문을 하는 것이 정답이죠, 아니 그의 남은 한 평생의 숙제일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당장 무조건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겠죠? 제가 믿기는 . 그는 예수님과 함께 함으로써 거룩한 삶을 살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결론)

 오늘 말씀 중 가장 감사해야 할 일이 있다면? 예수님이 병자에게 스스로 찾아오신 은혜입니다. 영원히 지옥 갈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우리(전적으로 무능하고 구원받을 만한 선함이 없었던……)를 찾아오셨습니다. 즉 임마누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서 가장 좋았던 것은 무엇입니까?

기적을 경험하는 것, 병 고침?  물질적 풍요? 유명해지고 폼 나고 멋있어지는 것? 지혜로워지는 것? 사실 이런 것들은 가장 좋은 것이 아닙니다. 좀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조문도 석사가의란 말이 있듯이..예수를 만나면 진리되신 예수님의 그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 영원한 생명이 되고, 내가 그 생명으 로 인해 선한 싸움을 싸워 이기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38년된 병을 고침 받는 것도 너무 나도 놀랍고 놀랍지만 예수를 알고 믿는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와 같은 은혜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만날 때, 얻을 수 있는 가장 크고 진정한 축복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을 감사하십시오. 그것보다 더 큰 기적은 없습니다. 그 생명보다 더 값진 것은 없습니다. 하박국의 고백이 우리의 신앙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1.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2.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3 )

이제는 그리스도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십시다. 그리하면 여러분의 모든 필요를 예수께서 다 채워 주실 것입니다.

 

021825 안익서 목사 / 참고: 이인엽 목사(좋은 친구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