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글 모음

수도원의 성자 안토니우스에 대하여

호걸영웅 2012. 2. 26. 00:30

교과목명 : 4-5세기 교부들의영성과 신학 제출일 : 20101101

담당교수 : 염창선 박사님 제출자 : 이흥재 (Th. D. 3차 역사신학)

성 안토니우스 (A.D. 251-356)

이젠하임제단에 있는 성 안토니우스 부조중 얼굴 부분

비옥한 땅 나눠주고 은둔자로 완전한 삶

부유한 생활중 문득 찾아온 부모의 죽음

모든 소유물 떨치고 수도자의 외길 출발

마귀와의 싸움서 당당한 영적승리 쟁취

우리가 사막교부 안토니우스의 삶과 영성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4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우스가 저술한안토니우스의 생애를 반드시 참고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안토니우스에 관련된 거의 모든 기록이 일차적으로 이 책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아타나시우스가 콘스탄티우스의 박해를 피해 도망을 다니던 기간에 기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략 356년부터 시작된 그의 도주 생활은 거의 6년간이나 지속되었는데, 안토니우스의 생애를 집필한 것은 356~358년 사이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그는 이집트 사막의 수도사들의 도움을 받아 은신하며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험은 그가 사막교부들, 특히 안토니우스에 대한 자료를 충분히 수집하고 정리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저술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위대한 고전의 반열에 자리 잡았으며, 위대한 성자의 일생을 다루는 새로운 기독교 문학 장르를 개척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비록 이 전에도 신앙의 위인들을 다룬 작품들이 저술되기는 했지만안토니우스의 생애만큼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영향력을 끼친 작품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작품은 안토니우스라는 한 인물에 대한 기독교 세계의 광범위한 주목을 이끌어냄은 물론, 이집트의 사막교부들 및 그들의 수도생활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는점, 그리고 사막교부를 다룬 문학의 시초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1) 생애

아타나시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인이었으며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부모를 따라 기독교인으로 자랐으며 나일강 유역의 한 마을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십대 후반의 나이에 부모를 여의게 된 그는 부모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로 가던 중 그는 초대교회 교인들 중 재물을 가진 사람들이궁핍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도록 사도들에게 자신들의 재산을 가져와 모두 바쳤던일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에 들어가서는 예수께서 부자 청년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19:21) 하신 복음서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 순간 그 말씀이 안토니우스의 마음을 울렸다. 그는 복음서의 부자청년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 이후로 안토니우스는 자신이 물려받은 땅과 물건들을 팔아서 수익의 대부분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여분의 수익을 여동생에게 주고서 동생을 덕망이 높은 수녀들에게 데려가 길러달라고 맡겼다.

모든 것을 포기한 안토니우스는 고독한 삶을 연습하기 위해 마을 근처를 다니며 훌륭한 수도사들을 만나 그들로부터 수도생활의 덕을 배워나갔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아타나시우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이집트에는 수도원이 많지 않았으며, 어느 수도사도 저 위대한 사막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늘 깨어 있고 싶었던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고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고립된 채 수도생활을 했다.

우리는 여기서 안토니우스 이전에도 이미 은둔하며 금욕적 수도생활을 했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대부분 마을이나 도시 인근에 머물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안토니우스가 은둔 독수도사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 될 수 있었던 주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깊은 사막 한가운데로 들어가 수도생활을 했다는 데에 있다. 안토니우스 이전에 수도생활을 했던 사람들이 대개 마을의 가장자리에 은신처를 마련했던 반면, 안토니우스는 점점 더 깊은 광야 속으로 스스로 찾아들어갔다. 처음으로 집을 떠났을 때에는 마을 근처에서, 다음에는 마을 인근의 버려진 무덤에서, 다음에는 사막의 높은 산 위에 있는 허물어진 요새에서, 마지막으로는 테바이다인근의 산속에서 절대적인 독수 생활을 하였다. 안토니우스가 본격적으로 사막으로 들어가 수도생활을 시작한 시기는 대략 285년경인데, 이후로 안토니우스는 20여 년간 나일강 근처의 피스피르(Pispir, 오늘날의 Dayr-al-Maymun) 산 위에 있는 버려진 요새에서 독거하면서 수도생활에 힘썼다. 이 당시 안토니우스의 모습에 대해 아타나시우스는 거의 이십년 동안을 그는 이런 식으로 혼자서 수도생활을 추구하며 지냈다. 그는 함부로 밖에 나오지 않았고 아주 가끔씩 사람들 눈에 비쳤다.”라고 기술했다.

이십년간의 수도생활 후 안토니우스는 이전보다 훨씬 깊은 영성에 이르렀으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여러 가지 은사도 허락하셨다. 또한 안토니우스의 설교와 가르침에 감명을 받아 수도생활에 입문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그는 군중을 보았을 때 화를 내지도 않았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달려와 자신을 껴안는 것에 우쭐해지지도 않았다. 그는 이성의 인도를 받는 사람처럼 완전한 평정을 유지했으며 본성을 따르는 데 흔들림이 없었다. 그를 통해서 주님은 그 자리에 모인 자들 중에 몸이 아파 고생하는 많은 사람들을 치유하셨고, 몇 사람들에게서는 마귀들을 몰아내셨으며 안토니우스에게는 말의 은사를 주셨다. . . . 그는 그들에게 앞으로 있을 좋은 일과 우리를 사로잡은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새기도록 촉구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은둔의 삶을 시작하도록 권유하였다. 그래서 그때부터 산속에는 수도원들이 생겨났고 자신의 친지를 떠나 하늘나라의 시민이 되기로 작정한 수도사들에 의해 사막은 도시를 이루었다. . . . 정기적인 대화를 통해 그는 이미 수도사가 된 많은 사람들의 결의를 격려했고, 남은 대부분의 사람들도 감동시켜 수도생활을 위한 열망을 품게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설교에 영향을 받고 수많은 수도원들이 생겨났으며 그는 아버지처럼 그들 모두를 인도했다.

살펴본 바와 같이 아타나시우스에 의하면 안토니우스가 오로지 사막에서만 머물며 세속 및 타인들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은둔 수도사로 독거하면서 내적인 훈련에 몰두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통해 영적인 스승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안토니우스가 보다 깊은 수도를 위해 말년에 홍해 근처의 깊은 산으로 이동한 후에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안토니우스를 찾아왔다. 귀신들린 자녀를 둔 아버지, 병자들, 재판관들이 안토니우스를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였으며, 그의 말년에는 높은 교육을 받은 주교들이 그에게 자문을 구하고, 황제들이 조언을 구하며 편지를 보낼 정도의 인기와 신망을 얻게 되었다. 안토니우스는 그의 생애 마지막 10년을 제자들과 함께 지냈다. 그는 친구였던 아타나시우스 주교와 세라피온 주교에게 자신의 옷을 나누어 주고, 자신이 묻힌 곳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겠다는 그들의 약속을 받고 나서 356117, 10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안토니우스가(왼쪽)테베의 은둔자 파울루스를 찾아가 지혜를 얻고 있다.

프랑스 콜마에 있는 아젠하임제단화. 그뤼네발트작. 1517

) 영성

우리는안토니우스의 생애를 통해 기독교 수도원 영성의 기초가 되는 몇 가지 중요한 가르침들을 접할 수 있다.

첫째, 우리는 안토니우스로부터 자신을 포기하고 비우는 영성을 배울 수 있다. 이것은 곧 순교자의 영성과 연결되는 것이다. 사실 안토니우스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많은 유산으로 얼마든지 풍족하고 안락하게 살 수 있었다. 물질적 부를 누리는 동시에 신앙생활도 적당히 하며 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토니우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좋은 조건들을 포기했다. 그 대신 완전한 고독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현존으로만 자신을 채우고자 하였다. 그래서 결국 안토니우스가 찾아 들어간 곳은 사막이었다. 사막에서의 삶은 철저한 고독과 세상에 대한 포기를 의미한다. 전통적으로 수도원 영성이 가지고 있는 은둔적 이미지, 청빈의 이미지 등은 이와 같이 세상에 대해 자기를 포기하고 부인하는 자세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세상에 대한 포기는 자기와의 싸움이다. 곧 내면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유혹과 충동, 인간적인 욕망과 생각에 대한 싸움이라 할 수 있다. 사막교부들의 금언집에서 이러한 싸움은 종종 마귀와의 싸움으로 간주되곤 하는데 아타나시우스는안토니우스의 생애에서 이러한 점을 잘 포착하고 있다. 마귀는 세상의 기쁨을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수도생활을 시작하려는 젊은 안토니우스의 결심을 흐트러뜨리기 위해 그의 내면에 공격을 가하였다.

선을 경멸하고 시기하는 마귀는 젊은이가 이러한 목표를 추구하는 것을 도저히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이 사람에게도 과거에 자신이 전념했던 일들을 하기 시작했다. 우선 그의 재산에 대한 기억과, 여동생을 돌보는 책임, 친척들과의 유대관계, 돈과 명예에 대한 사랑, 다양한 식도락, 삶의 휴식, 마지막으로 덕의 엄격함과 수도생활을 꾸려 나가기 위해 얼마나 힘겨운 노동을 해야 하는지를 암시하고, 또한 육체의 연약함과 얼마나 많은 세월을 힘겹게 보내야 하는지를 떠오르게 하면서, 그가 수도생활에서 떠나가게 하려고 시도했다. 그래서 마귀는 그의 마음속에 상념의 거대한 먼지 구름을 일으켰는데, 그를 올바른 의지에서 차단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귀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는 안토니우스우스

안토니우스는 밀라노칙령(313)이 발표된 후에는 아라비아 사막의 한 산에서 수도원생활을 했다. 이곳에서 안토니우스가 마귀와 치른 전쟁은 유명한 전설이 되어 남아 있다. 마귀들은 그를 쾌락으로 유혹했으나 실패했다.

나중에는 엘리야의 지혜를 얻기 위해 무덤에 들어가 있는 그를 마귀들은 사자와 황소와 뱀 등으로 변해 사정 없이 공격했다.

안토니우스는 큰 상처를 입고 묘지 안에 누워있었다. 그 때 한줄기의 빛이 내려오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마귀들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안토니우스는 기도했다. “주님, 어디에 계십니까? 왜 처음부터 나타나셔서 저의 고통을 멈추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때 목소리가 들렸다. “안토니우스야, 나는 여기 있었다. 네가 애쓰는 것을 지켜보며 나는 기다렸다. 이제 네가 잘 참고 물러서지 않았으니 내가 너를 영원히 너를 도울 것이고 너를 온 세상에 알리겠다

안토니우스가 이러한 시험들을 모두 이기고 영적 거장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비결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16:24)” 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곧 안토니우스가 순교자의 영성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자기를 포기하고 그리스도께 투신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초대교회 신자들이 로마 제국의 핍박 아래에서 신앙을 잃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하게 예수를 붙잡을 수 있게 하였던 원동력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안토니우스였기에 맥시민(Maximin, 305-308년까지 로마 제국의 황제였음)의 주도 아래 교회가 심한 박해를 받던 시기에는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순교자들을 격려하고 도왔으며, 자신도 함께 기꺼이 순교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는 순교 당하지 않았으며, 이후로 다시 자신의 암자로 돌아가 그곳에서 날마다 양심의 순교를 겪으며 믿음의 싸움을 치열하게 치루어 나갔다. 그리고 이와 같이 매일 매일 순교자의 정신으로 사는 자세는 그를 따르는 수도사들이 반드시 가져야 할 기본 정신이 되었다.

둘째, 안토니우스의 영성 및 가르침은 기본적으로 엄격한 자기 절제의 훈련을 수반하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훈련은 보통 금욕주의(asceticism)라는 용어로 설명되곤 하는데, 이는 그리스어 ascēsis(극기, 훈련)를 번역한 말로써 인간의 욕구를 다소 부정적인 시각으로 본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이에 대해 윌리엄 함리스(William Harmless, S.J.)ascēsisasceticism 대신 “exercise regimen(훈련 요법)"이라고 풀어서 번역하는 것이 원어에 보다 가까운 의미를 전달 해준다고 말한다. 실제로 안토니우스가 살았던 수도생활의 일상은 마치 운동선수의 훈련과도 같은 육체적 훈련을 요구하는 것이었는데, 안토니우스의 수도원 영성은 이와 같이 엄격한 자기 절제의 훈련에서 성숙해지고 완성되는 것이었다. 그는 바구니 짜기 등의 노동을 통해 스스로의 생계를 유지해 나갔으며, 잠을 자지 않은 채 부단히 기도하며 밤을 새기도 하였다. 잠을 자는 시간조차 고된 훈련의 시간이었다. 그는 골풀로 만든 깔개 위에서 잠을 잤으며, 맨 땅에서 자기도 하였다. 식사 또한 매우 간소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약간의 빵과 물, 소금이 전부였으며 고기나 술은 먹지 않았다. 그나마 그것도 하루에 한 끼가 전부였으며, 때때로 금식을 하였고 식사를 이틀에 한 번만 하거나 그 이하로 줄이려고 하였다.

육체뿐만 아니라 마음의 훈련 역시 병행되었다. 안토니우스는 생각의 무게를 재는 훈련, 즉 철저하고 엄격한 자기반성과 성찰의 훈련을 하였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께 향한 마음을 흐트러뜨리는 잡다한 생각들과 유혹들을 이기고 오직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을 유지하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안토니우스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과 같이 쉬지 않는기도에 전념하였으며 또한 성서의 말씀들을 암송하고 묵상하는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우리는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 성화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철저한 자기 절제의 훈련을 통해서만 만들어진다는 것을 안토니우스로부터 배울 수 있다.

셋째, 안토니우스의 수도 영성은 고립된 영성이 아니라 오히려 타인들 및 사회와 연결되어있던 영성이라는 점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수도원 영성을 비판하는 이들은 그것이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인 영성이며 세상에 대해 무관심한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적이지 않다고 한다. 그들은 예수께서 세상 속으로 찾아가셔서 사람들과 직접 만나시고 그들과 어울리셨다는 점을 근거로 들어 기독교 영성은 세상 속에서 구현되는 것이므로 수도원 영성은 바르지 않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혹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인간의 행위를 더 강조하는 신앙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수도원 영성을 오해한 데서 나온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수도원 영성이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곳을 찾아 들어가는 것은 먼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바르게 세우기 위함이다. 복잡하고 분주한 사회의 일상을 떠나 깊은

고독에 잠겨 오직 하나님께만 몸과 마음과 영혼을 집중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한 개인이 일상생활에 필요한 에너지를 재충전하고 힘을 모으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일이다. 안토니우스의 고독은 그러한 사적인 치료의 시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회심의 장소요, 낡은 자기가 죽고 새로운 자기가 태어나는 장소요, 새로운 사람의 출현이 일어나는 장소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곧 수도자가 되는 첫 단계라 할 수 있다. 이를 가리켜 고립된 영성 혹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 세상에 대한 무관심 이라는 등의 말로 일축하는 것은 너무도 경솔한 판단이다. 오히려 이러한 고독의 시간을 갖지도 않은 채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려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교만하고 무모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먼저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엎드려 은혜를 구하고 성령으로 충만한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안토니우스가 비록 광야 깊은 산속의 은신처에 머물러 있었지만 오히려 그의 영향력은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만 갔다.안토니우스의 생애를 읽어보면 그가 사회로부터 격리되었다거나 세상을 거부했다는 인상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오히려 타인의 일에 보다 뜻 깊게 관여한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안토니우스에 대한 소문이 세상에 널리 퍼지자 병을 고치려는 사람, 귀신을 쫓아달라고 요청하는 사람, 영적인 지혜를 얻기 위하여 찾아오는 사람 등 다양한 이유로 많은 이들이 안토니우스를 방문하였다. 이러한 영향력으로 볼 때 안토니우스는 지리적으로는 고립되어있었지만 사회적, 관계적으로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섰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아타나시우스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택한 사람들을 만방에 알리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산속에 숨어 앉아 있던 그가 스페인과 골(Gaul), 로마와 아프리카에까지 알려질 수 있었겠는가? 그들 자신은 은밀하게 행동하며 잊혀 지기를 바란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모든 사람들에게 등불처럼 밝히신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자들이 계명을 지키면 삶이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고, 덕의 길을 따르고 싶다는 열망을 품게 만드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