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이와같이 행하라
2001-12-28 20:41:32 read : 1922
본문 : 눅10:25-37
유대 나라 종교지도자들이 계속해서 예수님에게 시비를 걸었던 점은 바로 예수님은 정통 랍비가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늘 주님을 무시했고, 시험대에 올려놓고 흔든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질문을 던진 내용이 나와 있습
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십니다. 율법사가 사악한 동기를 가지고 말을 걸어왔다
는 점을 간파하신 점을 간파하신 주님께서는 대답대신 오히려 그에게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랍비님, 당신은 율법에 도통한 분이니까 묻는데, 율법에는 뭐라고 기록되었습니까?"
율법사들도 계층이 있었습니다. 율법에 정통한 율법사, 그리고 율법사에서 고위층에 속하
는 서기관, 그리고 율법교사가 있었는데, 오늘 예수님에게 시비를 건 사람들은 율법사였습니
다. 이 율법사는 자기가 전공한 부분이 나오자, 줄줄 성경을 외어 대는 것이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잘
대답했습니다. 이제는 가서 그대로 사십시오. 그러면 살 것입니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이 율법사가 순순히 물러갈 리가 없습니다. 다시 주님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을 알겠는데, 이웃을 사랑하라고 한 이웃은 누구인지
잘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과 율법사의 대화를 통해 지성인의 세 가지 고민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 율법사는 율법을 잘 알고 있었지만 행함이 없었습니다. 사람은 가르치는 것만큼 행하
기가 어렵습니다. 반듯하게 남을 가르칠 수는 있지만 자기 자신을 행함이 없으므로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 것이라"고 하였습
니다. 행하지 않음에 문제가 있음을 바로 지적하셨습니다. 실천없는 지식은 번민을 더해 줄
뿐입니다. 지성인에게는 알고 있기에 배우지 않는 죄가 있습니다. 또한 행함이 없는 지식만
으로 죽은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행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났습니다. 소위
식자우환(識字憂患)입니다. 그림의 떡이라는 말과 같이 먹지 못할 떡은 보지도 않는 것이 좋
습니다. 알기는 잘 아는데 행하지 않기에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알고 행하지 않는 만큼
고민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지성이 높으면 높을수록 더 큰 고민이 있는 것입니다. 또
한 행함이 없는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도 합니다. 교만은 사람을 어리석게도 하고 점점 허
구에 빠지도록 합니다. 스스로 모순에 빠지고 갈등에 빠지며 자신을 속이기까지 하게 됩니
다. 결국에는 이 모순과 갈등이 하나의 체질화되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것
이 지성인의 고민입니다.
둘째로,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성인들은 자신의 성찰보다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나에 더 신경을 씁니다. 누가 나를 칭찬해 주어야 좋고, 사는 것 같습니
다. 간혹 나쁜 말을 한 번 들으면 잠을 이루지 못하고 괴로워합니다. 자기 자신이 어떤가에
대해서는 아랑곳없습니다. 사실이 어떤 가도 묻지 않습니다. 단지 남들이 뭐라고 하느냐 그
것만이 중요합니다. 소위 체면, 체통을 생각하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옳게 보이려고 하기
에 변명이 따릅니다. 무엇이든 정당화하려고 하며 자기가 옳다는 것을 열심히 변명하고 있
습니다. 그러다가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자신도 모르게 됩니다. 즉, 자기 상실까지 가게 된다
는 것입니다. 자기는 완전히 없어지고 체면과 여론과 평판에 의해서만 살게 됩니다. 불행한
인간상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무엇보다 자기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야 하는데 그것을
잊어버리고 사람들의 평판만 신경을 쓰며 옳게 보이려고 몰두를 하여 진정한 자기를 잃어버
렸습니다.
셋째로 이웃이 없습니다. 지성인의 결정적인 약점이 고독입니다. 일하지 않기 때문에 고독
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알면서도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고독한 것입니다. 조금이
라도 남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마음이 있으면 행함에서 보람을 찾겠고, 보람에서 자기 의
미를 찾을 것인데, 행함이 없이 아는 것만 많고 기준만 높아졌기에 이제는 고민만 남은 것
입니다. 교만 때문에 고독에 울면서도 마음 문을 열지 못합니다. 누구와 더불어 마음 문을
활짝 열고 '나는 이렇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다른 사람의 마음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같이 사는 사람은 있어도 이웃은 없다는 말입니다. 누가 나를 무시하지 않는지,
누가 나의 허점을 알고 있지나 않은지, 누가 나의 비밀을 알지나 않는지 하며 안팎으로 감
싸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그러니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고독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이
웃을 잃은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자기 상실이란 쉬운 말로 미칠 지경에
이른 상태입니다. 아무도 나를 모르고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지 않으니까요. 얼마나 불행한
사람입니까?
그때 예수님은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 가다가 강도를 만난 이야기를 시작
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아주 악한 강도들을 만났습니다. 악한 강도들은 이 사람을 에워싸고
넘어뜨린 뒤에, 옷을 다 벗겨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이 사람을 잔인하게 때려서 거지반 죽게
되었습니다. 강도들은 죽어가는 사람을 버려두고 그 사람이 소유한 짐승이며 돈이며 모든
것을 다 빼앗아 달아나 버렸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예루살렘에서 자기 직무를 마치고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에는 제사장들은 여리고에 살고 있었고, 자기 당번이 되면 그 기간 동안만 예루살렘에 올라
가 일하고 일이 끝나면 집이 있는 여리고로 내려갔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내려가던 제
사장이 그 길에서 강도 만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일부러 다른 길로 피하여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피해 달아난 것이 제사장의 직무가 급해서 그랬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습니
다.
조금 후에 한 레위인이 그곳으로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도 다른 길로 피해서 지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대로 두면 죽고 말 것입니
다. 그런데 마침 한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란 이름조차도 유
대인들은 수치로 알았던 때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개종자로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유대인
들은 그들의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마치 돼지고기를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겼습니다. 유
대인들은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그들의 도움을 받기보다는 차라리 고통을 당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처럼 천대받고 살던 사마리아인이 그리고 지나가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지금 유대인이냐, 사마리아인이냐 따질 겨를이 없습니다. 그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
람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겼다는 말이 대단히 중
요한 단어입니다.
헬라인들은 감정이 내장, 심장, 폐, 간 안에 위치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스플랑크니조
마이란 말은 이 내장들이 다 움직였다는 말입니다. 심장, 폐, 간들이 다 아파했다는 말입니
다. 그러니 얼마나 이 사람을 불쌍히 여겼는가를 보여줍니다. 이 말은 복음서에서는 아주 의
미 있는 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스플랑크니조마이는 곧 인간들을 사랑하는 예수님을 표현 하는 데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할 때는 이처럼 속 내장
까지 움직이는 마음이 없고는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불쌍이 여김이 어떤 일을 해나갑니까?
사마리아인은 나귀에서 내려서 그 사람에게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
처에 붓고 싸매 주었습니다. 당시에 기름은 안정제이고, 포도주는 알코올 성분 때문에 방부
제로 썼다고 합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이 얼마나 진심으로 이 사람을 사랑했습니까? 응급치
료를 한 후에 그 사람은 나귀에 태우고 자기는 걸어서 주막이 있는 데까지 갔습니다. 예루
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풀 한 포기 없는 햇빛만이 작렬하는 사막인 것을 기억해
야 합니다.
사마리아인은 다음날 주막을 떠나면서 데나리온 둘을 주막 주인에게 주면서 환자를 잘 돌
봐 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돈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꼭 갚겠다고 약
속까지 하고 떠났습니다.
이 이야기를 다 하신 후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율법사에게 주님은 다시
되 물으셨습니다. "당신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라고 생각하
느냐?" "예,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당신도 가서 이와 같이 하시오"하고 주님
은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사실 우리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을 못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마
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보통 사람들이면 다 그렇게 하는 행동을 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
을 못된 사람이라고 매도할 수 없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도 그런 처지를 당하면 아마 그처
럼 행동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주님은 보통 사람들 정도의 삶을 원하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보통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뛰어 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을 가지고 살면서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핵심적인 교훈은 무엇입니까?
첫째, 내 이웃이 누구인가 하는 것보다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는 가가 더 중요합니다.
둘째,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행동의 문제입니다. 내
몸과 같이 사랑한다고 하는 그 사랑은 감정을 뛰어넘어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행동
은 없으면서 감정만 내세우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셋째, 사랑을 실천하려면 민족간의 감정이나 개인의 감정을 초월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적인 여건을 극복하고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넷째, 그가 사랑을 실천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비록 사람은 보지 못하지만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다섯째, 우리가 좋은 이웃이 돼주어야 할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내
이웃을 찾으려고 멀리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내 주변에는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얼
마든지 있다는 말입니다.
여섯째, 사랑하려면 말부터 앞세우지 말고 명령에 순종하십시오.
그렇다면 일반 사람들과 그리스도인이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두 가지가 다릅니다.
하나는 가슴이 다릅니다. 또 하나는 이웃의 개념이 다릅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긴다는 마음은 다른 사람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고, 기적을 일
으키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품어야 주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전도도 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위하여 봉사할 수도 있습니다. 이웃을 도울 수도 있습니다. 이 마음이 있어야 예수님
처럼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루살이와 같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습니다. 그럴 확률이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대형사고가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하루에
4,50명씩 사망하는 대한민국의 교통사고만 봐도 그렇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당장 복음을 전해서 구원하지 않으면 영원히 그 기회를 놓치게 될 사람들
이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내 가족 중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보면서도
믿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라는 식의 무심한 태도를 취한다면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만일 오늘 당장 하나님이 그 사람들을 불러가신다면 그 사람들이 가는 곳이 어디
겠습니까? 지옥밖에 더 있습니까?
인도의 성자 썬다 싱이라고 하는 분이 어느 날 티벳 공원 산길을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마침 불교 승려 한 분이 그와 함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눈보라가 치고 세찬 바람이 불었
습니다. 어둡기 전에 어떤 수도원에라도 찾아들지 않는다면 폭설과 추위 속에서 죽게 될지
도 모르겠기에 발길을 재촉해서 걸었습니다. 그들이 위험한 벼랑 옆을 지나는데, 그 밑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벼랑 밑에는 실족하여 쓰러진 사람이 심한 부상을 입고 움직이지 못하는 가운데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불교 승려는 이것을 보고 말하기를 "우리가 믿는 신앙에 의하면 여기서 우리는 카르마를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사람의 운명은 여기서 죽는 것입니다. 나는 내 길을 빨리 가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 선교사인 썬다 싱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에 의하면 마땅히 내려가서 우리의 형제를 도와야 합니다." 그래서 승려는 서둘러 그의 길을 떠났고 썬다 싱은 벼랑을 조심스럽게 기어 내려가 그 사람을 등에 업고 위험한 산길을 다시 올라갔습니다. 썬다 싱의 온 몸에선 땀이 흘러 내렸습니다. 드디어 멀리서 수도원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는 땅 위에 있는 한 물체에 걸려 거의 넘어질 뻔하였습니다. 정신을 차려 그 물체를 내려다보았을 때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발 밑에 넘어져 있는 것은 앞서 갔던 불교 승려였습니다. 그는 추위에 얼어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썬다 싱은 그와 똑같은 운명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부상당한 형제를 등에 업고 산에 올랐기에 많은 땀을 흘렸고 그것이 썬다 싱을 추위로부터 구해 준 것입니다.
이웃을 돕는 것은 이웃을 돕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돕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사는 길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누구를 위해 봉사하고 누구를 살린다는 이야기가 아닙
니다. 이웃이 없는 내가 있을 수 없습니다.
고난이라는 것은 이웃을 만나게 해 줍니다. 고난 때문에 멀어졌던 부부가 가까워진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고난 때문에 원수처럼 지냈던 형제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일도 얼
마든지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재난이 있고, 실패가 있고, 질병이 있고, 환란이 있느냐고 묻
지 맙시다. 그것은 하나님께 맡겨 두고 다만, 우리는 그 고난 속에서 참으로 이웃이 되고,
이웃을 만나고 그러면서 내가 나로서 존재함을 깨달았으면 합니다.
이제 우리는 단순한 마음, 깨끗한 마음으로 돌아가서 지금 내가 베풀어야 할 긍휼을 베풀기만 합시다.
그래서 고난과 재난 속에서 이웃을 만나고 내가 그들의 이웃이 될 때 비로소 주님이 하신 말씀에 대한
해답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마음이 있어야 성령이 그 일을 도우십니다. 이 마음을 품고 일하십시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묻지 않으시고, 이 세 사람 중에 이웃이 누
구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이웃을 이야기할 때 내 입장에서 말하는 게 아니라, 강도 만
난 사람이 보아서 누가 이웃인가 하는 말입니다.
제사장도, 서기관도 다 자기들은 사랑이 있 고, 선한 이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려움을 당한
사람, 다른 사람이 볼 때 누가 이웃인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연민"을 사용합
니다. 그러나 자기가 좋은 관계가 아닌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분들
은 좋은 이웃이 아닙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느낄 때, 어려움을 당한 사람이 느낄 때 나
를 이웃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그 분이 참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뜨거운 연민을 가지고 사는 분, 그분이 이웃입니다.
어떤 왕이 꿈을 꾸었는데, 한 왕은 천당에 있고, 한 사제는 지옥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합
니다. 그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하고 의아해 하고 있는데, 그때 한 목소리가 들려 왔습
니다.
"그 왕은 사제들을 존경했기 때문에 천당에 있다. 그 사제는 왕들과 타협을 했기 때문에
지옥에 있다."
사마리아인과 제사장과의 차이는 연민의 차이고, 이웃이 누구냐 하는 차이였습니다. 성경
을 줄줄 외우는 사람들이 도리어 가슴이 차가웠고, 이웃을 잘못 선정해서 살았고, 버림받고
사는 사마리아인이 도리어 더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바르게 이웃을 사
랑하였습니다. 주님은 종교적인 외형으로 그 신앙을 따지는 게 아니라, 그 가슴을 보십시오.
사마리아인이 바로 주님의 친구이고, 주님과 하나된 사람입니다.
주님께 가까이 가는 사람은 주변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난하고 외롭고 고통
당하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가기 때문입니다. 중심 인물이 된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멀
어지는 것입니다. 자기가 대접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높은 곳으로, 우리의 마
음은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마구간에 오신 것처럼 내려갈 때 비로소 주님
의 마음으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너무 고급화되어 가고, 너무 높아졌습니
다. 계속해서 위로만 올라가려고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타락해 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느냐?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행하라. 사마리아 사람처럼 하라!"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이 있습니까? 시간도 내어주시고, 물질로 도
와주시고, 마음도 서로 나누면서 그들을 사랑하십시오. 영적으로 강도 만난 가족이 있습니
까? 이웃이 있습니까? 가만히 계시면 안됩니다. 무관심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
라"고 명령하시면 그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이 명령대로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
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영광스러운 주의 제자들이 다 되시기를 원합니다.
lee taejong pastor
σπλαγχνίζομα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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