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야 강해

기 살리며 살자 (이사야서 8:1-15)

호걸영웅 2013. 12. 15. 01:27

살리며 살자 (이사야서 8:1-15)


  사람들은 자신의 형편이 어려워질 때에 초라함을 느낍니다.

하는 일도 되지 않고, 옷차림도 남루하고, 지갑에 돈도 없고, 그럴 우리는 자신의 삶이 초라하다 라고 느낍니다. 초라하다고 느끼는 대부분의 경우는 바로 우리의 환경, 소유, 외모 때문입니다. 남에게 보이지 않는 마음 속의 일로 초라하다고 느끼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당시 유다는 극심하게 불안하고 어려운 세계적 질서 속에서 지극히 초라함과 두려움 속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시절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웃시야왕, 요담왕, 아하스왕, 히스기야왕, 여러 대에 걸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당시 남왕국 유다의 상태는 매우 어려웠습니다. 앗수르는 매우 강해져서 호시탐탐 유대 땅을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유대백성들은 남북을 가릴 없이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기지 못하고 우상을 섬기며, 죄악 속에 살았습니다. 그때 이사야는 임박할 하나님의 심판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합니다.

또한 유대 국가는 멸망 당하겠지만, 하나님의 때에 다시 해방될 것도 이사야 서는 예언하고 있습니다. 때는 아하스 왕의 때였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베가 왕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이사야 당시 이스라엘이 북왕국과 남 왕국으로 나누어졌지만, 나라는 형제 나라입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은 여기 유대 땅에서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가는 이웃 나라인 아람의 르신과 함께 동맹을 맺고 군사를 일으켜서 남왕국 유다로 쳐들어옵니다. 소식을 들은 아하스 왕과 백성들은 두려워 합니다.

오죽하면 그들의 마음이 바람에 흔들리는 삼림 같다 라고 말씀합니다.

아하스왕은 하나님을 의뢰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이사야를 통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본문 6절을 같이 읽지요. "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의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나니" 했습니다.

실로아는 예루살렘 동남쪽에 있는데, 물이 나오는 우물로서 실로암 수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시내는 많은 물은 흐르지 않습니다. 대단한 시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시내는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귀한 물을 공급해주는 수돗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오랫 동안 은헤를 입은 생명 줄인 시냇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했다 말씀합니다.

작고 보잘 없는 우습게 생각하며, 크고 강한 것만을 귀하게 생각한다 라는 뜻이 됩니다. 더구나 그들은 더욱 강과 같은 앗수르를 의지합니다.

 졸졸 흐르는 시내보다 창일하게 흐르는 강이 더욱 좋다 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누구나 크고, 강하며, 화려한 것을 좋아합니다. 작고, 연약하며, 없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누구나 초라한 것보다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것이지요. 결과가 무엇일까요? 8절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좋아하던 하수의 물이 골짜기에 차고, 언덕에 넘치고, 창일하여 목까지 넘치게 됨을 말씀합니다. 오히려 목숨을 잃을 지경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들이 좋아하고 의지하던 앗수르가 나중에는 쳐들어와서 유다는 멸망을 앞에 두게 됩니다.

 그런데 8 하반절에 "임마누엘이여 그의 펴는 날개가 땅에 편만하리라" 라는 말씀이 나타납니다. 갑자기 임마누엘이라는 말이 나타나는 것인가요?

임마누엘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이라는 뜻입니다. 앗수르가 쳐들어와서 이스라엘을 집어 삼키는 위험한 순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셔서 그들을 지켜주실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유대백성들의 진정 마실 물은 실로아의 물이라는 것입니다.

히스기야 앗수르의 산헤립이 군대와 함께 쳐들어 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을 포위합니다. 이스라엘의 군사들은 나가서 싸울 수도 없습니다. 적군은 하나님을 조롱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공포에 덜덜 떱니다.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자 하루 아침에 여호와의 사자가 앗수르의 군대 185,000명을 죽여 버립니다. 겨우 앗수르의 산헤립 왕은 목숨만 부지하고 앗수르로 돌아가지만, 날에 정적에 의해 살해당하고 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우습게 보기도 하고, 또한 우리들 자신도 우리의 신앙을 아주 초라하다 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는 종교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죽 못나면 신을 믿느냐 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 자신의 지혜로 세상을 헤쳐나가야지 신에게 의지하고, 신의 힘을 빌리느냐고 말합니다. 어딘가 모자라는 사람만이 신앙을 가진다 라는 것이지요.

세상에는인본주의자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이고, 사람만이 세상을 올바르게 세울 있다 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에게는 사람이 종교입니다. 다른 존재를 믿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일이라고 떠듭니다. 사람이 사람을 구원할 있고,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만이 진리이며, 영적인 것은 통째로 부정합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너무나 보잘것없는 것이고, 초라해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갈릴리 근처 나사렛 산동네 출신입니다. 당시에도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고 말할 정도로 예수님은 시골구석 출신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름 없는 목수 집안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누군가가 부르면 달려가서 목수일을 하고 겨우 굶지 않을 만큼 수입을 올리는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은 학벌, 가문, 소유, 인물조차 무엇도 자랑할만한 것이 한가지도 없었습니다. 트레일러 하우스 하나도 가진 없었습니다. 그리고 겨우 33살이라는 젊디 젊은 나이에, 당시 가장 악랄한 사형도구인 십자가에 못박혀 악인과 함께 죽으셨습니다.

 이사야서 53 2절은 아예, "그는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하면서 예수의 초라함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분을 우리의 구주로 믿습니다. 그러니 우리를 보고 참으로 한심하다 라고 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초라하다면, 우리 자신도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가요? 우리의 삶을 보면 우리도 초라? 합니다. 세계에서 제일 부자나라인 미국에 와서 살지만, 우리는 그리 부자가 아닙니다. 미국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손해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한국에 때에는 몇몇 사람들이 알아주기도 했는데, 미국에서는 소리도 못치고 살아갑니다. 하는 생업도 별로 남에게 자랑할만한 번듯한 것이 것이 없습니다. 경제적인 여유도 별로 없고, 어디에 놀러 가거나 쉴만한 시간적인 여유도 별로 없습니다. 참으로 초라한 삶을 살아간다고 해도 말이 없습니다.

우리의 교회도 초라하지요. 겨우 십 명의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 드리고, 재정적으로도 그리 풍족하지도 못합니다. 단돈 100불 쓰는 것도 벌벌 떨어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할 우리의 현실이 답답하지요.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결코 보잘것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십니다. 우주 만물을 지으신 분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믿는 신들은 모두 사람이 만든 거짓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으셨고,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하늘의 태양이 없이는 잠시도 없습니다. 또한 공기가 없이도 없습니다. 그런데 태양도, 공기도 모두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어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별볼일 없는 일이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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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초에 프랑스에 볼테르라는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에 있는 기독교신자 들을 싫어했습니다. 말도 되는 신앙을 가졌다고 미워했지요. 그는 앞으로 수십 이내에, 세상에 있는 기독교신자들을 없애버리겠다 라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의 수가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늘어났습니다.

볼테르는 결국나는 세상에 태어나지 말아야 했다 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으며, 그가 살던 집은 훗날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반포하는 본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은 절대로 초라한 일이 아닙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우리를 우습게 없단 말입니다.

  또한 우리가 구주로 믿는 예수님이 진정 초라한 분인가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 .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영광의 보좌를 잠시 버리시고, 죄와 죽음의 고통 속에 사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낮고 천한 모습으로 오셨을까요?

그것은 낮고 천한 자리에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임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왕의 가문에, 학식이 높은 분으로, 부자로 오셨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근처에도 없었을 것입니다. 오직 훌륭한 가문에, 배운 사람, 가진 소수의 사람만이 예수님을 믿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낮고 천한 자리에 오심으로 세상의 누구도 예수님 가까이 있고, 믿을 있게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여러분도 예수님을 믿게 것입니다.

빌립보서 2 9절부터 11절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롤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였습니다.  이래도 우리가 구주로 믿는 예수님이 초라한 분입니까
?

오늘의 본문에도 유대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상징인 실로아의 물을 버렸다고 말씀합니다. 세상의 쾌락과 우상을 기뻐했습니다.

세상이 보기 좋고, 화려해서 세상을 택하면, 결국 세상이 그들을 삼키게 됩니다. 그런데 본문 8절에 "임마누엘이여" 라고 말씀합니다. 임마누엘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유대백성들이 싫어 버린바 되었던 분이, 바로 그들을 구원하시려 메시아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초라한 분이라고 제쳐 놓았던 그 예수가 , 분이 바로, 우리를 온갖 죄와 환란에서 구원하시는 메시아라는 사실입니다. 앗수르가 없고 이스라엘의 왕들이 결코 없는 일을 메시야는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절대로 초라한 분이 수가 없습니다. 또한 예수를 모셨을 , 자신도, 나의 생업도, 우리의 교회도 초라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스바냐 3 17절에 보니까,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나님께서 초라해 하고 죽어 있었던 때문에,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노래까지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그리도 사랑하고 예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내가 보잘것없는 존재란 말인가요? 내가 초라한 존재란 말인가요? 내가 그렇게 볼일 없는 존재라면 하나님께서 나를 보고 기뻐하시겠습니까? 노래까지 부르신단 말인가요? 결코 저와 여러분은 초라한 존재가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의 가정에 내가 있고, 우리의 생업에 내가 있고, 우리의 교회에 내가 있습니다. 나라에 내가 있고 세계에 내가 있습니다. 나에겐 의무가 있고 일이 있고,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이 있습니다. 아니면 절대 못할 일을 우리는 도맡아 하고 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와도 일은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초라한 존재가 아니란 말입니다.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주를 다스리시고 계십니다. 왕들을 갈아 치우십니다. 나라도 자빠졌던 일어났다 하게 하십니다. 분을 믿는 것이 어찌 별볼일 없는 일이 됩니까?

그러므로 분을 믿는 우리 역시 든든하기 그지없는 (Back ground) 있습니다. 빽 없이 살던 사람이 죽을 땐, “하고 죽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우린 그리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죽을 때 할렐루야!”하고 죽을 것입니다.

고로 우리는 고개를 당당히 들어야 합니다. 어깨를 폅시다. 당당하게 살아나갑시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하십니다.

죽을 일이 전혀 없습니다.

로마서 8 37절도 "그러나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했습니다.  아멘! 세상을 이기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는 우리임을 분명히 믿고 흔들려선 아니 됩니다. 예수와 함께 힘차게 어디든지 언제든지 전진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축원 드립니다.

참조:박상희;2009/ 편집:2013.3.27.익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