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야 강해

예배와 말씀을 회복하라(사 66장 1-9절)

호걸영웅 2014. 4. 20. 12:42

 

예배와 말씀을 회복하라( 66 1-9)

 

[] 66:1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 66: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 66:3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 66:4

나도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청종하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 악을 행하며 나의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 66:5

여호와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들아 그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르시되 너희 형제가 너희를 미워하며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를 쫓아내며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영광을 나타내사 너희 기쁨을 우리에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라 하였으나 그들은 수치를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 66:6

훤화하는 소리가 성읍에서부터 오며 목소리가 성전에서부터 들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 대적에게 보응하시는 목소리로다

[] 66:7

시온은 구로하기 전에 생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자를 낳았으니

[] 66:8

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이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뇨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순식간에 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구로하는 즉시에 그 자민을 순산하였도다

[] 66: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임산케 하였은즉 해산케 아니하겠느냐 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해산케 하는 자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시니라

서론)이사야 서의 마지막 장입니다. 66장은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단락은 예배와 말씀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 두 번째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첫 번째 단락의 말씀을 나눕니다.

마지막 이 세상에서의 새로운 시대가 찾아올 때, 하나님이 가장 바라고 강조하시는 것은 예배의 회복이었습니다. 이사야서 1장에서부터 말세에도 여전히 행하여지는 예배의 타락을 지적하신 하나님은 마지막 장에서도 예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론)첫 번째. 예배를 회복하라

(66:1-4)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3)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 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4) 나도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청종하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 악을 행하며 나의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1 11-13절에서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라고 하심과 동일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서가 끝나는 마지막 장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에 대해서 책망하시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5대 왕조를 거치면서 선지자 활동을 하였습니다. 20살에 부름을 받은 이사야 선지자는 60년 동안 하나님 말씀을 전하다가 80세에 므낫세 왕에 의해 순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60년 동안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들었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회복하지 못하고 변화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책망하시면서, 예배가 왜 타락되었는지 깨닫게 해주십니다. 이것은 곧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라 하겠습니다.

)첫째로, 마음을 다하는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1-2)

하나님은 묻고 계십니다.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려고 하느냐,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 인줄 아느냐”라고

다시 말해서 이 말씀은 “너희 손으로 지은 곳에만 내가 있는 줄로 아느냐” 입니다.

세상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그리고 다시 2절에서 강조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 하신 분이요 전지전능하신 창조주시라는 것입니다. 성전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출입이 지극히 자유로우신 분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새장의 새 처럼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죄악의 근원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고,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는 분이시며, 이 곳에도 계시고, 내 안에도 계시며, 우리 가정 중에도 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성전에도 계시고, 예배를 하는 자들의 마음 속에도 계십니다. 고로

예배 드리는 자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예배는 형식적인 예배가 될 뿐입니다.

2절에서 하나님은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를 권고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가난한 심령을 가지고, 애통하는 심령을 가지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자들의 예배를 받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은 심령 같은 것은 상관치 않고, 그저 성전에 제물만 가지고 나오면 다 되는 줄 알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자들이 이스라엘처럼, 그저 성전에 나와서 헌금 드리고 앉아 있다가 설교나 듣고 가면, 예배를 잘 드린 줄로 착각하고 삽니다.

(7:48-51) 에서도 스데반 집사는, 이사야가 말씀하신, 바로 이 말씀을 외치며  순교하였습니다. (48)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바 (49)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50)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라고 책망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심령의 애통함이 없이 드려지는 예배에는 하나님은 아니 받으신다고 스데반 집사는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자들은 나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도 이 땅 위에 이루어지지 못함과 악이 번영함을 우리 심령이 진심으로 애통할 때, 진실로 예배가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몇 일전 저는, 신이 보낸 남자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 영화는 북한에서 순교한 중국 변방의 어느 마을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여주는 것인데요. 예수를 믿었다는 죄 하나 때문에 수없이 두들겨 맞고 다리뼈를 망치로 부수고 자궁에 불 꼬챙이를 넣어 처참히 여자를 살해하는 장면으로 시작하여, 교인들을 핍박하는 그들을 피해 남한으로 탈출하려 했던 숱한 사람들을 고문하고 총살시키는 내용이었습니다.

현재 북한에는 14만의 지하교인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기도할 때 조차도 담요를 뒤집어 쓰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 날에도 여전히 온갖 핍박과 살육이 자행되는 사단의 무리들이 엄연히 존재함을 우리는 참으로 애통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심령으로 드리지 못한 예배는 우상 앞에 드리는 제사와 같습니다. (3)

아무리 무수한 제물을 갖다 바치고 피를 쏟는다 할지라도, 마음을 다하지 못한 예배는 소를 살육하고 개의 목을 꺾음과 같고, 돼지 피를 뿌리는 것과 같으며, 우상을 찬송함과 같다는 것입니다.

왜 이들이 이런 예배를 드립니까? 그들은 자기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65 2, 16절에도 “자기 생각을 좇아”, “자기를 위하여” 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이 땅에 드려지는 예배를 조심스럽게 들여다 보면, 자신들을 위해서 드려지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그 뜻이 이뤄지도록 드려지는 예배가 아닌, 자신들의 사업과 자녀와 가정을 위해서 드려지는 예배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복주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구약의 역사를 보고, 2천년 중세 교회 역사를 보더라도, 예배가 타락하면 반드시 시대가 타락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마지막 때에 성경은 예배의 타락을 지적하십니다. 이 비밀을 깨달은 자라면 예배에 온 힘을 쏟아야만 할 것입니다. 예배의 타락은 곧 하나님의 징계가 임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셋째로 신령한 예배가 아니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4)

애통한 마음이 되지 못한 예배는 다시 말해서 심령에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예배가 계속된다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유혹을 택하게 하여 주시겠다고 하였고, 그들이 무서워하는 재앙들을 내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사야는 수없이 타락한 예배를 지적하였지만, 60년이 지나도 그들은 듣지 아니하고 더욱 더 악을 행하였습니다. 결국에는 이사야 선지자까지 죽이고야 맙니다.

이러한 이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저주가 너무하다고 하겠습니까?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한 그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는 무섭게 임하고 말았습니다.

네번째. 말씀을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66:5-9) 여호와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들아 그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르시되 너희 형제가 너희를 미워하며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를 쫓아내며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영광을 나타내사 너희 기쁨을 우리에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라 하였으나 그들은 수치를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6) 훤화하는 소리가 성읍에서부터 오며 목소리가 성전에서부터 들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 대적에게 보응하시는 목소리로다 (7) 시온은 구로하기 전에 생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자를 낳았으니 (8) 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이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뇨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순식간에 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구로하는 즉시에 그 자민을 순산하였도다 (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임산케 하였은 즉, 해산케 아니하겠느냐 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해산케 하는 자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시니라”고 하십니다.

   창세 이래로 하나님은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과 함께하셨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은 하나님 말씀 앞에 항상 두려워 떠는 자들이었습니다. 말씀 앞에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얼마나 말씀 앞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까요? 말씀을 전하는 주의 종들이 얼마나 두려움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할까요?

은혜 받기 원하는 자들은 하나님 말씀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조롱을 당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조롱하는 말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는 영광을 나타내사 너희 기쁨을 우리에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라”. 이 말은 그래, 너희들의 말대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서 너희들이 기뻐하기를 제발 바란다” 는 조롱입니다. 즉 이 말은 “너희들이 바라는 대로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조롱하는 자들이 수치를 당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를 비롯해서 예언서를 기록한 16명의 선지자들이 얼마나 미움과 조롱과 핍박을 당하였습니까?

6절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훤화하는 소리가 성읍에서부터 오며 목소리가 성전에서부터 들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 대적에게 보응하시는 목소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이사야를 비롯해서 16명의 선지자들을 비웃던 이스라엘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또 신약시대에 예수님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을 비웃고 조롱하고 멸시하고 핍박했던 자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로마에게 처절히 멸망 당하는 비참한 결과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7-9절까지 하나님은 “아이를 낳는 여인”을 비유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반드시 지키시고 보호하여 주실 것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7) 시온은 구로하기 전에 생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자를 낳았으니 라 하십니다. 아이를 가진 여인은 반드시 해산하는 고통의 과정을 통해 출산하는데, 남자를 낳습니다. 곧 사내아이는 그리스도십니다. 그들의 구속자요 교회의 머리가 되실 분이십니다. 이런 일은 세상에 도무지 들어 본 적이 없는 엄청난 일이라는 것입니다.

고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 때문에 받는 잠간의 조롱과 멸시와 비웃음 앞에 주눅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잠간의 고난 때문에 거짓 것들과 타협하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9절의 말씀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임산케 하였은 즉 , 해산케 아니하겠느냐. 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해산케 하는 자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시니라”고 하십니다.

결론)

세상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하심 속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고난을 당하고 조롱을 당할지라도, 반드시 출산하는 기쁨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의 고난과 순교는 결코 헛되이 끝나지 않음을 믿고 늘 세상과 싸워나가는 여러분과 제가 되어지길 바랍니다.

끝으로 (8:18)을 읽으며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아멘!

                                          

  *참조:곽노아 / 편집:익선 041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