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모음(Korean sermons)

침례 요한의 교훈 (요 3:22~30)

호걸영웅 2014. 6. 2. 21:37

 

침례 요한의 교훈 ( 3:22~30)

[] 3:22

이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침례를 주시더라

[] 3: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침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 3: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 3: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 3:26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침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 3:27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 3:28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 3: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 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서론)

1. 지혜로운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늘 세 가지를 살피며 살아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첫째,“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입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나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참된 지식은 바로 나를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고로 소크라테스도 말하기를 네 자신을 알라 라고 외쳤던 것 같습니다. 칼 바르트는 말하기를“하나님을 아는 자만이 나를 알 수 있고, 나를 아는 자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나를 알아야 겸손해집니다.

둘째,“내 나이 몇 살인가?”하는 질문입니다. 자기 나이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실제로 제 나이에 걸맞게 사는 사람이 드뭅니다.

셋째,“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하는 질문입니다. 10년 후, 20년 후 나는 무엇을 할 것인지, 인생의 황혼기에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 것인지, 그리고 인생의 종착역은 어디인지, 죽음 이후에는 어떤 일이 있는지를 알고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심각한 질문에 대해 분명한 해답을 주는 것이 본문입니다. 본문은 예수님보다 6개월 앞서 세상에 왔던 침례 요한이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자신의 심정을 밝힌 부분입니다.

2. 침례 요한은 아주 늙은 제사장 사가랴 슬하에 기적적으로 태어난 늦둥이? 외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삼십 세가 되도록 일반 아이들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선지자로서 대중 앞에 두각을 나타낼 때까지 메뚜기와 석청이라는 광야의 야생식을 하고 낙타 털 옷을 입고 광야 수도 생활을 하였기 때문입니다(누가복음 1:80). 그는 포도주를 평생 입에 대지 아니하였고 결혼도 하지 않습니다. 삼십 대 초반에 벌써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주목하는 위대한 선지자의 위치에 올랐지만 그 인기 역시 잠깐이었습니다. 일 년 남짓한 아주 짧은 기간 동안 혜성처럼 찬란하게 빛났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은 너무도 비극적으로 생을 마쳤습니다. 헤롯의 부도덕함을 직설적으로 책망하다가 투옥되어 매우 힘든 시기를 보냈고, 얼마 후 간교한 요부 헤로디아에 의해 목이 베인 후, 그 머리가 쟁반에 담겨 많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끔찍한 종말을 맞이하였습니다(마가복음 6:17-29).

이와 같은 그의 비극적인 생을 보면 예수님께서 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하셨는지 얼른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침례 요한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셨을 때 침례 요한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부근 사람들이 다 그에게 나아가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고 침례를 받았습니다(마태복음 3:5-6). 침례 요한의 메시지는 예루살렘과 유대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파고 들었고, 갈릴리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으며,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양심을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사람들은“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하는 그의 외침에 양심이 찔려 견딜 수가 없었습니 다. 수다한 사람들이 죄를 고백하고 침례를 받았습니다. 이제 침례 요한은 이스라엘의 정신적인 지도자로 우뚝 세게 되었고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침례 요한의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이럴 즈음에 예수님께서 등장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의 눈에 침례 요한이나 예수나 별 구별이 없어 보였습니다. 두 사역도 거의 비슷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침례 요한은“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도“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둘 중에 누가 진짜 메시아인가를 놓고 토론이 벌어지고 다툼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침례 요한에게 말합니다(26).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께서 증거하시던 자 (예수)가 침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라고 말합니다.

침례 요한을 존경하고 따랐던 제자들은 자기들의 선생이 하루 아침에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것을 보고 견디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에 보여준 요한의 처신은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본론)
. 침례 요한은 자신의 분수를 알았습니다.

본문 27절에“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선생님!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그 예수도 침례를 주니까 선생님께 향했던 인기가 지금 그쪽으로 다 넘어 가고 말았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로 인기가 넘어가자 요한의 제자들이 지금 속이 상해하는 말입니다. 아직 침례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 신지를 알지 못하고 한 말입니다.

상심한 제자들의 말을 들은 요한은“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본문 27)고 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의 권위는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침례 요한은 경력을 보아 예수님보다 앞섰습니다. 예수님은 삼십 세가 되도록 목수 요셉의 일이나 도왔던 무명인이었지만, 요한은 이십 년이 넘도록 광야에서 거룩한 수도생활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요한은 사람들에게 훨씬 더 매력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신의 분수 이상의 것을 욕심 부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잊혀질지라도, 자신의 모습이 작아 보인다 할지라도, 제자들이 자기 곁을 떠날지라도, 그는 섭섭해 하거나 원망하거나 욕심 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누구인지 그이 사역의 종말이 언제인지 너무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 침례 요한은 자기가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알았습니다.

본문 28절 말씀에“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 할 자는 너희니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리스도를 증거 하고자 왔으며 요한의 제자들 조차도 그를 증거하여야 한다 라고 까지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는 또 자기는 소리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요 자기는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에 불과하다고 고백합니다.

어떤 영화나 연속극을 보면 주연도 있고 조연도 있습니다. 주연만 있다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조연이 그 작품을 빛나게 합니다. 주연만이 영광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조연 역을 잘하는 사람이 주연보다 못지않게 인기를 얻는 경우도 자주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게 주어진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묵묵히 하나님을 섬겨 나가야 하겠습니다.

. 침례 요한은 자기 사명을 알았습니다.(신랑의 친구의 역할)

본문 29절에“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자기가 신랑이 아니라 신랑의 친구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두 가지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우리의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신랑의 친구가 신랑을 보고 기뻐하는 것같이 신랑에 비유된 예수님은 우리들의 기쁨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0에“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빌립보서4:4) 말씀하시기를“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하셨으며, (데살로니가전서 5:16 “항상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옛날 영국 황제 루이스가 민정을 살피기 위하여 국내를 순시하는 도중에 어떤 동리 한 모퉁이에 있는 물방앗간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물방앗간에서 기뻐 부르는 노래가 들리는데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황제는 노래 소리에 도취되어 듣다가 물레방앗간으로 들어가 보니 물레방앗간 노인이 기뻐하며 즐겁게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황제는 그 물레방앗간 노인에게 다시 노래를 청했습니다. 그 노인은 노래하기를 “세상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나도 역시 세상사람 부럽지 않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하고 불렀습니다.

황제는 다시 말하기를 그러면 둘째 절은 이렇게 부르라고 했습니다. “세상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영국 황제 루이스가 날 부러워해.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이처럼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모신 곳에는 황제도 부러워할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바울 사도도 모진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감옥 안에서도 기뻐하며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때 굳게 잠긴 옥문이 열리며 수갑이 풀어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기쁨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기쁨은 곧 기적을 일으킵니다.

. 주님은 흥해야 하고, 자신은 쇠할 자로 알았습니다.

본문 30절에“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무엇이 그의 소망입니까?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서, 영원히 경배 받으실 하 나님으로서 높임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위해 자기가 작아져야 한다면 얼마든지 작아지기를 원했습니다. 이렇게 말한 침례 요한은 마지막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유명한 선교사인 윌리엄 캐리는 인도의 선교사로서 온갖 고난과 역경을 견디며 인도의 백성들을 위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가 마지막 눈을 감을 때 “여러분 내가 죽거든 윌리엄 캐리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마십시오. 윌리엄 캐리라는 말 대선에 월리엄 캐리의 주님에 대해서만 말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장로교의 창설자인 요한 칼빈도 마지막 세상을 떠날 때“나를 위해서는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삶을 기념하기 위해 비석을 세우는 것은 서양 사람들의 상식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비석마저 없게 한 칼빈의 무덤은 지금도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이는 모두다 침례 요한의 마음처럼 “그는 홍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심정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는 분명 두 부류의 신앙인이 있습니다. 한 부류는 예수님의 이름을 빌려 자기가 흥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복도 받고, 소원 성취도 해서 편하게 사는 것이 신양 생활의 목적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사람들이 예상보다 많다는 사실입니다.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요한처럼 예수를 위하여 자기가 쇠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큰 자인가요? 작은 자인가요? 자기 집을 계속 늘리기 위해서는 수천, 수억 원도 아깝지 않게 투자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데는 단돈 십만 원 내놓기도 아까워한다면 그는 소인일 것입니다. 자기의 건강과 여가 활용을 위해서는 시간도, 돈도 아끼지 않고 쓰면서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는 일주일에 한 시간 드리는 것도 아까워한다면, 이는 예수님이 쇠하기를 바라는 소인입니다.

한국의 한동대학교 후원의 밤에 어느 분이 이러한 간증을 했습니다. 얼마 전에 아버지가 오십 대의 나이로 암에 걸려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사 남매에게 이십 억 원씩의 현찰을 유산으로 남겼답니다. 장례를 치르고 자녀들이 한자리에 모여 기도하면서 이 유산을 어떻게 쓰는 것이 아버지의 죽음을 욕되게 하지 않을 수 있는지를 의논했다고 합니다. 결국 기독교 대학으로 새 출발을 했지만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동대학교에 기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는 분명“그는 홍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침례 요한의 심령을 가진 갸륵한 자녀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론)

고로 예수님께서 침례 요한에 대해 마태복음 11:11에 말씀하시기를“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침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침례 요한이 이 세상에서는 가장 큰 자이지만 천국에는 그보다 더 큰 자들이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곳에는 세상에 있으면서 주님을 높이기 위해 자기는 최대한 낮아지고 하나님 나라가 홍하기 위해 자기는 철저히 쇠하여진 자들이 너무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들의 풀과 같고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아름다움이 아무리 황홀해도 그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금방 말라서 바람에 날리는 들꽃과 같고 아침 햇살에 사라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허무한 인생이 역전되어 엄청난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침례 요한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 자기는 철저히 쇠하기를 소원하고 철저히 자신을 비우는 작업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상급을 바라며 인내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흥하므로 내 삶의 보람과 행복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에서는 심히 작아 보이겠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큰 자로 서게 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처럼 갸륵한 침례 요한의 삶과 심령을 본받으므로써 하나님 앞에 귀한 자, 큰 자로 서게 되실 수 있기를 축원 드립니다.

[출처] 기독정보넷  /편집: 익선 052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