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우벤과 유다가 주는 교훈(창49:3,4)
[창] 49:3 |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마는 |
[창] 49:4 |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
서론)
1.성경에 나온 많은 사람들을 우리가 쉽게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에 나온 그 많은 사람들의 삶을 조금씩 알아가다 보면, 그들의 믿음 또는 행동으로 인해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축복을 받았는지 또는 축복을 받지 못하고 어렵게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 중 특히 축복받은 사람들의 행동을 보면, 우리도 "이렇게 하면 축복을 받을 수 있구나!!"라고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은 좋은 일들을 행했음에도 축복을 받지 못한 사람들, 심지어 저주를 받은 사람들을 통해서도 우린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중 안타까운 한 사람이 있었으니, 르우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셉을 형제들이 죽이려 할 때, 유다도 그를 살리려 노력 한 것을 성경을 통해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외에도 요셉을 살리고자 애쓴 사람이 있으니 맏형 르우벤입니다. 그렇다면 왜 르우벤은 훗날 ‘유다’와 같은 축복을 받지 못했는가? 우리는 그 이유도 분명히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르우벤이 동생 요셉을 살리는데 앞장을 선 사람임을 증거합니다. 형제들에게 우리들의 손으로 요셉을 죽이지 말자 차라리 그를 광야 웅덩이(창37:21-22)에 던져 넣자 하고 말한 사람이 바로 르우벤입니다.
르우벤의 행동은 우선은 동생을 살려놓고 보자는 의도였음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르우벤도 선량한 사람이었으니 당연히 르우벤의 후손들 역시 유다의 후손처럼 축복을 받아야 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르우벤의 후손들에서는 축복을 받은 사람을 쉽게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특히 그 축복의 분량은 유다 지파와 비교가 안되며, 그리고 결국 르우벤은 장자의 명분(역대상5;1),까지도 요셉 지파에게 빼앗겨 버리게 됩니다.
(창35:22)에 그 해답이 잇습니다. "이스라엘(야곱)이 그 땅에 유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라고 했습니다.
위의 구절에서 읽어본 바와 같이, 야곱의 장자 르우벤은 씻을 수 없는 죄악을 행하였는데 , 그것은 서모(아버지의 첩)와 통간(간통과 동일한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비록 서모라 하지만 아버지의 아내이니 그러한 사람과 통간을 했으므로 용서받지 못할 큰 죄악임이 분명합니다. 야곱이 임종 시 유언을 할 때에도 그 사건을 말하면서 “르우벤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렵혔다” (창49:4)는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가 저지른 죄가 너무나 중(重)하였기에 그 복을 다 감하고 말았다는 결론을 내려볼 수 있다.
(창 49:3-4)엔 르우벤 지파에 대한 축복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야곱은 서열대로 르우벤부터 축복했습니다. 르우벤은 야곱의 첫마디 말에 안심했습니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그의 타고난 지위와 위엄과, 권위를 말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르우벤에게 돌린 그 모든 탁월성은 뒷말로 인해서 빛을 잃습니다.
“마는(그러나) 너는 물의 끓음 같았기 때문에, 탁월치 못하리라”는 말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아비의 침상에 올랐다는 것입니다. 즉 야곱의 아내 빌하와 간음한 죄입니다(창35:22).
물의 끓음이란- 성격이 안정되거나 사리 분별을 차분히 하지 못하고, 정욕에 이끌려 함부로 행동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권위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부자간의 질서도 엄격히 지키게 하십니다.
고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치는 자와 저주하는 자(출애굽기21:15,17)는 반드시 죽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누구든지 그 계모와 동침하는 자는 그 아비의 하체를 범한 죄가 됩니다. 그러한 경우에도 반드시 그 두 사람을 다 죽이라(레위기20:11)고 합니다. 이러한 말씀에 비추어 보면, 르우벤은 사형에 해당한 죄를 행했던 것이죠. 그러하기에 르우벤은 하나님의 축복에서 멀어진 것입니다. 이런 성격은 하나님께서도 쓰시기 힘든 요인이 됩니다. 이로 인해서 르우벤 지파에서는 어떠한 사사도 왕도 선지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광야시대 지도자 중 다단과 아비람이 있었지만, 고라와 함께 모세를 대적하다 멸망 당하고 말았습니다.
르우벤은 장자였습니다. 따라서 야곱의 유산이 당연히 르우벤에게 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죄로 말미암아 장자권은 유다에게로 넘어갔고, 기업은 요셉에게로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르우벤의 물의 끓는 듯한 성격은 그의 후손들에게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르우벤 지파는 갓지파와 므낫세 반지파와 같이 약속의 땅의 정복이란 중대한 사명을 목전에 두고서, 요단 동편에서 자신들의 조건과 이익을 위해 안주하고자 하였습니다. 그 땅을 요구한 것은 결코 장자로서의 탁월한 지파가 될 수 없음을 나타냈습니다. 결국 거기서 기업을 차지했으 나 성읍들을 약탈당하고 인구는 줄어들었습니다(신33:6). 그리고 르우벤 지파는 다른 신들을 간음하듯 섬기는 죄를 범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앗수르에 사로 잡혀 갔으며, 귀환 후 단지 파에 흡수되는 종말을 맞이하였습니다(대상5:26).
사람들은 현재 상태와는 전혀 관계없이 미래가 주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위해서 축복과 사건들이 예비 되어 있다고 기대합니다.
하지만 사람의 미래는 자기들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대부분은 과거에 의해 이미 형성됩니다. 성급하고 침착하지 못하고 천박한 사람들이 심오하고 진지하고 성실한 품성의 미래를 가질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없습니다.
반면, 여호수아를 보십시오. 그는 모세의 시종이었을 때부터 성실하고 변함이 없었습니다. 가나안을 정탐하였을 때도 흔들림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했습니다. 전쟁에 나가서 용맹하게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결국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됩니다.
또 다윗을 보십시오. 수없이 고난이 오고 전쟁을 치러 승리해도 교만하여 지지 아니하고 어려서부터 한결같이 성실하며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결국 축복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탁월하고 발전할 수 있는 능력과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부족합니다. 때로는 의심하고 조급해 하고 경거망동하고 다투다가 복을 잃게 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말씀이 이끄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변함없이 성실하게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훗날 우리를 탁월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유다와 르우벤은 똑같이 '살리는 사람'이긴 했지만 행동에 분명 차이가 있었다.
창세기를 면밀하게 읽어보면, 유다가 르우벤 보다 살리는 일에 훨씬 더 적극적인 행동을 한 사람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한 증거는 요셉이 이집트 나라의 총리가 되고 난 후의 사건에서 알 수가 있다.
요셉이 이집트에서 17년 동안 종으로서 살왔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해석하는 능력으로 인하여, 이집트의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해 주고는 그 나라의 총리대신이 되는 행운을 얻게 됩니다. 그 요셉이 당시 강대국이었던 이집트의 총리가 된 후에, 이집트와 중동 일대에는 큰 흉년이 들어, 야곱의 아들들 역시 곡식을 구입하기 위하여 이집트로 가게 됩니다.
그때 희한하게도, 요셉을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아 넘긴 형제들이 요셉 총리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이집트를 간 형제들 중 요셉의 친동생(라헬이 낳은)인 베냐민이 없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동생 베냐민의 생사를 알기를 원했던 요셉은 친동생이 생존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동생을 직접 보길 원한 요셉은 다음에 곡식을 구입하러 올 때에는 반드시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엄명을 내렸다. 만약에 베냐민을 데려오지 아니하면, 당신들은 곡식을 구입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당신들을 거짓말쟁이요 스파이로 알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두 번째 곡식을 구입하려고 할 때에 ,이미 요셉을 잃은 후 상심이 빠졌던 아버지 야곱은 베냐민을 그 형들의 손에 보내려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사랑하던 아들 요셉이 악한 짐승에게 먹혀 이미 죽었으니, 요셉의 동생 베냐민마저 죽게 될까 봐 염려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마침내 르우벤이 나서게 되는데, 그것은 르우벤 자신의 아들 두 명의 생명을 걸고 기필코 베냐민을 다시 데려오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창42:37) "르우벤이 아비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베냐민을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나의 두 아들을 죽이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 라고 합니다.
르우벤의 약속 이후에야 비로소 곡식을 구입하기 위해 베냐민과 함께 이집트로 가게 됐고, 요셉은 자신의 동생 베냐민이 생존하여 있음을 확인하고는, 청지기에게 꾀를 내어 동생 베냐민을 이집트에 머물게 하기 위해 꾀를 씁니다. 그 꾀는 베냐민의 곡식자루에만 요셉의 은잔과 곡식 값을 몰래 넣어 베냐민을 도둑으로 몰아 이집트에 남기는 것이었다.
결국 곡식을 사 집에 가던 중, 요셉의 청지기가 군사를 이끌고 추격해 와서는 베냐민의 곡식자루를 검사하게 되고, 곡식 검사에 떳떳했던 형제들은 만약에 총리의 은잔을 훔친 사람이 있다면 총리의 종이 되겠다고 대답을 합니다.
그런데 총리의 은잔이 베냐민의 곡식자루에서 발견되고 말았고, 이제 베냐민은 애굽에 머물러 총리의 종이 되어야만 하는 난감한 처지가 되고 맙니다. 야곱의 아들들에게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버지에게 틀림없이 베냐민을 데려 오겠다는 약속을 못 지키면 르우벤은 자신의 아들 두 명이 죽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냐민에게 어떤 문제가 생긴다면 그 아버지 야곱이 슬픔으로 인하여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위급한 지경이다.
이러한 위급한 상황이 발생했으니 누가 나서서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당연히 맏형 르우벤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 할 수 있다. 더욱이 자신의 두 아들의 생명까지 담보가 되어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르우벤은 잠잠하고 있다. 둘째 시므온도 잠잠했다. 셋째 레위도 마찬가지다. 그 누구도 나서지 아니하고 침묵하고 있을 그 때, ‘유다’가 용감하게 그 위급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자신을 던집니다.
(창44:33-34)에 "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는 형제와 함께 도로 올려 보내소서 내가 어찌 아이와 함께하지 아니하고 내 아비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까 .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비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유다는 자신이 베냐민을 대신해 총리의 종이 되겠으니 베냐민을 아버지 집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요청하게 됩니다.
‘유다’가 누구냐? ‘요셉’에게는 자신을 살려준 고마운 형입니다. 그 ‘유다’가 다시 아버지와 동생 베냐민을 살리기 위하여 스스로 종이 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이러한 유다의 행동을 보고는 마침내 요셉이 감동을 받게 되고, 자신이 바로 형제들의 동생 요셉이라고 밝히게 된다
실로 베냐민 인질 사건에서도 ‘유다’는 사람을 살리고자 노력합니다. 그것도 자신이 타국에서 종이 되어서라도 동생과 아버지를 살리고자 했습니다. 유다와 그 후손이 왜 하나님의 축복을 한껏 받았는지를 알게 해 주는 이유입니다.
이제 유다와 그 후손들이 어떠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창] 49:8 |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
[창] 49:9 |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
[창] 49:10 |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
[창] 49:11 |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
[창] 49:12 |
그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리로다. 할렐루야! |
결론)
이번 '르우벤'과 관련된 말씀을 보면 르우벤이 간통을 저지른 죄악과 아울러, 르우벤보다 더 사람을 살리고 그리고 자기 희생까지 했던 유다의 모습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자신을 비우고 희생하고 내려놓는 용기와 믿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걸 실천한 사람이 유다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밤도 우리는 하나님께 복 받기를 기도하는 것 이상으로, 그 무엇이 중요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늘 성실하게 하나님과 내 형제를 사랑함이 얼마나 큰 복의 근원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참고: 김수태&설원/편집: 익선051614
'설교모음(Korean sermons)'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귀에 들린 대로 행하리라 (민14 : 26 – 35) (0) | 2014.06.02 |
---|---|
비전의 사람,요셉(창37:18~28) (0) | 2014.06.02 |
긍휼히 여기는가?(마5:7) (0) | 2014.06.02 |
침례 요한의 교훈 (요 3:22~30) (0) | 2014.06.02 |
비록, 없을 지라도의 믿음(합1:1~17, 2:1~4) (0) | 2014.05.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