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모음(Korean sermons)

긍휼히 여기는가?(마5:7)

호걸영웅 2014. 6. 2. 21:40

 

긍휼히 여기는가?(5:7)

 

 

 

[]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 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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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은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이란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히브리어로 긍휼이란 “라하밈”이란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어린 생명인 태아를 품고 있는 여성의 자궁을 의미하는 단어라고 합니다.

 

히브리어는 원래 알파벳 자체마다 어떤 형상을 상징합니다. 영어 알파벹 A에 해당하는 알렙이란 글자는 , B에 해당하는 베드는 집을, G에 해당하는 기무우는 낙타를 상징합니다.  고로 라하밈이 임신한 여인의 자궁을 상징한다 해서 이상할 일은 없습니다.

 

2.어머니는 결혼을 해서 아기를 잉태하면 말조심과 행동 조심, 심지어는 먹는 것 까지도

자신의 마음대로 먹지를 아니하고, 뱃속의 아기를 위해 10개월을 조심스럽게 보냅니다.

 

감기약 조차도 함부로 먹으면 아니 될 뿐 더러, 술 담배나 몸에 나쁜 흥분제가 각성제 따위는 절대 먹어선 아니 됩니다. 어떤 약이든 의사나 약사에게 물어 보고 먹어야지 그렇지 아니하면 큰 위험이 아기에게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10개월을 애지중지 조심조심하며 배 속에서 잘 자라도록 하여 결국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 가운데 아이를 출산합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모든 수고가 여기서 끝이 나면 좋았으련만, 어머니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 출산한 아이에게 자신의 젓을 물리고 젖 몸살을 마다 않고 아기를 위해 희생합니다. 몇 년 전, 아이를 많이 낳은 어머니가 골다공증에 잘 걸린다는 통계가 있었는데, 그 의미는 자녀를 낳아 젖을 먹이는 동안 어머니의 뼈가 녹아 내릴 만큼 많은 영양분을 빼앗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기를 키우는 어머니는 아기의 기저귀를 밤낮없이 수도 없이 갈아 채워주어야 하고, 옷가지와 요를 빨아 소독을 하고 갈아주느라 잠 한번 편히 잘 수 없습니다. 잠을 자다가도 아기가 울면 업어서 달래고 안아서도 달래야 합니다.

 

그리고 젖을 뗄 때 즈음엔, 온갖 몸에 좋다는 음식재료를 구해다가 정성껏 이유식을 만들어 아기가 잘 자라도록 쉼 없이 애쓰고 수고하십니다.

 

자식이 점점 자라면서 어머니는 당신 입에 들어가고 당신 몸에 걸치는 것 조차 아까워하시면 서도, 자식이 배불러 하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행복해 하시는 끝없는 사랑을 주시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끝나면 진짜로 좋을 텐데 이렇게 금이야 옥이야 키운 자식이 잘못되어

세상으로부터 용서받지 못하고 손가락질 받는 죄를 지은 불효막심한 자녀가 되었을 때 조차도  

어머니는 당신의 가슴으로 파고드는 자식을 따뜻하게 품어준다는 것입니다.

 

3.한국영화 중에 마더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어머니의 본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영화라고 저는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어머니의 사랑은 한계가 없고 이성과 논리도 존재하지 않기까지 한다는 의미의 영화입니다.  그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28살의 청년 도준(원빈  주연)은 어머니(김혜자)와 약재상에서 일하는 지능이 좀 모자라는 청년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인 도준을 세상에 둘도 없는 착하고 사랑스러운 아들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준이는 28살 청년답지 못하게, 마치 어린애처럼 어수룩하고 사고를 많이 치고 다니는 그런 철부지 청년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어머니의 걱정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한 동네의 소녀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사건에 도준이 가담되었다는 혐의가 덮어 씌워집니다. 도준이의 어머니는 아들인 도준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경찰은 사건을 종결하고 변호사는 돈만 밝히기만 합니다.

 그러던 중 평소 불량 청년 진구라는 사람이 범인으로 다시 지목을 받으려던 중, 어머니는 도준이가 살인을 하는 것을 목격했음을 알고 결정적인 제보를 하려던 한 고물상주인을 몰래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 도준이가 진범이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을 감옥에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증인인 고물상 주인의 머리를 때려 죽이고 집에 불을 지릅니다. 이는 바로 자기 아들을 보호하려는 모성본능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도준이는 결국 무죄로 풀려나게 됩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죄책감과 모성본능의 갈등 속에서 방황하며 반은 실성하다시피 되어 노란 꽃이 만발한 유채꽃 핀 벌판에서 덩실 덩실 춤을 추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잘못된 결말을 보여 주지만 모성애이긴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어머니들의 끝없는 자식에 대한 사랑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어머니의 끝없는 사랑이요 긍휼입니다.

 

4. 그런데 우리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이러한 母性愛的 성품을 소유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은 편파적이거나 공의를 떠난 잘못된 사랑은 결코 아닙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母性愛的 사랑, 라하밈의 특성을 다윗은 이렇게 찬송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시편 121:3~6)

 라고 했습니다.

 

5.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 중에“엘 샤다이”라는 히브리 말이 있는데, 이 말의 뜻은“가슴의 하나님”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죄악 된 인간을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가슴으로 이해하고 품고 돌보고 도와주신다는 뜻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지옥에 가야 마땅한 추악한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시면서 까지, 우리를 품어 안으시고 그리고 구원의 길을 열으시고, 영원히 사랑하며, 돌보아 주시는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입니다.

 

시편 103:13절은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라고 했고

 

이사야 49:15절엔“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여 주십니다.

 

6. 우리 성경의 “긍휼”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가엾게 여겨 동정하다로 되어 있는데 ,

영어성경 KJV에는 mercy라고 되어 있는데, mercy라는 뜻을 살펴보면,

먼저 하나님의 은총,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 사형수에 대한 감면이나 사면,

그리고 연민의 정, 자비, 관용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고로 mercy라는 단어는 죄인들인 우리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을 좀더 실감 있게 느끼게 하는 단어가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영어 단어로서 긍휼은 Compassion이라고 표현하는데,

Compassion 이란 단어는 Com(함께 나누다)이란 단어와 Passion(수난, 고통)이라는

두 단어로 합성된 단어로 그 뜻은 함께 고난이나 수난을 받는다는 뜻이 됩니다.

 

아담의 원죄를 물려받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그 마음이 추악하여 이기적이며, 호전적이며,

탐욕적인 본성이, 참된 하나님의 성품인 긍휼과 자비와 용서와 사랑이 망가트려 버렸습니다.

 

이러한 죄로 오염된 폭력적이고 악한 인간이 이웃과 원수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나타낼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야만 합니다.

 이것은 윤리 도덕과 철학의 힘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7.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긍휼과 자비와 용서와 사랑의 근원이십니다.

 

렘애 3:22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외칩니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마태 9:13에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야고보는 약 2:13에서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고 외칩니다.

 

8. 동방의 의인 욥은 욥기 29:12~16절에서 자신은 긍휼을 베풀기 힘 썻던 사람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는 내가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줄 자 없는 고아들을 건졌음이라 .망하게 된 자도 나를 위하여

복을 빌었으며 과부의 마음이 나로 인하여 기뻐 노래하였었느니라.

내가 의로 옷을 삼아 입었으며 나의 공의는 도포와 면류관 같았었느니라.

나는 소경의 눈이 되고 절뚝발이의 발도 되고 빈궁한 자의 아비도 되며

생소한 자의 일을 사실하여 주었으며”라고 말입니다.

 

욥의 마음이 왜 이러한 긍휼의 마음이었을까요? 오로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닮는 긍휼의 사랑을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9.오늘날,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삶 자체를 고통스런 투쟁으로만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삶은 무엇이든 비난하기 바쁘며, 불신과 불평과 불만으로 좇기듯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늘 부족을 느끼므로 감사할 것이 거의 없다고 생각하며 삽니다.

조그만 자극에도 움츠러들고 공격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삭막함 그 자체가 됩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기엔 그 마음이 너무도 비좁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다가가 위로와 격려와 소망의 메시지를 삶으로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긍휼의 의미요 전도와 선교의 의미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웅장하고 거대한 건물과 수많은 교인 수 보다는, 오히려 이 긍휼의 사역이 얼마나 잘 나타나는 교회인가 아닌가를 자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으리라!

 

10. 10:30~37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느끼는 점이 있습니다. 내 시간과 물질과 수고함 없이 긍휼을 베풀 수 는 없다는 것이지요. 긍휼은 곧 희생입니다.

  

결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신 여러분!

지난 여러분의 믿음 생활 속에서 과연 나의 삶 속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인 긍휼을 나타내며 살았는가? 하는 점을 조용히 돌이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그저 나 살기만 바쁘고 여유 없이 이웃의 어려움과 고통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이 살진 않았는가? 나의 기도가 필요하고 위로가 필요한 자를 위해 기도하여 주었는가? 나는 누군가를 지적하고 비판하기 바쁜 사람이었는가 아니면 누군가를 감싸주는 사람이었는가? 그리고 삶의 고통에 시달리던 형제를 위해 단 한번의 격려의 메시지나 위로를 주었던 사람이었는가? 오늘도 지옥 불 못으로 던져지는 수십억의 영혼들을 위해 우리는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가? 고로 우리의 긍휼은 자선과 선교의 동참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는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긍휼 없이 살아왔다면 여러분이 참으로 고통스러울 그날에, 하나님을 포함하여 그 누구도 당신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을 것이란 경고의 말씀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없고, 여러분이 누구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여러분을 사랑해줄 사람을 찾아선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공짜란 없다는 말이 맞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일부는 마땅히 긍휼에 투자되고 지불되어야 합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은, 나만 잘살면 되고 나만 살아남으면 그만이라는 요즘 같은 악한 때에, 긍휼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제 고통 받는 지체들을 위해 기도하며 사랑의 손길을 뻗는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힘들고 지친 그들과 함께 있어 주십시오. 함께 눈물을 흘려주십시오. 포옹해 주십시오. 손을 잡아 주십시오. 그들의 말과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나누어 주십시오. 그리고 기도해 주십시오. 그러할 때,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그리고 영광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이전과 달리 따스한 온기와 밝은 소망의 빛이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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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金鐵鎬 / 편집: 익선 052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