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부터 난 지혜 (약 3:13-18)
13. |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
14. |
15. |
16. |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
17. |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
18. |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
서론)
오늘 본문에서 사도 야고보는 누가 참된 지혜자인가? 누가 진정한 총명자인가를 성도들에게
질문합니다.
왜 이 질문을 하고 있습니까? 당시에 교회 속에서 잘못된 세상적 지혜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지혜 있는 사람인 것처럼 뽐내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이런 문제 상황들을 전해 들은
야고보 사도는 하늘로부터 온 참된 지혜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럼 과연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혜, 곧 위로부터 난 지혜는 어떤 것들일까요?
본론)
가)먼저 거짓된 지혜가 있다 했습니다.
1. 땅에 속한 거짓된
지혜가 있습니다.
14절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라고 합니다.
여기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인 거짓된 지혜는 시기와 다툼과 예수의 복음을 거스리는 것이라 했습니다.
마음의 독한 시기와 다툼의 기원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이 아닌 마귀로부터 온 것이라 했습니다.
그 당시 로마제국은 헬라철학과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다 보니까, 이방인 교회 속에 헬라 철학과 우상숭배적 사상의 영향이 섞여지면서, 교회의 진리가 많이 왜곡되었습니다. 특히 헬라철학은 매우 논리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철학적인 사람들이 가는 곳 마다 다툼과 분쟁이 있었다고 야고보는 지적합니다. 또 율법주의도 복음의 적이었습니다. 행위도 있어야 위로워진다는 거짓복음이
계속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거짓지혜의 특징이 나타나는데 곧 마음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다고 합니다.
C.S 루이스라고 하는 유명한 기독교 사상가가 쓴 “일곱 가지 악과 선”이라는 책에 보면 “시기심은 가장 혐오스러운
악”이라고 합니다. 시기심이란 다른 사람들이 잘 되는 것이나
다른 누군가 성공하면 용암처럼 분노가 계속 끓어오르고, 성난 방울뱀처럼 적대심의 머리를 치켜세우게 됩니다.
그래서 ‘황금의 입을 가진 설교자’라고 칭찬을 들었던 존 크리스소톰은 “시기는 의복을 갉아먹는 좀 벌레처럼 사람을 갉아 먹는다”라고 했습니다.
‘바실’이라는 사람도 “시기심은 가장 미개한 형태의 증오”라고 했습니다.
구약에 사울 왕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울 왕은 이스라엘의 왕이었지만, 다윗이
전쟁터에서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오자, 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높이면서 환영하는 모습을 봅니다.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18:9)라는 말을 듣습니다 .
그때부터 사울은 “왜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을 돌리는가? 이제 그가 더 얻을 것이 이 나라밖에 무엇이냐”(삼상18:8)라고 하면서 다윗을 시기하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다윗과 사울의 관계는 서로 원수의 관계가 됩니다. 사울의 인생의 모든 것이 시기심 때문에 망가져 버립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가 되었습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매일 쫓아다니다가 수치를 당하기도 합니다.
만약에 사울이 그때
다윗을 진정으로 축복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람들이 다윗이 만만이고 자신이 천천이다라고 할 때에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대한 용사를 선물로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를 축복하십시다! 함께 즐거워하십시다! 그는 나의 사랑스런 사위올시다!”라고 하면서 다윗을
축복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평생토록 해피한 노후를 보내었을 것입니다.
결국 사울, 그는 축복의 말을 하지 못해 수치스러운 역사를 남기게 됩니다.
나)참된 지혜, 위로부터 난 지혜가 있다 했습니다.
13절= “저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라고 했습니다.
여기 위로부터 난 참 지혜와 총명의 사람은 온유함으로 선행을 하기 힘쓰는 사람입니다.
본래 온유의 이 단어는 “사나운 짐승을 훈련시킬 때” 사용되었습니다. 사자나 야생마,
이리 같은 것들을 훈련시킬 때 잘 훈련이 되면, 주인이 “온유해졌어”라고 말을 했답니다. 힘이 잘 조절되어 유익한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도록 훈련된 힘이 온유인 것입니다.
화가 나도 있는 그대로 화 내지 아니하고 지긋이 누를 수 있는 능력이 온유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온유함이 특징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온유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자니”라고 하시면서 온유함의 선한 증거를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온유함의 지혜는 철저하게 남에게 도움을 주는 삶을 살게 됩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합니다. 그 지식이나 그 능력으로 남을 살리는 삶을 살아갑니다.
사실 정말 강한
것은 온유함입니다. 운동을 할 때도 보십시오. 너무 힘을
주어 배트를 흔들거나 주먹을 휘둘러 보십시오. 야구의 경우에는 폭투가 나오고, 권투의 경우에는 금방 지치고 맙니다. 축구의 경우에도 다리에 너무
힘을 주면 볼이 헛나가기 쉽습니다. 골프 공을 칠 때도 채를 휘두르면서 공을 치는 순간에 손아귀에서
힘을 빼라 합니다. 안 그러면 공이 좌로 우로 마구 비뚤어지면서 날라가고 맙니다. 고로 골프 치는 사람은 손에 힘 빼는데 3년 걸린다고 합니다. 저는 5년 되도 잘 안됩니다. 조금
됩니다. 그래서 강한 것은 쉽게 부러진다고 말을 합니다. 우리의
마음도 너무 힘을 주면 어떻게 됩니까? 부러집니다.
높은 고층 빌딩 지을 때, 설계자들은 반드시 빌딩상부가 크 바람이 불면 일이 미터나 이삼 미터가 흔들 흔들하며 휘어지도록 설계를 합니다. 안 그러면 태풍에 빌딩이 부러지기 때문입니다. 힘을 뺍시다.
한 목사님이 목회를
하면서 느낀 것이 있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장기목회를 하시면서 목회를 잘 하시는 목사님들을 만나보면
온유하시다는 것입니다. 웬만한 일에도 표정이 변하지 않고 유하게 모든 것을 물 흐르듯이 유하게 목회를
하십니다. 그러니까 장기목회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모든
성도님들에게도 외유내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마음은 강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말과 태도는 정말 부드러워야 합니다. 그러면 복을 받습니다. 사람이 붙습니다. 일이 화평하게 이루어집니다. 교회에 덕을 세웁니다.
성경에 보면 온유함의 삶으로 삶의 선한 열매를 맺은 대표적인 증인이 바로 이삭입니다.
이삭이 흉년을 만나서 그랄로 이주하게 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농사하였는데 하나님께서 100배의 결실을 맺게 하셨습니다. 이상한 것은 그 흉년 때에 이삭이 샘을 파면 물이 펑펑 쏟아져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흉년 때에 이삭은 양과 소떼가 크게 늘어서 부자가 됩니다.
그러자 그랄 사람들이 이를 시기하여 결국은 평지에서 그랄 골짜기로 이삭을 좇아냅니다. 그런데 그랄 골짜기에서 우물을 파니까 또 물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삭의 종들이 우물을 파서 우물 물이 또 나오자 그랄 목자들이 와서 ‘이 물은 원래 우리 것이다’라고 하면서 빼앗습니다. 이렇게 3번씩이나 빼앗습니다.
여러분 우물을 파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그리고 목축업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물은 생명줄과 같습니다.
그런데 3번이나 우물을 빼앗기면서도 이삭은 온유함으로 다투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이삭이 온유함으로 행하고 났을 때 그 밤에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서 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삭을 괴롭히고 우물을 빼앗던 그랄의 왕 아비멜렉이 이삭을 찾아와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언약을 맺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는 여호와께서 복을 받은 자로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어떻셨습니까? 정죄를 당하시고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를 지시면서 올라가실 때 그분은 온몸에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자기를 위해서 천사를 수천명을 동원하고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과 권세를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구언을 위해서 온유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온유함으로 끝까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날마다 본받아야 합니다.
3. 위로부터 난 지혜는 온전한 인격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17절=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보면 ‘위로부터 난 지혜의 사람’은 8가지의 균형 잡힌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첫째 성결합니다. 다음에 화평, 셋째
관용, 넷째 양순, 다섯째 긍휼, 여섯째 선행(선한 열매), 일곱째
공평,즉 편벽이 없으면, 여덟째 정직, 곧 거짓이 없다라고 합니다.
이 부분은 다음 기회에 좀 더 나누기로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모두의
삶 속에서 이런 지혜의 성품들이 풍성하게 드러나게 되시기를 참된 지혜의 근본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참조: 박춘수/ 편집: 익선 01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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