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서 강해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의 예루살렘 성전 모독 사건

호걸영웅 2017. 6. 15. 02:30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의 예루살렘 성전 모독 사건

(11:31)

본문은 헬라 제국의 4대 분할 왕국 중 하나인 시리아 왕국의 셀류쿠스 왕조 제8대 왕()인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B.C. 175~163)가 예루살렘 성전(聖殿)을 모독(冒瀆)한 사건에 대한 예언(豫言)을 기록(記錄)하고 있다. 이는 역사적으로는 유대를 독립시킨 마카비 혁명(B.C. 166)의 기폭제가 된 것으로 그 의의(意義)가 참으로 큰 사건(事件)이었다.

 이미지 검색결과

또한 구속사적으로 볼 때 이는 종말에 적그리스도가 자신을 하나님이라 칭하면서 성전에 "멸망의 가증한 것"(24:15)을 세우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모독(冒瀆)할 것에 대한(살후2:4)  예표적(豫表的) 사건으로서도 그 의의가 큰 사건(事件)이었다.

따라서 비록 본문은 본 사건이 실제로 발발(勃發)하기 약400여 년 전에 본 사건에 대해 주어진 예언(豫言)이지만 이 사건을 살펴보는 것은 일차적으로 다니엘의 예언이 얼마나 정확하게 성취되었는가를 확인하게 하는 것이며, 나아가 말세에 등장할 적그리스도에 대()한 분명(分明)한 경계(警戒)가 되게 하는 것으로 그 의의가 큰 바, 이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에피파네스의 등장 배경 1494997552003-1187358209.jpg

에피파네스는 시리아 왕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정복자인 안티오쿠스 3(B.C. 242~187)의 셋째 아들로서 그의 형() 셀류쿠스 4세 필로파토로(B.C. 187~175)의 뒤를 이어 셀류쿠스 왕조(王朝) 8대 왕()으로 즉위(卽位)했다. 에피파네스는 왕()이 되기 전에 14년 동안 로마에 인질로 잡혀 있었다. 그 이유는 그의 부친(父親) 안티오쿠스 3세가 B.C. 190() 카르타고의 장군(將軍)인 한니발과 연합(聯合)하여 로마와 벌인 서머나 전투(戰鬪)에서 크게 패()한 후()에 그를 볼모로 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에피파네스는 로마에서 14() 동안 살면서 헬라 문화(文化)에 깊이 심취(心醉)했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그는 왕이 된 후에 정치, 경제적으로 매우 불안한 상황을 바로잡고 정치적 파벌 싸움을 잠재우기 위()하여 강력(强力)한 헬라화 정책(政策)을 추진(推進)하였다. 그리고 나아가서 그는 올림피아(Olympia)의 제우스(Zeus) 신상의 모습을 따서 자신의 우상(偶像)을 만들고 백성들로 하여금 숭배(崇拜)하게 했다.

"에피파네스"(Ephipanes)란 이름은 "명백히 나타난 신"()이라는 의미의 헬라어 "데오스 에피파네스"에서 따온 것으로 자신(自身)을 신격화(神格化)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에게 "에피마네스"(Epimanes)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는데 그것은 "미친놈", "정신병자"(精神病者)란 뜻이다.

2. 성전 모독 사건의 발단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의 성전(聖殿)을 모독(冒瀆)하게 된 근본(根本) 원인(遠因)은 그의 헬라화 정책(政策)에 있었다. 에피파네스는 왕위에 즉위하자마자 시리아 왕국은 물론 유다 지역까지도 장악하여 강력한 헬라화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애굽의 프톨레미 왕조(王朝)와 가까운 유대의 대제사장 오니아스(Onias) 3세를 몰아내고 자신의 헬라화 정책(政策)을 적극(積極) 지지(支持)하는 야손(Jason)을 대사장직에 앉혔다.

그러다가 다시 유대인의 종교적 결속을 와해시키기 위하여 야손(Jason)을 몰아내고 제사장 아론의 혈통도 아닌 베냐민 지파 사람인 메넬라우스(Menelaus)를 대제사장으로 세웠다. 그러던 중에 B.C. 170년 에피파네스는 이집트를 침공하게 되었다. 그것은 당시 이집트 왕국의 왕인 프톨레미 6세 필로메트로가 과거 안티오쿠스 3세에게 빼앗긴 코엘레 시리아(Coele-Syria) 땅을 되찾으려고 전쟁(戰爭)을 준비한다는 사실을 에피파네스가 미리 알고 선제 공격(先制 攻擊)을 했던 것이다.

이 전쟁에서 에피파네스는 이집트를 완파(完破)하여 이집트를 멤피스와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양분하고 프톨레미 6세의 동생인 프톨레미 7(), 피스콘(B.C. 170~117)을 또 다른 왕()으로 세워 두 정부(政府)가 서로 경쟁(競爭)하도록 만들어 놓고 본국(本國)으로 귀환(歸還)하였다(25~27).

그 후() 1년 뒤인 B.C. 169()에 이집트의 두 형제(兄弟) 왕은 에피파네스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연립(聯立) 왕정을 수립하게 되었다. 이에 에피파네스는 재차 이집트 정복에 나서게 되는데(28), 먼저 프톨레미 6세가 다스리던 멤피스를 정복하고 거기서 다시 진군하여 프톨레미 7()가 다스리던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기 직전(直前)에 이집트에서 철수(撤收)하라는 로마 원로원(元老院)의 최후(最後) 통첩(通牒)을 받게 되었다.

로마에서 인질로 14년 동안 살았던 그는 로마 제국의 막강(莫强)한 군사력(軍事力)을 보았었기 때문에 감히 그 최후(最後) 통첩(通牒)을 항거(抗拒)하지 못하고 철수(撤收)하지 않을 수 없었다(29). 그리고 철군(撤軍)하는 길에 시리아와 로마 사이의 완충 지역에 있는 유대의 충성(忠誠)을 확보해 두기 위하여 유대 지역에 이전에 비할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헬라화 정책을 시행하게 되었다(33).

3. 성전 모독 사건

유대에 대()한 에피파네스의 헬라화 정책(政策)의 제1목표는 유대교를 말살하고 헬라 종교(宗敎)를 그 지역에 심는 것이었다. 이에 에피파네스는 2 2천의 군대를 파견하고 유대인들이 안식일에는 싸우지 않을 것을 이용해 안식일(安息日)에 예루살렘을 공격 하게 했다.

이로 인해 예루살렘은 대부분 약탈(掠奪)당하고 불태워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죽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奴隸)로 잡혀 갔다. 그리고 B.C. 167년에는 드디어 유대인들이 조상(祖上) 대대로 지켜 오던 율법(律法) 준수를 금하기에 이르렀다. 즉 안식일 준수(遵守), 절기시에 행하는 축제(祝祭), 번제 제사, 어린아이의 할례(割禮) 등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율법서(律法書)를 모두 불태우며 성전 제단에서 부정한 제물로 우상을 숭배(崇拜)하게 하고 유대인들에게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强要)했다. 그리고 이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어기는 자()는 누구를 막론(莫論)하고 사형(死刑)에 처하도록 했다.

이같은 가증스러운 행위(行爲)가 절정에 이른 것은 B.C. 167 12 16일이었다. 성전(聖殿)에 제우스 신상(神像)이 세워지고 번제단(燔祭壇) 위에 돼지고기 제물을 바쳤다. 그리고 이같은 제사를 매월 25()에 지내게 했는데, 이 날은 에피파네스의 생일(生日)이었다.

유대인들로 하여금 에피파네스 자신(自身)을 위해 제우스 신상 앞에서 제사(祭祀)를 드리게 한 셈이다. 그러나 이것은 에피파네스의 크나큰 실책(失策)이었다. 유대인들의 종교성(宗敎性)을 전혀 이해(理解)하지 못했었다.

또 그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전통이 마치 이집트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무조건(無條件的) 독단적(獨斷的)으로 이를 폐지(廢地)하고 헬라화 시키도록 하였는데 이는 유대인들의 감정을 극도(極度)로 자극한 것이 되었고 결국 마카비 혁명(革命)이라는 유대 독립(獨立) 전쟁(戰爭)의 도화선(導火線)에 불을 붙인 셈이 되고 말았다.

4. 의의(意義)

다니엘의 예언대로 B.C. 167년 에피파네스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더럽혀지는 사건이 역사적(歷史的)으로 발생(發生)했다. 이처럼 다니엘에 의해 성전 모독(冒瀆) 사건이 예언되고 이것이 역사적으로 분명히 성취된 사실은 비록 표면적으로 볼 때 역사가 마치 권력을 가진 이 세상의 악한 세력에 의해 좌지 우지되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그 배후(背後)에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攝理)의 손길이 작용(作用)함을 증거(證據)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에피파네스의 성전 모독 사건은 궁극적으로 세상 끝날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신성(神性)을 모독하고 도전할 것을 예표(豫表)하는 것인 바, 그러한 적그리스도의 모독(冒瀆)도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 가만히 보고 계시기 때문이 아니라 이 세상에 죄악(罪惡)이 관영(官營)하여 최종 심판하실 날까지 잠정적(暫定的)으로 허용하심 때문이며 이제 성도들은 결코 놀라거나 의아(疑訝)해 할 필요(必要)가 없음을 교훈(敎訓)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절대(絶對) 주권아래 있음을 깨달을 때 우리 성도들은 환난 가운데서도 오히려 소망(所望) ()에 찬양하는 역동적(力動的)인 신앙(信仰) 생활(生活)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랜드 종합주석>

외경 마카비 1(The First Book of Maccabees)가 보여주는 마카비 반란

 가톨릭에서 제2정경으로 삼고 있는 마카비서는 1서와 2서로 나뉘어 있다. 마카비의 원래 이름은 유다스 마카베우스(Judas Maccabeus)이며 주전 2세기에 그리스의 셀류코스(Seleucid: 셀루시드)제국이 유대 땅을 점령하였을 때 유대 백성들과 함께 항전하여 셀류코스 군대를 몰아내고 독립적인 유대왕국을 설립한 영웅이다.

마카비서는 원본이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으나 그것은 분실되었고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중요한 버전은 그리스어 번역본으로 70인역(셉트아진트)에 의한 것이다. 가톨릭, 정교회, 콥틱교회 등은 마카비서를 정경(또는 제2정경)으로 간주하고 있으나 개신교들은 경외서 또는 제2정경으로 간주하고 있다. 유태교에서는 마카비서를 히브리 역사서의 중요한 파트로 인정하고 있으나 그렇다고 종교적인 문서로는 간주하지 않고 있다.

이제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기원전 2세기경 마케도니아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이 유대 땅을 정복하였다. 그 후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은 갈라져서 유대는 그리스의 셀류코스 제국에 속하게 되었다. 점령자인 셀류코스 제국의 안티오쿠스 4(Antiochus IV)는 유대 신앙을 잔혹하게 핍박하기를 즐겨하였다. 이에 유대인들이 봉기하여 결국 셀류코스를 몰아내고 유대 땅에 독립적인 왕국을 세우도록 했다. 이 때에 마타티아스(Mattathias) 가족들이 유대 백성들의 봉기를 이끌었다. , 마타티우스의 세 아들인 유다스 마카베우스, 요나단 마카베우스, 시몬 마카베우스, 그리고 나중에는 시몬의 아들인 요한 히르카누스가 영웅적으로 활약하였다.

 서두에서는 알렉산더 대왕이 유대 땅을 정복하였으나 곧 이어 셀류코스 안티오쿠스가 알렉산더 대왕의 뒤를 이어 통치자가 되었다. 안티오쿠스는 이집트의 톨레미 왕국을 정복한 후 예루살렘을 장악하여 수많은 유대인들을 살육하였고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성물들을 약탈하였다. 그 후 안티오쿠스는 유대인에 대하여 가혹할만큼의 세금을 부과하였고 예루살렘에 성곽을 건립하였다. 안티오쿠스는 유대 백성들이 유대 율법을 따르는 것을 억압하여 유대 백성들을 속박하였다. 더구나 안티오쿠스는 예루살렘 성전에 우상을 세워놓아 성결한 곳을 무참하게 모독하였다. 안티오쿠스는 유대인들의 할례를 금지하였고 심지어 유대인들이 유대교의 경전을 지니고 있기만 해도 잔인하게 처형하였다. 그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성전에 제물을 올리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우상을 경배토록 강요하였다. 우상숭배는 유대인 지도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었으나 우상숭배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일반 백성들을 죽이는 일도 자행하였다. 안티오쿠스는 유대 땅에 그리스의 헬레니즘 문화를 도입하였다. 예를 들어서 예루살렘에 체육경기장을 건설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옷으로 몸을 가린다. 하지만 안티오쿠스는 경기장에서 유대인 남자들이 옷을 벗고 나체로 운동을 하도록 훈련하였다. 한편, 유대인들에게 할례를 금지한 것은 신성한 율법을 어기는 일이었다. 남자들이 경기장에서 나체로 운동을 하게 되면 할례여부를 당장 알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체로 나서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말할수 없는 치욕이었다. 개중에는 그리스화 되는 것을 찬성하는 유태인들도 있었다. 그래서 어떤 남자는 할례를 받은 생식기의 표피를 복구하는 노력도 하였다. 이러한 모든 내용들이 마카비 1서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https://m1.daumcdn.net/cfile211/image/17398E314C4D1599A5EFAF

유다스 마카베우스 이콘

 옛 이스라엘의 사사(판관)와 같은 마타티아스는 이스라엘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들을 규합하여 정복자에게 항거키로 했다. 마타티아스는 유대인들이 그리스화가 되는 것에도 항거키로 했다. 이를 위해 마타티아스의 세 아들이 유대인 군대를 조직하여 항거에 앞장서게 되었다. 유대인 병사들이 안티오쿠스의 병사들과 전투를 함에 있어서 어려운 점도 있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켜야 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는 싸우지 못하고 공격이 있으면 그대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이로서 수천 명의 유대인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하지만 상당수 병사들은 안식일에도 싸워야 한다고 믿었다. 마카비 형제들이 이끄는 용감한 유대 병사들은 마침내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하였다. 이로써 예루살렘 성전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성스러운 장소가 다시 되었다. 유다를 비롯한 마카비 형제들이 백성들을 이끌고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한 것을 기념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최대 축제인 하누카(Hanukkah)이다. 유다스 마카베우스는 유대 땅에서 그리스인들을 영원히 추방하기 위해 로마제국과 손을 잡을 생각이었다. 유다스가 로마제국과의 동맹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동생인 요나단이 그 일을 적극 추진하였다. 대제사장이 된 요나단은 심지어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어 그리스에 대항할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요나단이 세상을 떠나자 동생 시몬이 뒤를 이었다. 시몬도 대제사장이 되었으며 이스라엘의 왕자라는 칭호를 갖게 되었다. 사실상 시몬과 그의 후손들은 이스라엘의 하스모니아 왕조(Hasnomean Dynasty)를 이루었다. 그러나 상당수 유대인들은 시몬 마카베우스를 이스라엘 왕국의 적법한 계승자로 간주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다윗의 자손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시몬은 나라를 평화롭게 번영되게 다스렸다. 그러다가 마케도니아 그리스의 총독으로 임명된 아부부스(Abubus)의 아들로서 애굽 톨레미 왕조의 간첩인 사람에게 살해당하였다. 시몬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요한 히르카누스가 이스라엘을 통치하였다.   

 히브리어에서 마카비(마카베우스)라는 말은 '망치'를 의미한다. '망치'라는 말은 마타티아스의 셋째 아들로서 유대인 항쟁의 첫 번째 지도자인 유다스 마카비에게는 참으로 해당되는 단어이다. 그의 공격은 마치 '망치'로 때리는 것과 같았다. 마카비라는 이름은 전투 중에 병사들의 외침 소리와 같다는 해석도 있다. 유대 병사들은 전투중에 '미 카모하 벨림 야훼'(Mi Kamocha B'elim, YHWH)라고 외쳤는데, 이 말은 출애굽기 15 11절에 나오는 '여호와,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라는 말이다. 바로 마카비라는 것이다. '미 카모아 벨림 야훼'이라는 외침을 멀리서 들으면 마치 '마카비'라고 소리치는 것과 같기 때문에 그런 해석이 나왔다고 한다. 또한 '미 카모아 벨림 야훼'를 약자로 MKBY라고 쓰는데 이는 유대 병사들의 구호인 Mem, Kaf, Bet, Yod 의 약자와 우연히도 같다. '멤 카프 베트 요드'라는 말은 '하늘에 계신 주'(Lord of Heaven)라는 뜻과 발음이 비슷하다. 히브리어 성서의 마카비서의 명칭을 '엠 카프 베트 요드'라고 부르는 것은 여기에서 연유한 것이다. 유다스 마카베우스는 히브리어로 예후다 하마카비(Yehudah HaMakabi: 망치의 유다)라고 한다.

 

051717 안익선 목사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