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강해

호세아 3,4장 강해(3:~4:19) < 전심으로 하나님만 섬기라>

호걸영웅 2017. 7. 10. 10:09

      호세아 3,4장 강해(3:~4:19) < 전심으로 하나님만 섬기라>

1.
서론
3
장에서는 남편을 떠나 음란한 길로 행하는 고멜을 호세아가 다시 찾아가 은 30세겔 정도(약 반년 치의 노동자 임금)를 주고 사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돈을 주고 사 오시는 모습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신 변함없는 사랑과 간곡한 타이름을 강조해 보여 주십니다. 3장에서 건포도 떡은 가나안에 침공했을 때, 그들의 음식인 건포도 떡이 참으로 별미였음을 입증해 주는 내용도 나옵니다.

 

4장은 호세아서의 본론이 시작되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호세아는 이스라엘에 진실도 없고 사랑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음을 탄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수 없다고 했어요. 그들은‘영적인 불감증’에 걸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의 척도이며, 거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로 역사하면 우리의 비뚤어진 심성을 바로 잡을 수 있고 잘못된 생각도 고칠 수 있습니다.

2. 본론
1
: ‘변론하신다’는 것은 법적인 용어로서 검사가 피고인에게 선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완전한 심판의 선고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책망하실 때 그것을 인정하고 회개하면 아직도 기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기 전에 율법과 계명에 근거해 그들의 잘잘못을 판단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해버리고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물론 겉으로는 하나님을 그럴듯하게 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회중이 모이는 건물이나 사람 숫자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로 선포되는가 그리고 그 말씀을 담는 그릇이 깨끗한가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없는 것은 진실과 사랑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었습니다. 진실은 ‘에메드’ 즉 진리라는 뜻인데, 옳은 것을 말할 뿐만 아니라 옳은 일을 행하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충실히 지키는 것입니다.

인애, 즉 ‘헤세드’란 언약을 지키며, 목숨을 건 사랑, 책임을 지는 사랑,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약자들과 고통 받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자비를 일컫습니다. '안다'란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간에 신실함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는 이 모두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호세아의 진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단이요 탄식입니다.


2
: 그들에게 없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있는 것은 저주와 사기와 살인, 도적질, 간음, 살육과 학살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최소한 하지 말아야 할 구체적인 사항들입니다. 사랑한다면 이런 일들을 행할 수 없지요.

이스라엘은 모처럼 전성기와 번영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실상은 약육강식의 시대였습니다. 약자들은 철저히 소외당했고, 강한 자들만이 살아남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결과적인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교회는 화려하고 큰 건물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진정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과 정의가 살아있는가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절대 성결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성결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았습니다. 결국 맛을 잃은 소금처럼 무가치한 존재로 전락한 것입니다.

3
: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 했는데 왜 땅이 슬퍼합니까? 땅은 ‘언약의 보증’입니다. 언약을 깨뜨리면 땅도 저주를 받습니다. 죄의 우주적인 영향(cosmic effect of sin)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연 세계도 저주를 받습니다. 영적인 가뭄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던 그 백성들이 범죄 하니까 젖과 꿀이 흐르던 땅이 이제 엉겅퀴와 가시덤불을 내고 탄식하며 폐허의 위기에 직면한 것입니다.


4
: 4-10절에서는 제사장들의 죄를 지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제사장을 비롯한 영적 지도자들을 공공연하게 거역하고 모독하면서 자신의 죄를 정당화하고 말씀을 거부합니다. 제사장들이 죄를 지적할 때 그것을 거부하고 제사장을 대적했습니다. 듣기 싫은 말은 듣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위기는 경제적인 위기가 아니었고, 정치적인 위기도 아니었습니다. 영적인 위기였습니다.

5
: 이스라엘 백성들과 거짓 선지자들 모두 망할 것을 말씀합니다. 여기의 선지자는 성직 수행 능력이 없는 거짓되고 부도덕한 종교 지도자를 일컫습니다. 당시에 이스라엘에는 제사장뿐만 아니라 선지자 역시 영적인 어두움 가운데 처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와 영광을 모독하는 자는 그가 어떤 위치에 있든지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하게 됩니다. 따라서 제사장과 선지자가 넘어진 그런 이스라엘은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여로보암 1세 때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세우면서 이미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은 바 있는데 그 때 사실 진실된 제사장들이 남쪽으로 대거 이주하였다고 합니다.

6
: 당시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중심으로서 성전의 흥망은 이스라엘의 운명을 대변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성전을 관리하는 제사장들은 따라서 가장 성결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과 율법을 무시한 채, 자신들의 치부를 위해 사악한 행동을 스스럼없이 자행하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으로 말미암아 결국 이들의 악행은 이스라엘의 운명을 망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암미)이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면 망합니다.

이스라엘이 망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사랑하는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James Packer
교수는 그의 책 ‘Knowing God'에서 Knowing God Knowing about God을 구분했습니다. 전자는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고 생명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으나 후자는 하나님에 관해 아는 학문적인 지식이기 때문에 생명력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과의 ‘진실한 교제’를 의미하며 이것은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또 온전히 그 분 앞에 엎드려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을 포함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뜻이 행동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슬퍼하는 것은 이러한 지식이 이스라엘 자녀들에게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7
: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의 치하에 인구가 증가하였고 국력도 괄목할 만큼 신장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리하여 건국 이래 최대의 번영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악인의 번영은 결코 축복이 아닙니다. 죄와 저주일 뿐입니다.

8
: 당시 제사장들이 얼마나 타락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즉 백성들이 죄를 속하기 위해 바치는 속죄 제물은 제사장의 양식이기 때문에 제사장들은 오히려 백성들이 범죄 하길 바랐다는 것이지요. 죄를 뉘우치게 한 것이 아니라 뇌물처럼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속죄 제물을 먹는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많은 제사가 드려졌지만 이것은 다 헛된 제사였습니다. 참된 회개, 진정한 예배가 없었던 것입니다.


9,10
: 바알 숭배 의식에는 음란한 매춘 등이 동반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며 행음하여도 수효가 더하지 못했습니다. 세상적인 방법으로 하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좇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호황 경제는 거품경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훅 부시면 다 날라 갑니다.


11-14
: 이 부분은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계입니다. 신앙 세계에는 회색 지대가 성립될 수 없으며, 필연적으로 하나님 아니면 우상을 섬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 신앙에 대한 열심을 조금이라도 늦추면 우리 마음은 곧 불신과 악의 세력으로 뒤덮이게 됩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이외의 존재를 신격화하는 것을 창조자의 주권에 대한 모독과 도전으로 간주하시고 응징하실 것입니다

11
절에 보니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이스라엘의 마음을 빼앗았습니다. 해를 거듭하면서 이스라엘은 점점 더 무서운 음행의 죄에 빠져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음행에는 포도주가 동반되었습니다. 술취함과 방탕함이 우상숭배의 두드러진 폐단이었습니다.

여러분, 죄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행위입니다. 마음이 빼앗긴 상태입니다. 우리에게는 항상 이러한 위험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유혹이 있겠다고 생각하는 장소에는 아예 가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죄의 유혹에 약한지를 철저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12
: ‘나무’는 나무로 만든 우상을 가리키며 ‘요술 막대기’는 점치는 데 사용된 지팡이를 뜻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육신적인 욕구에 따라 허탄한 것을 숭배하는 어리석은 모습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아무리 정교하게 새긴 우상처럼 보여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나무와 막대기 조각에 불과했습니다. 아세라나 아스다롯이라는 신성한 이름이 붙어 있었으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마른 막대기에 불과했습니다. 나무나 막대기를 사용하여 점을 치던 미신적인 사술이 편만해 질 정도로 이스라엘이 패역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우상들을 쉽게 섬겼습니까? 그 우상은 자신들의 죄를 지적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이스라엘의 범죄는 자발적이었습니다. 억지로 한 것이 아닙니다.


13
: 바알 신당에서의 음행은 원래 신들의 혼인을 상징하여 다산과 풍요를 빈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호세아 때에는 그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단순한 음란 행위로 변질돼 있었습니다.

14
: 간음한 여인들을 하나님께서 처벌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남자들이 더 문제였기 때문이죠. 이 남자들은 일반 남성들이 아니라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남자였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은 음란합니다. 항상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한다.’ 엄중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거룩하도록 잘 지켜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구별된 거룩한 무리들의 모임입니다. 성령의 전입니다.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15-19
: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을 통치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등진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 이방의 문물과 우상에 심취해 있던 북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중심하여 신앙을 보존해 오던 남유다의 정통성을 인정하시고 그들을 통하여 당신의 나라 건설을 계속 추진하셨습니다. ‘길갈’은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 중심지였으며 ‘벧아웬’이란 문자적으로 ‘죄악의 집’을 의미하며 벧엘(하나님의 집)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하나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지요. 하나님의 집이 죄악의 집, 우상 숭배의 집이 된 것입니다.

16
: ‘넓은 초장’은 즐거움과 풍요와 자유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이스라엘을 축복해 주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가 많이 와도 뚜껑이 하늘을 향해 열려 있지 않으면 아무리 큰 그릇도 소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17
: ‘에브라임’은 북왕국 이스라엘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우상과 동일하게 섬기는 일은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악행입니다. ‘버려두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고 보호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처참한 상태 그대로 버려두는 것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심판입니다.

19
: 이 구절은 앗수르의 공격을 받아 포로로 끌려갈 것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바람’과 ‘날개’는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하나님의 심판과 앗수르 군대를 의미합니다. 포로가 되고 나서야 그들은 지금까지 섬긴 이방 종교의 무력함을 느껴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3.
결론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세상의 풍요를 누리려는 것 무서운 죄악입니다. 항상 깨어 기도하면서 헛된 우상들을 과감히 버리고 오직 주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070417.안익선 목사/참조: Y.J. Choi(브르쉘 한인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