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강해

호세아 2장 강해(사랑에 눈멀어 버리신 하나님)

호걸영웅 2017. 7. 10. 10:05

호세아 2장 강해(사랑에 눈멀어 버리신 하나님)

 

 

서론)

1. 호세아 2장은 크게 둘로 나누어집니다. 전반부 2-13절은 패역한 이스라엘을 징벌하겠다는 선언이요, 반면 14절부터는 징벌이 목적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다시금 사랑의 회복이 목적임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전반부를 ‘징벌적 사랑’이라고 할 수 있고, 후반부를 ‘싸매 줌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론)

)앞길을 막아야 했던 하나님

1. 먼저 패역한 길로 달려가는 이스라엘의 앞길을 막는 사랑입니다. 6-13절은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6, 길을 막고 찾지 못하게 합니다. 7절 길을 잃고 바알을 만나지 못하게  합니다. 9, 흉년이 들고 입을 옷도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11절 희락과 명절을 폐하게 하고, 12= 논과 밭을 황폐하게 만들며, 13= 벌을 줍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먼저 길을 막고, 배 고프게 해야 합니다. 죄의 길을 간다면 막아 주어야 합니다.

그 앞길을 막는 징벌은 결코 심판이 아니며 사랑입니다.

 

2. 한국의 어느 신문에서 보니 한 어머니가 경찰서를 찾아와 울면서 아들을 고발했습니다. “내 아들을 체포해주세요. 저에게 나쁜 짓을 하지는 않습니다만, 폭력배가 되어서 사람들을 폭행하고, 마약을 팔고, 사기를 치고 삽니다. 내 아들이 사람 될 수 있도록 이 아들을 잡아 넣어 주십시오.” 라며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그 아들이 잡혀와서 “도대체 어떤 놈이 날 고자질을 한 거야? 알기만 하면 죽여 버리겠어”하며 행패를 부릴 때, 어머니가 달려와서 “아들아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너를 신고했다. 제발 나쁜 짓 그만하게 해 달라고 내가 다 말했다. 이제 그만해라. 어미는 다른 것 바라지 않는다. 라면 끓여먹고 살아도 떳떳하게 살고 싶구나. 이분들 원망 말고 이 어미를 원망해라. 이 어미를 원망해.” 그렇게 울부짖자 아들도 눈물을 흘리며 순순히 조사를 받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심판이라고 해야 할까요? 사랑이라고 해야 할까요? 기억합시다. 사랑한다면, 막아야 합니다. 사랑 때문에 배고프게 하고 벌을 주기도 해야 합니다. 징벌 없는 사랑은 무조건적 사랑이 아니라 사랑이 아닐 뿐입니다. 죄의 공범이고 방조가 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징벌은 있지만 회복이 없다면, 그것은 처벌과 복수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징벌적 사랑보다 더 큰 회복의 사랑을 베푸십니다. 싸매어줌의 사랑은 징벌적 사랑 다음에 2:14절부터 시작됩니다. 주님은 때리고 심판하고 그래서 배신에 대해 복수하는 것으로 멈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때부터 얼마나 불가능한 용서와 사랑을 시작하는지 보여주십니다.

 

3. 바알에서 이쉬로

먼저 하나님은 용서하기 힘든 음란한 여인 같은 이스라엘을 향해 다시 사랑으로 가득한

남편이 되겠다고 하십니다. 2:16에서 “그날에 네가 나를 남편(이쉬)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했습니다. 여기서 ‘바알’이란 히브리어는 고유명사로 바알 신의 이름이 되고, 보통명사로 ‘남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쉬’라는 말과 ‘바알’이라는 말은 남편을 뜻할 때에도 어감에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는 ‘여자의 상대적 의미로 동등성을 함유한 파트너로서의 남편’입니다. 우리 식으로 옮기면 “여보와 당신”의 관계에서 남편입니다.

 

하지만, 후자는 ‘여자를 소유하는 자로서 법적 권리를 가진 남편’을 강조하는 의미입니다. 즉 군림하는 왕으로서 소유자의 의미입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하나님은 우리와 관계를 회복하시는데, 군림하는 주인의 모습으로서 ‘주종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파트너로서 긴밀한 사랑을 나누는 ‘연인관계’로서 세워가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게 지금 가능한 이야기일까요? 솔직히 당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는 간음한 아내와 남편의 이야기입니다. 간음한 아내가 있는 상황, 회복 불능입니다. 받아 들여주기도 힘든 상황인데, 여보 당신의 관계로 간다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4. 유대인 남성이 랍비를 찾아와서 “제 아내가 간음을 했습니다. 이혼해야 할까 봐요.”하면 당시 랍비들은 단호하게 “안돼”합니다. “그럼... 이런 상태에서도 참고 살라는 말입니까?” 랍비는 대답합니다. “그걸 왜 이혼을 하니? 죽여버려야지.” 이것은 유대인의 법 상 이혼이 아니라 죽여야 하는 관계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이 상황은 ‘이혼상황’이 아니라 ‘처형상황’ 입니다. 당시 유대인의 법상으로도 이건 이혼사유가 아니라 죽여야 될 상황이었습니다. 

 

더구나 이런 상황이면 용서하고 받아줘도, 사랑을 회복한다는 것을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내의 경우도, 바람 나서 집 버리고 떠난 남편... 돌아오면 자식들 봐서 또 불쌍해서 받아줄 수는 있어도 “여보 사랑해”라고는 못할 것입니다. 다시 회복하더라도, “내가 이를 악물고 다시 받아줬으니 이제부터는 찍소리 하지 말고 내 말 들어. 내 말에 토다는 날엔 그날로 널 토해버린다. 앞으로 내 앞에서 눈 내리깔고 주머니 손 빼고 집구석에 처박혀 있어.” 이래도 될 상황입니다. (너무 리얼하게 했나요?)

 

그런데, 이처럼 회복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받아 주기만도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은 사랑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간음한 아내를 받아들인 것만이 아니라, ‘이쉬’ 곧 ‘당신’이 되는 사랑을 회복하겠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결국 위대한 용서를 하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난하거나 병들거나 간음할 때에도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고 계십니다. 어찌 보면 그건 ‘미친 사랑’입니다. 내가 어떤 자리에 있었든지 무슨 일이 있었든지, 주님은 나를 끔직히도 사랑하시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5. 더 기가 차고 놀라운 것은 회개하고 돌아온 인간들도 아니데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2장을 보면, “회개하라. 그러면 사랑하리라” 이런 말도 없습니다.  2-13절을 보면 하나님이 징벌하고 길을 막겠다고 하시면서 회복의 반전이 14절부터 나옵니다. 보시면 “회개하면,” 이런 조건이 없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

분노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사랑으로 토닥거립니다. 토닥거리며 위로하며 회복을 시작하겠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거친 들’로 데려간다 하셨는데, 거친 들은 바로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광야를 말합니다. , 첫사랑의 자리로 데려가서 순수한 첫사랑을 다시 시작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15절 하반절을 봐도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했어요.

 음란하고 더러운 여성이 아니라, 어린 아이처럼 순수하던 그 때 모습으로 대해주시고, 출애굽의 시작 때에 뜨거웠던 믿음과 사랑처럼 대해주시겠다는 말입니다. 회개하고 돌아와도 다시 시작할까 말까 할 상황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오히려 첫 사랑으로 돌아가서 너희를 사랑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6. 우리 하나님은 사랑 때문에 눈이 멀어 버리셨습니다. 한 눈 팔아도 용서가 안될 판에, 두 눈 다 팔아버린 이스라엘이지만, 주님은 두 눈 질끈 감고 눈물로 흐려진 두 눈으로 눈 먼 사랑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눈 팔고 하나님 사랑하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눈먼 사랑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너희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문으로 

그렇다면 이런 첫사랑으로 우리를 품어주시는 주님이 우리에게 어떤 소망을 주십니까? 15절을 보십시다.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라고 했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아골 골짜기는 원래‘사망’의 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쉬가 되시는 하나님은 ‘사망의 문,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문’으로 바꾸어주신 것입니다. 전적인 사면이요 용서입니다.

 

아골 골짜기는 여리고 아래쪽에 있는 골짜기로 아간의 죄로 인해 아이성 전투에서 패한 후 그를 죽이고 묻은 곳입니다. ‘고통의 골짜기’인데, 이 의미는 더 아픕니다. 이것이 의를 위한 고난과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은 죄 때문에 당하는 고통’을 말합니다. , 내가 친 사기 때문에 감옥에 갇히는 고통을 말하고, 아버지의 알콜 중독과 아들의 마약 중독으로 인해 온 가족이 경험하는 수치와 고통 따위를 말합니다. 아골 골짜기는 바로 나의 죄로 인해 나와 가족과 공동체가 겪어야 할 고통의 골짜기를 말합니다. 정말 수치스럽고 부끄럽고 남들에게 위로 받기도 힘든 고통을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약속하십시다. 바로 그런 고통으로 가득한 아골 골짜기도 소망의 문이 될 것이다. 마약에 절은 자식보면서, 알콜에 찌든 남편 보면서, 바람난 아내의 빈자리를 보면서, 남들에게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힘든 아골 골짜기의 고통이 ‘소망의 문’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새롭게 장가 드신다는 하나님

그런데 오늘 여기에서 사용된 결혼의 의미는 오히려 유대인들이 13살때 쯤에 하는 정혼 곧 약혼의 의미입니다. 음란한 아내로 인해 결혼생활이 파탄이 나버렸는데도 불구하고, 받아주는 것을 넘어 어린 시절 순수한 모습으로 우리를 여기시며, 다시 약혼 때의 사랑부터 시작하겠다는 말입니다. 신부는 이제 음란한 창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아름다운 신부의 모습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랑되신 주님은 이런 우리는 13살짜리 소녀처럼 순수하게 여기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된 이스라엘을 향해, 19-20절을 보면, 3번에 걸쳐 “장가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무슨 말일까요? “난 너를 절대 버리지 않는다. 영원히 살자. 할 수 없어서 결혼하는 것 아니다. 진실하게 너와 사랑의 결혼을 하고 싶다.”는 우리 하나님의 고백이 깊게 담겨있습니다.

 

결론)

 

지난 날, 우리도 음란한 신부였습니다. 하지만, 그 은혜와 십자가 사랑으로 구속 받았다면 신랑되신 주님 다시 오실 때에는 “순결한 신부”로 잘 준비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 주님 하늘 영광으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우리는 다시 마지막 혼인잔치를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신랑되신 주님께서 하신 아픈 사랑이 되풀이 되지 아니하도록, 우리도 참된 사랑을 통해 진실로 신랑을 맞이할 준비가 된 신부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062717
안익선 목사 /참조:송병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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