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 강해

미가 2장 강해 (이스라엘 지도자와 백성의 죄)

호걸영웅 2018. 1. 5. 03:53

미가 2장 강해 (이스라엘 지도자와 백성의 죄)

서론)

오늘은 미가서 2장을 상고하겠습니다. 미가 선지자의 이름은 '누가 여호와와 같으리요?'라는 뜻이며 그 내용은 당시의 죄악을 책망하는 동시에 이스라엘 장래의 소망을 보여 주었습니다.

 

1장에서 미가는 먼저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심판을 예언했는데, 2장에서는 심판의 원인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런데 1장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죄악을 고발한 데 비해 2-3장에서는 인간 대 인간의 범죄를 책망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두 범죄의 양상은 모두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기인합니다( 8:28).

 

즉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를 무시하고 자신들의 기준에 따라 행동하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자행하는 모든 범죄의 밑바닥에는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는 교만죄가 깔려 있습니다.

 

2장에 기록된 사람들 간의 죄악들을 크게 분류해 보면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권력자의 폭력과 압제(1, 2, 8, 9), 둘째 참선지자를 거부함(6, 7) 그리고 셋째 거짓 선지자를 좇는 것입니다(11).

 

이제 본문을 보시면서 자세히 상고해 보십시다.

본론)

1: 사람이 중심에 악을 궁리를 하며 음모를 꾸민다는 것은 화를 받을 일입니다. ‘잠자리’는 휴식을 위하여 있는 곳이지 악을 계획하기 위한 곳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지도층은 빈약한 자들을 착취하기 위하여 밤중에 조차도 악한 짓을 연구하였습니다. 권력이 있는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이, 그저 탐심을 채우기 위하여 쉼 없이 악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침상에서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반성을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거기서 악을 계획한다면 그는 자아 성찰의 기회를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2
: 남의 물질을 탐내며 남을 학대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릴 때, 그 재앙을 피할 길이 없다 했습니다. 가난한 자의 밭을 빼앗음은 북 이스라엘의 아합 왕이 나봇을 죽이고 그 포도원을 빼앗은 일과 같은 학정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입니다(왕상 21:1-16). 탐심은 제 10계명에서 엄격히 금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이웃의 소유를 탐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탐심은 곧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보다 그 물건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지요.

3
: 지도층 인물들이 악한 짓을 꾀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려 하십니다. 그들이 계획하는 바가 있었듯, 하나님께서도 계획하시는 바가 있다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저들의 반역하던 곧은 목이 장차 꼼짝 못하며 피하지 못합니다. 교만히 행하던 지도자들의 목에 도저히 벗길 수 없는 무거운 멍에가 지워져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게 될 것을 예언하십니다.

 

실제로 이 예언은 앗수르와 바벨론의 침공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이처럼 교만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오직‘회개’뿐 입니다(7:9).

4
: ‘풍자시’란 유다가 당한 일련의 슬픈 사건들에 대해 이방 민족들이 조소하며 즐거워하는 소리를 가리킵니다( 2:6).

 

 이러한 이방인의 비아냥거림은 유다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실 하나님의 명예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당신의 명예가 훼손되심에도 불구하고 유다를 징계하시는 이유는 공의를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5
: ‘줄을 띄워 땅을 나누고 제비 뽑아 분배’하는 것은 ‘약속의 땅을 분할하는 것’을 말합니다( 34:13).

 

이것은 땅을 차지하는 자들이 취하는 행동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희년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의 기업을 받는 의미에서 가나안 땅을 나누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이 같은 축복을 받을 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약속의 땅은 범죄자들에게 분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는 자에게 분배되기 때문이었습니다( 26:3; 11:8).  그러므로 이들의 모든 산업이 다 원수의 것이 되고 마는 비참함을 이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멸망시키는 죄인은 하나님 백성의 회중에 들지 못할 것입니다.

6
: 완악해진 이스라엘은 오히려 참 선지자들의 말을 싫어합니다.

이들은 종말의 예언을 듣기 싫어하였고 오히려 대항을 하였습니다. 본 절은 이 2장의 요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순종하지 않는 강퍅한 자들은 언제나 진리를 전파하는 것 조차 싫어합니다.

 

( 7:16)= 아모스도 역시 같은 금지의 명령을 받은 적이 있었다 했습니다. 사도들도 역시 그런 핍박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명을 받았으니 계속적으 로 예언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미리 경고를 주심은 그들로 하여금 그 악한 길에서 돌이키도록 깨우쳐 주시는 사랑입니다.

 

딤후 4:3=육신의 정욕을 따르는 자는 진정한 전도자의 말씀을 배척합니다. 그들은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둘 것이라 했습니다. 충성된 말은 귀에는 거슬려도 행실에는 유익합니다.(양약은 고구이나 이어행이요 충언은 역이이나 이어행이라/ 양약(良藥)은 고구(苦口)이나 이어병(利於病)이요

충언(忠言)은 역이(逆耳)이나 이어행(利於行)이라-했어요 )
7
: 나아가서 그들은 하나님을 속이 좁고, 성질이 급한 분으로 비난하기에 이릅니다. 그들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주의 사자들을 몰아내려 했을 뿐 아니라 마침내는 자기들의 하나님까지 대적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7:10).

 

회개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들을 원망할 뿐만 아니라 그 심령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발뒤꿈치로 가시나무를 걷어 차는 자와 같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연이어서 거짓 예언자들을 따르는 어리석은 백성들을 질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강퍅한 자들을 벌하심은 결코 성급하심이 아닙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받지 못하는 원인은 대개는 자기 자신에게 달린 것입니다( 18:25-26). 그러나 회개한 자는 자기의 불행의 원인을 자기에게 돌리고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한편 이 같은 하나님의 심판은 악에 대한 징벌 및 ‘남은 자’들의 구원이라는 이중성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한 심판을 내릴 것이나 말씀을 지키는 자는 오히려 유익을 보도록 할 것이되 순종치 않고 세상의 물질만을 탐하는 자들은 오히려 더 큰 멸망이 올 것입니다.

8
: 어떤 민족이든지 망할 때에는 마음이 극도로 악하여져서 동포도 상관않고 핍박하고 강탈하게 됩니다. ‘전쟁터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장정’은 피난민을 의미하는데, 이스라엘 사회에서 그들의 ‘겉옷’을 빼앗는 일은 가장 무자비한 일입니다.

9
: 과부와 고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짓밟는 백성들의 완악함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순종 없이 이웃에 대한 사랑은 자기 기만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준 복’이라는 말씀은 그 어린 자녀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되어 있는 원래의 복된 유업과 축복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포학한 지도자들이 채권자로서 그 할 수 없는 채무자인 과부들의 자녀들을 자기 종으로 데려가거나, 혹은 외국인에게 종으로 파는 것을 가리킵니다(왕하 4:1). 자유의 상실이요 행복의 상실이요 인권의 상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경건한 자는 이런 약한 자들을 돌아보면서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성별 생활을 합니다( 1:27). 그러나 불경건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가장 불쌍히 여기시는 자들을 학대하고 억압하며 권리를 강탈합니다.

10
: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까지 누렸던 번영(대하 26:8)으로 인하여 교만해졌으며, 더욱이 부당하게 탈취한 무력한 동족들의 재산으로 안락하게 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악인의 번영은 아침 안개와 같음을 미가는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의 보호자로서 권력자의 횡포를 간과하시지 않습니다.

11
: 이러한 무리들은 오히려 거짓된 자를 받아 들여서 그로 자기의 선지자를 삼게 됩니다.

 

여기서 ‘포도주’와 ‘독한 술’은 세상 복리와 방탕함과 쾌락주의 물질만능주의를 상징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죄인들에게 이 세상 평안을 말해 주며 걱정 할 것 전혀 없다고 합니다. 거짓선지자들은 사람의 죄악을 무시하고 도리어 사람들에게 아첨하며 기복주의에 빠지도록 합니다. 진리를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이런 거짓된 자를 환영합니다.

12
: 이스라엘의 필연적인 멸망을 선포하던 미가는 12절 에 와서, ‘남은 자’들의 회복에 관해 언급합니다. 이것은 논리상 모순이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진노 중에서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비추어보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남은 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시련을 통하여 더욱 연단될 정의로운 소수의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이 회복의 약속은 메시야의 재림 때에 온전히 성취됩니다. 한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 하에 살게 됩니다.

보통 심판에 이어 회복을 약속하는 것은 선지자들의 일반적인 메시지입니다. 개역 성경에는 ‘보스라 양 떼 같게 하며’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보스라’는 ‘벽으로 둘러막다’라는 뜻을 지닌 에돔의 한 성읍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그 지명의 뜻이 상징적으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이 구절은 ‘요새와 같은 울타리 안에 보호받는 양 떼 같게 하며’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확실한가를 강조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라는 말씀을 추가하여 선포하게 하십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크신 신실하심이 있는 것입니다.

13
: ‘길을 여는 자, , 여호와’는 ‘남은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다양한 사역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인류 구원을 위해 다양한 각도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길을 여는 자’라는 말은 ‘The Breaker'라는 뜻입니다.

 

The Breaker'=이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악의 결박을 깨뜨리시고 우리에게 참된 해방을 주십니다.

 

또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모든 장벽을 깨뜨리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를 대적하는 모든 사탄의 세력들을 깨뜨리시며,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십니다.

마치 북극의 얼음을 깨는 쇄빙선( ice-breaker ship)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참된 자녀를 한데로 모으시고 초장의 양떼 같이 보호하되, 여호와께서 친히 선두로 행하시므로, 여호와의 자녀는 보호를 받게 될 것입니다. 전장에서 훌륭한 지도자는 선두에 섭니다. 백성만 앞세워 죽게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구원의 역사가 하나님의 온전하신 주권적인 사역이심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심으로 독생하신 아들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고, 친히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모든 죄를 사하십니다.

 

이제 이 구속함을 받은 백성들도 달려서 성문에 이르러서는 그리로 좇아 나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그들의 강력한 행진을 비유하는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 오늘의 이 말씀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교훈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은 아무리 주의 백성이라 하여도 고의적인 죄를 지으며 선지의 종말적인 경고를 싫어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실 수 밖엔 없음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질 때 바로 응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반석 위에 우리 인생의 집을 지어야 합니다. 말씀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더욱 약한 자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기를 바로 지키면서 세속에 물들지 않는 동시에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 그리고 장애우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참된 경건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앞길을 열어 주시는 주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여야 하나님의 약속하신 축복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의 남은 생애가 될 수 있습니다.

 

 

 

 

 

010318 안익선 목사/ 참조:Y.J. Ch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