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강해

시편 34편 강해 (응답하시는 하나님)

호걸영웅 2018. 4. 13. 01:09

시편 34편 강해 (응답하시는 하나님)

 1.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2.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3.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4.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5.

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6.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7.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9.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10.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11.

너희 자녀들아 와서 내 말을 들으라 내가 여호와경외하는 법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12.

생명을 사모하고 연수사랑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13.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

 

14.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15.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16.

여호와의 얼굴은 악을 행하는 자를 향하사 그들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

 

17.

의인이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18.

여호와마음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20.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21.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벌을 받으리로다

 

22.

여호와께서 그의 종들의 영혼을 속량하시나니 그에게 피하는 자는 다 벌을 받지 아니하리로다

 

서론)

전 세계적으로 매우 유명한 희극배우는 찰리 채플린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말입니다.

 

 한 사람의 삶이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처럼 보인다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처한 다윗이 처한 상황이 그렇습니다.

시편 34편은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입니다. 시편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을 가리키는 부분이 많지 않은데, 34편은 비교적 분명하게 그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사건이 자세히 기록된 곳은 사무엘상입니다(삼상 21:10~15).


다윗은 매우 두려운 상황에 있었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굳은 결심을 한 것을 다윗이 요나단을 통해 들은 상황입니다. 한시바삐 도망을 했습니다. 음식도 무기도 동료도 함께 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다윗은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갑니다. 그런 그를 제사장 아히멜렉도 이상하게 여길 정도였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어떤 영향력을 가진 사람인지 아는데 그가 혼자 자신을 찾아온 것이 너무 이상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는데, 지금 그의 상황은 아무 것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아히멜렉에게서 약간의 음식을 얻고 골리앗의 칼을 받아서 계속 도망해서 다윗은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갑니다. 다윗의 생각에 사울을 피해 가장 안전한 곳이 어딜까 생각한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적대 관계에 있었기에 그곳이 안전하리라 생각한 것입니다.


(삼상 21:10~15)

8.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여기 당신의 수중에 창이나 칼이 없나이까 왕의 일이 급하므로 내가 내 칼과 무기를 가지지 못하였나이다 하니

 

9.

제사장이 이르되 네가 엘라 골짜기에서 죽인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이 보자기에 싸여 에봇 뒤에 있으니 네가 그것을 가지려거든 가지라 여기는 그것밖에 다른 것이 없느니라 하는지라 다윗이 이르되 그같은 것이 또 없나니 내게 주소서 하더라

 

10.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아기스에게로 가니

 

11.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말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12.

다윗이 이 말을 그의 마음에 두고 가드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13.

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14.

아기스가 그의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15.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하니라

(삼상 22)

1.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 가드는 골리앗의 고향이었고, 그곳의 사람들이 다윗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필 무기라고 가진 것도 골리앗의 칼이었습니다. 골리앗의 칼을 가지고 골리앗의 고향에 간 것입니다. 아기스의 신하들은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는 말을 아기스 왕에게 상기시켰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아기스가 참으로 어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 앞에서…침을 수염에 흘리매” 다윗의 행동이라고는 보기 어려운 행동입니다. 골리앗 앞에 담대히 나갔던 용맹한 다윗과는 다른 미치광이가 된 모습입니다. 미친 자를 죽이면 재수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서인지 아기는 그를 멀리 내 좇으라 합니다.  결국 그곳에서 쫓겨납니다. 그가 정말 미친 줄 알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다윗은 시간을 벌게 되었고 사울의 군대는 그가 블레셋으로 도망친 줄 알고 철수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다시 블레셋의 가드에서 나와 아둘람굴로 가서 그의 형제들과 아버지의 가족, 그리고 많은 사람들과 합류를 합니다. 400여명이 되었다 했습니다.


우리는 글로서 읽고 있기에 우스꽝스럽다고만 할 수 있지만, 사실 다윗은 죽음의 공포 속에서 헤매고 있었던 것이죠.

바로 이런 상황을 벗어나면서 다윗은 이 시편을 기록했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에 대해 기록했습니다. 1-10절에서 그 하나님께 찬양하자 합니다.

오늘 우리는 찬양의 세 가지 요소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

 

본론)

항상 찬양하자(1)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1).

 34편은 다윗 자신이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격려하는 말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에 대해서 1절에서 강조하는 부분은 ‘항상’입니다. 언제나, 계속해서, 끊이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는 다윗의 다짐입니다.

우리가 아는 다윗의 삶을 생각해보면, 물론 그는 하나님을 찬양할 만한 상황이 종종 있었습니다.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막내인 다윗이 왕으로 택함을 받았고, 아무도 감히 대적하지 못했던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단숨에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 후 군대의 대장이 되어 가는 곳마다 승리했습니다. 사람들은 다윗을 높여서,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변심한 사울을 피해 달아나면서 피난 중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찬양을 하자고 합니다.

상황을 이렇게 비관적으로 보려면 한없이 비관적으로 볼 수 있는 상황이었지요. 사실 아무 희망도 없어 보이는 상황입니다.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이런 상황에서 힘들어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엘리야가 그랬습니다. 이세벨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광야로 갑니다. 이제는 충분합니다, 목숨을 거둬달라고 기도했던 그입니다. 모세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온유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잘 이끄는 사람이었지만 그들이 고기를 달라고 불평하며 울자 하나님 앞에 나가서 “내가 그들을 낳았나이까” 라며 이렇게 하실 거면 그냥 자신을 죽게 해달라고 구하기도 했습니다( 11).

또한 베드로도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에는 “모두가 주를 버리고” “내가 죽을지라도”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했지만 예수님이 잡히시자 예수님을 부인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다시 예전의 생업으로 돌아가려고 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상황이 비관적으로 보일 때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도 넘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볼 수 있는 이런 예들 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이런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기쁘고 좋은 일이 많은 때는 신앙적으로도 뭔가 안정이 되는 것 같고 기쁘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는 만찬을 떼는 것도 어렵고 하나님에 대해서 묵상을 해도 그리 감사가 되지 않습니다. 다윗도 아마 그런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도 항상, 계속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우리 역시 좋을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 역시 필요한 다짐이기도 합니다.

이런 다짐이 필요한 이유는 좋지 않은 상황을 우리 육신이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그렇게 불평하려고 하는 우리 육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언제든지 주를 찬양하겠습니다, 기뻐하겠습니다 라는 다짐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좀 더 긍정적인 측면에서 우리가 이런 다짐을 할 수 있는 이유도 있습니다. 바로 어떤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분, 기뻐할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2절에서 다윗이 강조하는 찬양의 측면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상황을 바라보고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와 찬양이 그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자랑하자(2, 4~7)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2). 다윗은 하나님을 자랑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 영혼”이라는 표현은 시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표현인데 의미상으로는 ‘나’와 동일하지만, 좀 더 진정한 마음을 담고 있는 표현입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내가 진심으로 여호와를 자랑하리니…입니다. 여호와를 자랑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4~7절 말씀에 나옵니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선하심을 다윗에게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4).

다윗은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6절에서는 자신을 “이 곤고한 자”라고 표현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사무엘상의 기록을 보면 마치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상황에서 인간적인 기지, 혹은 꼼수로 위험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사람을 속인 것이기 때문에 잘한 일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윗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잊고 그런 일을 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아마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겼던 것 같습니다.

그 상황에서 다윗이 인간적으로 잘했느냐 못했느냐는 지금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느냐는 것이 중요합니다. 연약한 모습을 보였던 다윗, 그 상황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다윗에 대해 최소한 하나님은 다윗에게 신실하게 대하셨습니다. 그렇게 다윗을 건지셨습니다. 다윗도 그 하나님을 잊지 않고 지금 이렇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특별한 경험이지만 다윗만 경험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5). 여기서 “그들”이 누구일까 의아해할 수 있습니다. 다르게 번역하면, “주를 바라보는 자들은 광채를 내고, 그들을 얼굴은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그 얼굴은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어쩌면 자신이 온전히 그렇게 하지 못하고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한 것에 대해서 생각하며 이런 표현을 썼을지도 모릅니다. 아마 그렇다면 다윗은 자신이 기록한 이 말씀의 의미를 더 분명히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일시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경험할 수는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지 않는 것 같은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의문을 던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 얼굴을 하나님께서 부끄럽게 만드시지 않습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원리입니다. 다윗이 그것을 자신의 삶을 통해서 경험한 것입니다. 6절은 4절의 말씀을 다시 반복합니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6). 다윗은 자신을 “이 곤고한 자”라고 하여 2절에 나오는 “곤고한 자들” 중에 자신도 포함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곤고한 자들이 다윗의 찬양을 듣고 함께 기뻐할 수 있고, 다윗이 그렇게 하라고 격려하는 이유는 다윗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곤고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7절에서 다윗은 다시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일반 원리를 제시합니다.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7). 하나님을 계속해서 바라보는 자, 그들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천사를 통해서 그를 경외하는 자를 보호하고 위험에서 건지기 때문입니다. 상황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보호하십니다.

이런 기적 같은 일들을 우리가 경험하지 못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고 계시다는 것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삶과 경험으로 증명된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억하며 그 하나님을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분명히 ‘하나님’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이건 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야. 하나님이 나를 특별히 생각하셔서 이렇게 하신거야.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니까 이렇게 된 거야.”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지금 낮아진 상황에 있지만 그래도 자신에 대해서 자랑할 것들은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를 찾아온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그들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높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과거에 성취한 것들을 자랑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자랑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렇게 하기 보다 그 모든 일을 하신 하나님을 자랑하길 원했습니다.  3절도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즉 하나님이 위대하시다고 선포하고 그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곧 찬양이고 예배라는 생각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배의 중심에 계신 것입니다.

 “곤고한 자들”은 낮아진 자들, 어려운 자들입니다. 만약 이들이 다윗이 자신에 대해서 자랑하고 했다면, 그것을 듣고 함께 기뻐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자랑했고, 그들도 같은 경험을 가지고, 혹은 같은 소망을 가지고 함께 기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3절에서 다윗은 더욱 직접적으로 그들에게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말합니다.


 함께 찬양하자(3, 8~10)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3). 무언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정말 좋아하면 그것을 나누고 싶고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어합니다. 맛있는 음식, 좋은 노래, 재미있는 드라마 등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그렇게 합니다. 특별히 자기가 관심 있는 분야가 있으면 거기서 뭔가를 발견했을 때 그걸 정말 나누고 싶은데 그렇게 할 사람이 없어서 답답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나눌 만한 사람을 찾습니다. 누군가에게 말했는데, 원하는 만큼 반응이 없으면 왠지 실망스럽기도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에 대해서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좋아하는 드라마, 재미있는 기사에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에 대해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분이 광대하시고 그분이 높으시다는 것에 대해서 혼자만 알고 혼자서만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자고 소리를 높입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8).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합니다. 여기 특이한 표현이 있습니다. “맛보아”라는 말은 실제로 음식을 맛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음식을 먹어보고 그 맛을 분간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서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요즘 먹방이니 쿡방이니 하는 것들이 유행해서 TV를 보면 ‘맛’에 대해서 열심히 연예인들이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들으면서 ‘아, 이런 맛이겠구나’라고 생각이 드는 것도 있고 어떤 때는 ‘그래서 어떻다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내가 이미 경험한 맛이 있으면 그것에 기초해서 어느 정도 상상이 가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만약 ‘맛’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런 설명을 아무리 들어도 실제로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서 ‘맛보라’고 표현한 것은 그런 면에서 참 적합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알 수 있습니다.

“그에게 피하는 자”(8),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9), “여호와를 찾는 자”(10). =“복이 있도다”, “부족함이 없도다”,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피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런 것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하고 더 하나님을 기뻐하고 자랑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 선하신 하나님을 믿으며 믿음의 한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항상 즐겁게 찬양하는 것입니다.


 결론)

그리스도인의 삶은 멀리서 보나 가까이서 보나 희극입니다. 우습다는 말이 아니라 즐겁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고 있다면 우리의 삶은 절대 비극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알고 있다면 우리의 삶이 비극이 될 수 없습니다.


032218 안익선 목사/참조:유평교회&최종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