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강해

스가랴 7장 강해 (누구를 위한 것들이었나?)

호걸영웅 2018. 6. 30. 10:53

스가랴 7장 강해 (누구를 위한 것들이었나?)

 

7:1=“다리오 왕 제사년 아홉째 달 곧 기슬래월 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 ”였습니다.

 

본문의 시간적 배경은 다리오왕 제 4년 아홉째 달이라 햇습니다. 다리오는 바사 왕입니 다.  

 "기슬래월"은 유대 달력으로 9월이요, 우리 양력으로는 11월에 해당합니다. 그 달 4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였습니다.

 

(금식을 지속해야 하느냐는 질문)

2,3= “그 때에 벧엘 사람이 사레셀과 레겜멜렉과 그의 부하들을 보내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고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어 이르되 내가 여러 해 동안 행한 대로 오월 중에 울며 근신하리이까 ”라는 질문을 합니다. 여기 "벧엘 사람"이라는 것은, 바벨론에서 돌아온 벧엘에 살던 사람들 중 하나인데, 에스라 2:28을 보면, 그 때에 벧엘과 아이 사람이 223명이나 돌아왔다-고 합니다.

 

. 여기 이른바 "오월간에 울며 근신"한다 함은, 제오월에 성전 훼파의 사건을 기념하여 바벨론에서 애통하며 금식한 사실을 가리킵니다(왕하25:8,9).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벨론에 의해서 망한 후에 70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계속하여 금식하였습 니다.

 

유대인들이 이제 바벨론에서 해방되어서 성전을 재건하는 중에 있었지만, 아직 바벨론에 머물러 있는 자들에겐 그 같은 금식을 앞으로도 계속 하여야 될런 지가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이제 금식하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 물어 왔습니다. 아직 그들은 하나님의 주신 해방의 은혜를 받았으매도 여러 이유로 순종하여 본국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바벨론에 머물러 앉아서 이런 금식 문제 같은 것을 가지고 논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신령한 말씀을 즉시 순종하는 것보다 사람이 만든 규례를 지키는데 치중하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그들의 종교 생활이 얼마나 안일하고 어두워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금식보다 더 중요한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위한 금식이 아니라고 하심)

4-5=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라 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스가랴에게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금식 문제에 대하여 유대 민족 전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려 함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금식이 하나님을 위한 금식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먹는 것도 금식하는 것도 그들 자신들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오월 금식", 앞서 말한 것처럼 성전 훼파의 사건 을 기념하기 위하여 바벨론에 잡혀 간 유대인 포로들이 금식한 것입니다.

 

 "칠월 금식" , 바벨론 군대로 말미암아 유대 총독 그달리야와 및 유대 땅에 남아 있었던 유대인들 의 살해된 사건을 슬퍼하는 것입니다.(왕하 25:25, 26; 41:1-).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칠십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는 중 이런 금식일들을 정하고 행하여 왔던 것입니다.

 

금식은 회개를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금식을 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회개하고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금식하면서 회개하고 내면이 변화되고 삶이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금식하면서 슬퍼하기만 했지 참된 회개는 없었습니다.

 

 다만 저들의 민족적 고통스런 사정이 애달퍼서 그 금식을 통하여 비애를 표시하였던 것뿐입니다. 일본인들이 자기 나라 망한 것만 슬퍼하고 남의 나라 침략한 사죄는 하지 않는 바와 같습니다.

 

그들은 그 금식을 자기들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공로와 같이도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종류의 금식은 실제에 있어서 하나님을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여기서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두 번씩이나 "나를 위하여"라는 말씀이 나왔으니 이 말씀은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금식이 주님을 위하지 않았음을 확실한 하다고 힘있게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금식하지 않을 때는 자신을 위해서 살았음)

6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라 하십니다.

 

 금식을 하는 자가 금식을 하나님의 도덕적 의지에 대한 순종보다 더욱 존중시해서는 안 됩니다. 금식으로써 진정한 종교 생활을 하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금식을 공로로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들의 얼마 동안의 금식이 그들의 금식하지 않은 때의 모든 불의한 생활을 의롭게 해 줄것처럼 착각하였습니다. 금식한 결과로 그 뒤를 따르는 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생활이 있어야 할 터인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금식보다 무엇입니까?

(포로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음)

7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과 사면 성읍에 백성이 평온히 거주하며 남방과 평원에 사람이 거주할 때에 여호와가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외친 말씀이 있지 않으냐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여기서 진정한 종교 생활의 요점은, 금식이 아니고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 말씀을 청종하는 여부에 달렸다고 하십니다. 그는 여기서부터 실례를 들어 이 사실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기 전에 그들은 성읍이 평온하였습니다. 남방과 평원에도 사람이 거주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선지자들이 예루살렘 멸망 전에(다시 말하면, 예루살렘과 그 주 위의 모든 지방의 백성들이 잘 살고 있던 때) 하나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때에 그들이 순종하였더라면 바벧론에 잡혀 가지 않았을 뻔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필경 하나님의 예고대로 바벨론으로 잡혀 간 것입니다. 이 사실은 8절부터 14절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잘못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자기의 말씀을 주신 것은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셔서 그의 백성으로 하여금 캄캄한 세상에서 생명 길을 밝히 보고 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장래의 멸망 위험을 면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말씀을 주시되 막연하게 주신 것이 아니고 누구나 깨달을 수 있게 주셨으니 누구든지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이전 선지자로 외친 말"이라고 하십니다. 여기 "외친"이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에 카라라고 하였으니 곧, 선포 혹은 부르짖는다는 뜻입니다.

 

(공의와 사랑을 갖도로 말씀하심)

8-10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씀하였다는 말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의하여 망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아래와 같은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스가랴가 하나님의 말씀(9,10)을 인용하는 것은, 그의 시대의 사람들도 예외없이 그 말씀을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덕적 의지를 가리키는 말씀은 어느 시대에나 변치 아니하고 계속적으로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임하십니다 .

 

하나님께서 금식 문제로 물어보는 유대인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하나님에게 대하여 직접 행할 계명보다도 사람에게 대하여 옳게 행할 도덕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종교의 어떤 의식(예컨대 금식과 같은 것) 보다도 사람에게 대하여 옳은 도덕 실천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과 관계없는 인본주의 도덕을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의미에서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옳게 행해야 될 도덕이 강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피차에 인애와 긍휼을 베풀"라는 것과 고독한 자를 "압제 하지 말"라는 것과 "남들을 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교훈을 볼 때 우리는 신본주의 신앙이 사람에게 대한 사랑을 얼마나 심히 강조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자들 중에는 , 신본주의 신앙을 강조하는 자들로서 사람에게 대한 공의와 사랑의 의무를 무관심하게 생각하는 일이 종종 나타납니다. 그것은, 심리적으로 그렇게 잘못 기울어지기 쉬운 경향에 끌림입니다. 신본주의는 하나님을 중심한다고 하니까, 그들은 하나님 중심, 하나님 중심하면서 사람에게 대한 사랑을 주요시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착오입니다. 신본주의는, 사람 사랑하는 것도 그 불가결한 필요요소라는 것입니다.(요일 4:20).

 

"진실한 재판"이라는 것은 사실과 진상대로 바로 공의롭게 재판함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남의 외모를 따라 그릇되이 판단하기 쉽습니다. 자기의 사랑하는 자에게 대하여는 편견을 가지고 사정을 보아주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인애와 긍휼",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남들에게 인애와 긍휼을 행함에 있어서 너무도 등한시합니다. 그들은 인애와 긍휼을 행할 책임감조차 명백히 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공의(진실한 재판)만 있고 인애와 긍휼이 없으면 실상 사해와 같이 죽이는 일만이 남게 됩니다.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라는 것은, 고독한 자들을 억울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 나그네라는 것은, 외국 사람을 의미합니다. 성경에 외국인을 과부와 고아와 같은 부류에 넣어서 말씀한 귀절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24:17, 27:19; 19:10; 146:9; 19:33; 3:5 참조. 사람들이 이런 고독한 자를 업신여기는 심정으로 홀대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들에게 이런 자를 돌아볼만 한 힘이 없는 것은 아니로되 저렇게 업신여기는 심정이 있어서 그들을 섭섭하게 합니다.

 

"남을 해하려 하여 심중에 도모하지 말라"고 한 말씀은, 행위의 근거로서 마음을 중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들의 마음 속에 있는 악독을 문제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행동상 죄악보다 못하지 않게 크게 문제시하십니다.

 

16:2 참조. 우리는 위의 몇 가지 도덕의 강조를 보아서 하나님 중심하는 신자들이 이웃 사랑을 명심해야함을 배웠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위주하는 신앙가라면, 사람들에게 대하여(특별히 믿는 형제들에게 대하여) 착하게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하여 엄격한 경건을 주장하면서도 사람들에게 대하여 몰인정하고, 사납고, 악독하 게 행하는 것은 진정한 경건이 아닙니다.. 1:27 참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유대인들)

11-12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듣기를 싫어하여 등을 돌리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그의 영으로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진노가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나왔도다” 바벧론으로 잡혀 가기 전에 유대인들이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은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은 자세하게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기 싫어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집니다. 암만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하나님 중심하지 않고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면,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영광이 돌아가지 못할 일이라면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라 할지라도 행하기를 싫어하고 귀를 막습니다. 마음이 금강석 같다 함은, 그 심령이 부드럽지 못하고 굳어서( 3:9; 17:1) 하나님 말씀에 대한 섭취력이 전연 없음을 말합니다.

 

(바벨론의 포로로 보내신 하나님)

13-14절을 보십시오. “내가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한 것처럼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내가 그들을 바람으로 불어 알지 못하던 여러 나라에 흩었느니라. 그 후에 이 땅이 황폐하여 오고 가는 사람이 없었나니 이는 그들이 아름다운 땅을 황폐하게 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불렀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이 행한 대로 그들은 갚음을 받습니다. 그들의 망하는 책임이 그들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자 이제 하나님도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회오리 바람으로 흩으셨습니다. 여기 "회리바람"은 그들이 막을 수 없는 환난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것을 비유하는 표현입니다.. 그 예고대로 그들이 바벨론에 잡혀 갔고 그들의 국토는 아주 황무지가 되었습니다.

 

결론)

(금식보다 중요한 사랑과 공의)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은 금식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묻지 말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사랑과 공의를 행할 수 있는가를 물어야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금식했어야 했습니다. 우리도 사랑과 공의가 없는 것을 애통하며 회개해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스라의 평화와 풍요를 다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061218 안익선 목사/ 참고:오요한 목자 & 말씀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