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모음(Korean sermons)

고통 가운데 계신 하나님 (창세기 16:6-14 )

호걸영웅 2018. 10. 19. 23:25

고통 가운데 계신 하나님 (창세기 16:6-14 )

 

오늘 우리는 우리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단어를 주제로 말씀을 나눌까 합니다.  사실, 우리가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살면서 피할 수 없이 들어야 하는 말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시험이라는 단어별로 반갑지 않은 단어이지만 반갑지 않다고 해서 안듣고 살 수는 없는 단어이죠.  , ‘실수, 실패이런 단어들 평생 살면서 한번도 안 들어 봤고, 한번도 이런 경험이 없다고 하시는 분이 있으면, 예배 후에 조용히 절 찾아와 주세요.  제가 좋은 병원 소개해 드릴게요.  감기’… 별로 경험하고 싶지 않은 단어이죠.  그 중에서도, 오늘 우리는, 제가 예로 소개해 드렸던 모든 단어들을 포괄하는 단어인 고통에 대해서 말씀을 나눌까 합니다.  고통이라는 주제는 우리가 숨을 쉬는 한 피할 수 없는 단어입니다.  사실, 어떤 사람은 이 지구상에 유일하게 고통이 없는 곳이 공동묘지라고 하지만, 그곳에 가끔 가보면, 그 곳에서도 고통은 존재합니다.  제가 예전에 찬양 사역을 왕성하게 할 때에 자주 찬양을 부르면서도 늘 마음에 불편했던 찬양곡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두란노 경배와 찬양으로 유명한, 하스데반 목사님이 지으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라는 찬양입니다.  가사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 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이 찬양을 보면 곡도 좋고 다 좋은데, 한 곳만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하나님이 고통 가운데 계시면 내 고통을 어떻게 해결하나? 하나님도 지금 고통스러운데 나의 지금 이 고통을 어떻게 도와 주실 수 있나?’ ‘이렇게 고통스러운 하나님을 내가 만나서 무얼하나?’ 라는 생각들이 저를 참 많이 괴롭혔었습니다.  오늘 이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브라함이 아브람이었을 때에, 그의 나이 85세가 되도록 아직,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이삭은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이 언약을 받고, 가나안에 도착한 나이가 75살 이었을 때인데, 10년이 지난 이후에도 답이 없었습니다.  10년이 아브람에게는 참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아예 처음부터 하나님이 아브람의 몸에서 날 자가 상속자가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하지나 마시지그 약속 때문에 아브람은 10년 동안 피가 말랐던 것입니다.  이 상황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재산도 있고, 종도 많고, 부족한 것이 없는 아브람이었을 수 있겠지만, 자신의 대를 이을 수 있는 자식이 없다는 것이 큰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아브람의 마음을 오늘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가 창세기에 있습니다.  창세기 14장에 롯을 구하려고 전쟁을 하고 돌아옵니다.  아브람의 첫 파병이 시작됩니다.  그 치열한 전쟁을 통해서 아브람은 물론, 승리하고 살아 돌아왔지만, 심각한 PTSD를 겪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5장에 하나님과의 만남 중에, 아브람은 하나님께 그 상한 마음을 한탄하듯이 털어 놓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큰 상급이 되시겠다고 하니까, 아브람이 하나님께 따지듯이 주님 무엇을 저에게 주시려고요?  다 필요 없어요.  자식이 없는데 뭘 더 주신다고 제가 기쁘겠습니까?’ 라고 합니다.  저도 전쟁터에 있어보았고, 거기서 지내 보니까 제일 힘든 것이 내가 오늘 죽으면 내 자식들 못 보고 죽는구나. 이 놈들이 커서 이 아버지를 기억해 주겠지?’ 라는 생각들 이었습니다.  아브람도 전쟁을 끝내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고 보니, 아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이렇게 다 가지고 있은들, 내가 오늘 죽으면 이 모든 것이 다 물안개 같은 것이 되지 않겠는가…?’  이 고통이 컸을 것입니다.  하루하루가 고통 자체였을 것입니다.  아브람 뿐이겠습니까?  이 상황에서 누가 가장 괴롭고 고통스러웠을 까요?  바로 사래였을 것입니다.  여자로서, 한 집안의 안주인으로서 대를 이을 자녀를 낳지 못한다는 고통이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래서 결국은 아브람이 더 늙기 전에 해결을 보자.  약속도 좋고 믿음도 다 좋지만, 일단 몸이 좋을 때 결론을 보자.’ 해서 결국 애굽 여종 하갈을 아브람에게 후처로 보냅니다.  이 결정이 결국 창세기 16장을 문제와 갈등의 서막을 알리는 장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여러분 창세기를 큰 물줄기로 읽어보시면, 하나님의 전 인류를 향해서 흘러가는 구원사의 흐름을 보게 되는데, 갑자기 16장에서는 잠시 그 구원사의 흐름이 멈추고, 갑자기 아브람이라는 집안의 가정사에 머물러 있는 작은 하나님이라는 신학적 오해를 하기 쉽게 만듭니다.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구원사의 물줄기가 16장에서 더 현실적이고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것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16장은 한 집안의 두 여인들의 마음의 갈등과 고통과 상처에 모든 것을 집중 시키면서, 바로 온 인류가 하나님 없이 받은 큰 고통을 보여주고, 그 해결 방안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 보세요자녀를 잉태하지 못해 고통하고 있는 사래가, 기다리고 기다리다 못해, 그 고통의 문제 해결을 받고자 결정한 것이 하갈이었습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자기 여종 하갈을 남편에게 주면서, 오랜 세월동안 겪고 있는 고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국말 성경에는 이라고 하지만, 히브리 원문에는 그냥 아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사래는 그 고통가운데, 하갈을 통해 자신의 아내의 자리를 포기한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 계신 아내분들은 더 잘 알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또 다른 고통이 되는지를…. 그런데, 사래는 이 또 다른 고통을 스스로 선택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아기를 낳지 못하는 다른 고통때문에

아브람은 어떻습니까?  자기 아내인 사래의 고통과 괴로움을 이해해주지 못하고, 그냥 사래의 말에 순종하고, (이런 경우에는 모든 남자들이 여자말을 주님음성으로 듣고 순종합니다.)  하갈과 동침합니다. 

사래가 원했던 것은 하갈이 임신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 소원대로 하갈이 임신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 상황에서 모든 고통은 해결되고 해피 앤딩으로 가야하는데, 또 다른 고통이 생깁니다.  

하갈이 임신하는 것으로 인해서, 사래가 오랜 시간 동안 고통스러워했던 불임이라는 고통의 근원이 너무 선명하게 부각됩니다.  자신의 비참함을 더욱 피부로 느끼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언제 부터요?  바로 16 4절에 하갈이 멸시하기 시작하면서 부터 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받은 사래는 남편 아브람과 여종 하갈과 그 고통을 전가 시킵니다.  16 5절에는 아브람에게 나의 받는 욕(고통) 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라고 하며 아브람에게 자신의 고통을 전가시킵니다. 결국 아브람은 남편으로서, 가장으로서, 리더로서의 모든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 이었으면서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 고통을 떠안고 나서, 그 고통 때문에 방향을 잃고, 중심을 잃은 모습으로 결국 자신의 결정권을 포기해 버리고, 남편으로서의 위치를 버리고, 사래에게 당신 여종이니 당신 눈에 좋은 대로 해 버려라.’ 라고 하면서 고통을 벗어나려고 합니다.  자기의 씨를 잉태하고 있는 하갈을 남편되는 아브람이 버려버립니다.  왜요? 그 고통 때문에

하갈은요?  이 이름의 뜻을 보면 하갈의 삶을 조금 예측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가르라는 히브리 이름은 그 뜻이 도망하다도망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이 하갈이 애굽사람이라는 것을 봐서는, 애굽에서 비천한 신분으로 이런 저런 비류한 삶을 살다가, 도망하여, 어떻게 어떻게 해서 아브람의 종이 되었고, 여주인인 사래의 몸종이 되었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 자체가 도망하여 겨우 몸만 의지해서 사는 고통스러운 삶인에, 어느날 자기가 결정한 것도 아닌데, 주인이 시켜서 아브람의 아내가 되고, 덜컥 임신을 했는데, 이번 일로 인해, 이제 좀 이 구질구질한 삶이 피려나 싶었는데, 이것도 잠시 주인 사래가 학대를 합니다.  이 학대를 참고 또 참다가 못해서, 자기 이름의 뜻 처럼 결국 고통을 당할 때 늘 하던 것처럼, 또 도망을 결정하고 도망갑니다.  하갈은 문제를 해결하는 삶이 아니라, 늘 피하고 도망하는 선택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 사람에게는 다른 형태의 고통이 늘 같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찌보면, 사래나 아브람보다 하갈이 받는 고통의 형태가 저와 여러분의 형편에 더 잘 맞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을이 받는 고통이죠.

하지만, 오늘 본문 7절에 보면, 이렇게 도망하는 하갈을 하나님의 사자가 만나 주십니다.  애굽에서 나온 하갈이 다시 애굽으로 도망하는 길, 그 길 중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물어보십니다.  네가 어디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랬더니, 하갈이 두 가지 답만 합니다.  한 가지는 안 물어본 질문의 답이고, 또 한가지는 물어본 질문에 반쪽짜기 답을 합니다.  나는 사래의 여종이고, (안 물어본 것), 도망중이다.” 여호와의 사자는 어디로 가느냐 묻는데, 답을 안하고 있습니다.  ?.  어디로 가는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어디로 가는지 모르기 때문에, 도망 하는 삶은 어떤 보장도 없고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이 때에, 9절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어디로 갈지 분명히 말해 줍니다.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하갈이라는 이름대로 도망하면서 살지 말고, 이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사자가 그 복중에 있는 하갈의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십니다.  그 이름이 이스마엘입니다.  그 뜻이 바로 하나님께서 너의 고통을 들으셨다.’ 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처음으로 이름을 지어준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이 바로 이스마엘입니다.  하나님이 고통을 들으셨다.  고통을 들으시는 하나님 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모든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지금까지, 인류는 이 고통의 문제에 얽혀 살고 있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하와이에 사는 사람이나 남부 시골에 사는 사람이나, 모든 사람들은 이 고통의 딜레마 안에서, 자고 일어나고, 먹고 마시고, 즐기고 일하고, 죽고 태어납니다. 

세상의 많은 정치인들의 한결같은 슬로건이 무엇입니까?  바로 고통의 해결입니다.  나를 뽑아 주시면 여러분의 고통을 이해하고,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저를 뽑아 주셔야 여러분이 더이상 고통 받지 않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정치 후보들의 100%가 다 한결같이 소리칩니다.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불가능한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속아주는 겁니다.  아니뽑을 사람이 없는데 뽑아야 하니까 투표하는 거지요.  그냥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 뚱뚱해도 다리가 예뻐서 짧은 치마가 어울리는 여자…’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왜입니까?  자신의 고통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어떻게요?  내 잔이 넘치지 않는데, 어떻게 남의 잔을 채워 줄 수 있습니까?

모든 세상의 리더쉽의 첫 번째 덕목고통을 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진짜 리더인가 가짜 리더인가 알 수 있는 기준은 바로, 그 사람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들어주는 사람인지, 아니면 그 고통을 무시하고 자기 고통만 해결하려고, 밑의 사람을 부려먹는지를 보시면 됩니다.  바로 갑질입니다.

그래서, 전 우리 예수님이 너무너무 좋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고통을 듣고, 이해하고, 나를 아셔서 함께 울어 주시고, 함께 임마누엘즉 함께 있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안 찾아가서 그렇지, 늘 나와 함께 있어주고자 하는 분이 우리 예수님이잖아요.  그 뿐입니까?  심지어 죽음으로 우리의 궁극적인 고통을 해결해 주셨지 않습니까? 바로, 우리 고통의 한 가운데에 십자가를 세워 주셨습니다.  그 십자가가 고통의 한 가운데 말입니다.  세상의 어느 정치인도 자기가 죽고 나를 살리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있다 한들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파병중에, 무슬림 이맘을 만나서 종교대화를 해 본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 이슬람 문화와 무슬림에 대해 관심이 많았지만, 그 중에 저는 고통에 대한 이해를 물어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어떻게 고통의 문제를 이해하고, 고통의 문제 해결을 제시하는지를 알기위해서는, 분명히 구원관을 이야기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상한 사이비나, 마약 같은 것을 써서 종교단체를 만들지 않는 이상,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압니다.  이 현실에서는 절대로 고통이 완전 해결 될 수 없다는 것을… ‘고통의 최고봉이 바로 죽음이기 때문이지요.  피할 수 없는 죽음을 해결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고통을 이야기 할 수있겠습니까?

무슬림

기독교

천국 – 7층천 하나님의 부재

하나님의 임재

술을 마음껏 마시고, 1000년 마다 향락이 증가되는 곳

세상의 어떠한 쾌락과 흥분을 위한 도구들이 필요 없는 곳

72명의 아내 또는 제한 없는 부인을 거느리고 사는 곳

주님의 신부로 영원히 사는 곳

100명의 남자가 갖는 정력을 갖고 방탕한 축제가 매일 있는 곳

하나님이 함께 계신 거룩한 찬양의 축제가 있는 곳. (고통과 근심과 죄책감이 없는 곳)

 

 

 

불교

기독교

인생

고통

고통

원인

욕심

(욕심)

해결 가능성

YES

YES

WHO

붓다

예수 그리스도

HOW

BY SELF

BY FAITH

 

부처는 구원의 모델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자

 

여러분, 오늘 우리는 아브람과 사래와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 즉 고통을 들으시는 하나님을 나누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고통의 한 가운데에서 자신만의 고통을 끌어않고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예외 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오늘 이 시간에 귀한 메세지를 하나 주십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이 고통스러워하는 그 고통의 한 가운데에 바로 우리 주님이 계신다라는 것입니다.  그 고통의 한 가운데에서 어찌할 바를 모를 때, 헤어날 길을 인도하시고, 헤어날 길이 없을 때에는 내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갈길을 만드시고, 그 고통의 근원을 해결해 버리시는 하나님을 만나셔야 합니다.  오늘 하갈은 정말 큰 하나님의 은혜로, 도망하는 중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 고통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 그 고통을 살펴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음성이 무엇입니까?  바로 네 자리로 돌아가 복종하라라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고통당하는 그 곳을 떠나려고 도망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곳이 하갈의 삶의 현장이고, 그 곳에서 이스마엘을 낳고, 순종하면서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뜻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지금 어렵고 힘든 가정, 일터, 사람, 직장이 삶의 현장에서 자꾸 피하고 도망해서는 안됩니다.  부르신 곳에서 순종하고 예배하는 자의 모습으로 견디면서, 연단이 필요하면 연단받고, 훈련이 필요하면 훈련 받으면서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승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늘 말씀하십니다.  고통에 집중하지 말고, 하나님과의 첫 사랑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첫 감격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하갈을 브엘라 해로이, 즉 나의 고통을 들으시고 살피셨다는 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여기서 하갈은 도망하는 자신의 잘못을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어 알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돌이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 곳을 브엘라해로이즉 나를 살피시는(고통 가운데 계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샘이라고 불렀습니다. 

세상의 어떤 이름도 여러분의 고통을 해결해 줄 이름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여러분의 고통을 영원히 해결해 주실 이름입니다.  주님에게 돌아가십시오. 주님을 보세요.  9절 말씀을 다시 들어 보세요. ‘여호와의 사자가 우리에게 이르되 너의 주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라.’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이 말씀에 감화되어서 영원히 고통받지 않는 진정한 평화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00718 황지용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