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지 않는 어린아이(고전 3: 1-7)
서론)
1. 새들백교회의 릭 워렌(Rick Warren) 목사님이 한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A church should be judged not on its seating capacity, but on its sending capacity.”“교회는, 좌석 수에 의해서가 아니라 파송 능력에 의해 평가되어야 한다.”
이것을 좀 풀어서 말하면 이런 뜻입니다. “한 교회가 제대로 교회의 사명을 다하고 있는가를 알려면,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예배당에 모여 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고 있는가를 보아야 한다.”
정말 맞는 말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가서 모든 민족으로 주님의 제자를 삼는 것입니다.
2. <제자입니까> 책의 저자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도 바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교인이 200명일 때 부임하여 600명으로 성장시켰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너는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교인들을 400명 더 확보했을 뿐이지, 누구도 자라지 않았다. 전에는 네가 200명의 영적 갓난아기들을 거느렸다면, 지금은 600명을 거느리고 있는 것뿐이다.”
오르티즈 목사님은 그 중 한마디도 부인할 수 없었고, 주님께서는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너는 지금 교회가 아니라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영적으로 말해서, 그 누구도 아버지가 없다. 너는 교인들의 아버지가 아니라 분주한 고아원 원장이다. 네가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고 운영비를 지급하고 우윳병을 챙긴다 하지만, 너는 물론 그 어느 교역자도 실제로 그 갓난아기들을 양육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충격을 받고 그 다음부터 정말로 교인들을 제자로 만들기 위해 사역의 방향을 완전히 바꿨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영적 어린아이가 어떻게 믿음의 어른이 될 수 있는가를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합니다.
본론)
가)영적 어린 아이의 표지
1) 발전이 없는 기도
먼저 영적 어린아이들에게는 표지(특징)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럼 과연 어떤 사람들이 영적인 어린아이일까요? 만일 어떤 사람이 예수님과의 관계가 점점 더 친밀해진다면, 처음 구원받았을 때와는 다른 기도를 드릴 것이 분명합니다. 처음 구원받았을 때 떠듬거리며 하던 기도와,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해서 드리는 기도가 똑같을 수가 없습니다. 똑같으면 이상한 겁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기도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이 처음 믿을 때와 몇 년이 지난 후에도 똑같은 기도를 되풀이하고 있고, 하나님과의 대화에 있어 진전된 것이 없다면 문제가 있다는 것이죠.
2) 다툼과 분열
영적 갓난아기라는 또 다른 증거가 바로 다툼과 분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각각 베드로, 아볼로, 바울 자신을 추종하던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아주 강력하게 잘못되었다고 선포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1-4절)
바울이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이라고 부르는 주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들 안에 시기와 분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서로 피 튀기며 싸우고 교회가 갈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서로 다른 설교자를 선호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바울의 설교가 좋다.” “아니다, 나는 아볼로의 설교가 좋다.” “나는 게바(베드로)의 설교가 좋다.”라고 한 것이지, 막 싸우고 갈라진 것이 아닙니다. 시기 다툼은 영적 어린아이의 특징입니다.
3)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을 더 좋아하는 마음
우리가 꼭 어린아이와 같아서, 언제나 주님이 나를 도와주시기를 바라고, 나를 위해 뭔가를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자녀인 우리를 위해 엄청난 것들을 베풀어주십니다. 복을 주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본적으로 어린아이처럼 항상 내가 원하는 것만 받겠다고 떼를 씁니다. 당신의 기도제목들을 보십시오. 어린아이가 아빠에게 떼를 쓰는 것과 비슷합니다. 어린아이가 아빠에게 어떻게 떼를 씁니까? “아빠, 돈 좀 주세요. 나 저 장난감 갖고 싶어요. 이 옷 좀 사주세요. 저 신발 사주세요.” 이런 어린아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른의 표지가 뭡니까? 바로 줄 줄 안다는 것입니다. 어른은 남에게 베풀 줄 압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을 위해 중보기도를 할 줄 알고, 사랑을 베풀며 섬길 줄 알며 희생할 줄 안다는 것이야말로 영적으로 자랐다는 증거입니다.
사실 내가 섬겨도 되고 섬기지 않아도 되면, 사람의 성향은 섬기지 않아도 되는 쪽으로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결코 섬기는 쪽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섬겨야 하는 자리에 나를 붙들어 매놓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잘하다가 또 힘들어하기도 하다가,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섬겨보려고 눈물로 기도하며 섬기다 보면 반드시 성장합니다.
고로 가능하면 어느 섬김의 분야에 가입하여 주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4) 교회 내에서 부족한 일꾼과 넘치는 구경꾼
또 다른 어린아이의 증거는 교회에 일꾼이 적고 구경꾼은 많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마다 20년, 30년, 40년, 50년, 또는 평생 동안 예수를 믿어 온 교우들이 많지만, 아직 한 번도 믿지 않는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해본 적이 없는 교우들이 대부분일 수 있습니다. 내가 전도해서 믿게 된 것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도록 하기 위해 기도하고 섬기고 사랑을 베푸는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몇 십 년을 교회에 다녀도 믿지 않는 사람에게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교회에서 영적 성장에 대해 종종 듣습니다. 그러나 아기들이 먹는 우유 밖에 공급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성장할 수 있겠습니까? 우유는 일정 기간 동안은 좋은 음식이지만, 아이는 곧 영양가가 더 많은 다른 음식들을 섭취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을 하나님께서 정말 기뻐하시는지 그렇지 않은지, 그분께 여쭈어보아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기도의 시간이고 경건의(Q.T)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만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개인이나 가정도 그래야 하고, 교회는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히 5:12-14)=“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했습니다.
“때가 오래 되었다”는 것은 신앙생활을 한지 오래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마땅히 교사가 되어 말씀을 가르치는 수준으로 성장해야 하고 스스로 말씀을 먹는 수준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리고 연단(훈련)을 잘 받아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연단을 받습니까? 우리가 가장 연단을 잘 받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공동체입니다. 삶에 갑자기 어려운 환경이 생긴 것을 통해서도 연단을 받지만, 그런 경우는 어쩌다 일어나는 것입니다. 꾸준히 연단을 받는 것은 공동체를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중요합니다. 교회에 안 나오고 나 혼자 믿겠다는 것이 잘못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공동체 생활을 하다 보면, 서로 갈등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마다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연단을 거쳐야 성장할 수 있습니다. 성경말씀과 반대돼지 않는 일이라면 불편을 잘 견뎌야 합니다. 자갈밭에 가보세요. 혼자 둥글어진 돌은 없습니다. 서로 오랜 세월 비벼지고 부딪히면서 둥굴어집 것입니다.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합니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5-9절)
바로 이것입니다. 오직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성숙은 시작됩니다.
물론 시기와 싸움의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쉽게 이야기해서 자존심 때문입니다. 정말 중요한 문제를 갖고 다투고 갈등하는 예는 극히 적습니다. 가만히 보면, 싸우는 것에 중요한 이유가 있는 것 같이 생각하지만, 대개 시시한 것, 주로 자존심의 문제를 가지고 싸웁니다.
예화) 오래 전 캘리포니아에 어떤 한인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서 새로 피아노를 구입하려 하는데 어디에 놓아야 할지에 대해 의견이 갈렸습니다. 한 장로님은 성가대가 있는 단 위에 올려놓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장로님은 아니라고, 좁은 위쪽에 올리기보다 아래 놓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당회가 둘로 갈라져 싸웠고, 제직회도 둘로 갈라져 싸웠습니다. 또 교인들도 둘로 갈라져 다투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교회가 둘로 갈라졌답니다. 실화입니다.
결론)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빌 2:5-9).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셨으나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나보다 밑에 있다고 생각한 사람, 비슷하거나 뒤에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이것 좀 해주하세요”라고 할 때, ‘건방지게, 지가 뭔데?’라고 할 것이 아니라, 죽고 사는 일이 아니라면 ‘그래, 내가 못해줄 이유가 뭐 있나’ 하고 따라주는 것이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자존심, 이기심이 무너지고 예수님을 닮게 됩니다.
072319 안익선 목사/ 참고:이준원 목사
*남을 나보다 더 훌륭한 점이 많고 존중 받을 사람이라고 여기며 살게 하옵소서! 서로 허물을 덮어주며 축복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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