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모음(Korean sermons)

코가 참 기신 하나님(벧후 3:8-13

호걸영웅 2019. 8. 7. 05:34

코가 참 기신 하나님(벧후 3:8-13)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어떤 사본에, 타지리라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서론)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에 대해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소개하곤 합니다. 그런데 “노하기를 더디하신다”라는 히브리 성경의 표현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노하기를 더디하신다”라는 히브리어 원문 성경의 표현은 “에라카”()인데, 에라카라는 말은 “코가 길~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답니다. 즉 노하기를 더디 하신다는 것을 코가 길~다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것과 코가 긴 것은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히브리인들의 사고에 의하면 코가 길면 콧물이 흘러 내릴 때 짧은 코보다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하기 를 더디하신다 라는 의미로 코가 길다 라고 묘사하고 있어요. 이것은 재치 있는 히브리인들의 언어표현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인내에 대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

본론)

)인내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증거들
 코가 길어서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을 확실하게 만날 수 있는 부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십 년 간에 걸친 광야생활 기간입니다. 광야생활 자체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기간을 오히려 불순종으 로 인한 실패로 은혜를 망가뜨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현장을 범죄의 자리로 만든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예를 보면,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은 브올에서 바알을 섬김 으로써(25:1) 십계명의 제1계명인 하나님만 섬기라는 계명을 범했어요. 시내광야에 이르러서는 아론과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기므로써,  우상제작 금지명령 인 제2계명을 어깁니다. 또한 이스라엘 여인과 이집트 남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고 저주함으로써(24:10-11) 3계명인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도 범하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민수기 15: 32-36절에는 어떤 이스라엘 사람이 안식일에 나무를 하다가 돌로 쳐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여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제4계명이 파괴되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은 십계명의 1-4계명을 모조리 무너뜨린 기간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4계명은 어떤 것입니까? 십계명을 두 부분으로 나눌 때, 1-4계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5-10계명은 인간과의 관계를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된 계명을 모두 범하고 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인도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심각한 죄였습니다.


  하나님은 자신과의 계명이 다 무너지는 상황을 목격하시면서도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오래 참으시며, 용서하셨습니다. 히브리인들의 표현대로 하나님의 코가 짧으셔서 오래 참지 못하시고, 노하기를 속히 하셨다면 그들은 광야에서 다 죽었을 것이고, 약속의 땅에 한 명도 들어가지 못하고 모두 광야에서 매장되는 불행을 당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실 물과 먹을 음식이 없어서 쏟아내었던 “이집트에는 매장지가 없어서 여기까지 데리고 나왔느냐?”는 그들의 불평이 현실화이 되었을 것입 니다.

물론 하나님을 의인화시킨 표현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코가 길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참으로 다행이고 축복입니다. 코가 긴 하나님의 혜택을 우리도 톡톡히 받으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코가 짧으셔서 오래 참지 못하시고, 속히 노하셨다면 우리도 다 이 세상에서 벌써 멸망하여 죽었을 것이고, 예수님이 예비하신 천국에는 한 사람도 들어가 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내란 말의 의미

본래 인내라는 헬라어 말은 휘포메노입니다. 그 뜻은 "밑에 머무르다. 견디다"라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로부터 짓눌려 힘들고 괴롭고 어려워도 견딘다는 것이 인내입니다.
사람들은 참고 또 참아 백 번까지도 참을 수 있을 지 모릅니다만... 하나님의 인내는 더 크고 더 놀랍고 더 신비합니다.

로마서 2:4을 보면 "하나님은 길이 참으심이 풍성하시다"고 했고, 로마서 9: 22를 보면 "오래 참으신다"고 했으며, 베드로 후서 3:9 "~래 참으신다"고 했습니다. 오래라는 말의 뜻은 그 수를 셀 수 없도록 참으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전서와 후서를 받은 사람들은 초대교회 당시 사방에 흩어져 있던 그리스도인 들이었습니다. 로마 정권이 기독교를 박해하자 성도들은 박해를 피해 여기저기로 흩어 졌습니다. 오늘날도 터키의 갑바도기아 지방에 가면, 그 당시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지하와 바위 위에 15층의 굴을 파고 그 안에 교회를 만들고 신학교를 만들고 산 흔적 들이 남아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박해 받던 성도들이 제기한 의문점은? 왜 주님은 악인을 심판하지 않으시는가? 왜 주님께서는 빨리 다시 오시지 않으시는가? 였습니다.
그들에게 베드로 사도는
인내하라. 시험을 참으라.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 보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런 의문이 있습니다. 왜 악과 선이 여전히 공존하는가?
왜 하나님은 의와 불의가 공존하도록 방치하시는가? 왜 주님은 빨리 오시지 않는가 라는 의문을 제기하게 됩니다. 그 해답을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의 해답

1. 천년을 하루같이 인내하시는 하나님
8
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 씀 속에는 천년을 하루처럼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가 들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기다림이나 인내와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창세기 29장을 보면 야곱이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해 오늘날의 시리아 북부인 하란으로 도망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곳에 살고 있던 외삼촌 라반에게는 레아와 라헬이라는 두 딸이 있었습니다. 야곱은 둘째 딸인 라헬에게서 사랑을 느꼈습니다.

어느 날 외삼촌 라반에게 자기 속내를 털어놓고 라헬과 결혼하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 다. 그러자 외삼촌 라반은 고이 키운 딸 라헬을 아무 댓가도 없이 줄 수 없으니 7년을 자기에게 봉사하라고 했습니다.

그 날부터 야곱은 라헬과 결혼하겠다는 일념으로 7년을 몇 일인양 열심히 일했습니다. 창세기 29:20을 보면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7년을 수일 같이 여겼더라"고 했습니다.

언제 7년이 지났는지, 몇 일 지난 것 같은데 7년이 지나버렸다는 것입니다.
라헬을 향한 사랑, 기대,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7년 세월이 수일처럼 여겨졌던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릴 사랑하시기에 천년을 하루처럼 기다리시고 인내하십니다.

 

우리들의 약점은 너무 서두르고 급하다는 것입니다. 기다리고 참는 것이 약합니다. 이태리 로마에 가면 120년 넘은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습니다. 그 집은 여러 대를 물려가며 아이스크림만 만들어 팝니다. 영국에 가면 100년 넘게 비프 스테이크만 파는 식당이 있습니다. 자그마한 양식당인데 예약한 손님만 받습니다. 일본도쿄에 가면 4대째 붕어빵만 만들어 파는 집이 있습니다. 붕어빵 하나로 100년을 버텨 왔습니다.
뭔가 변함없이 꾸준히 해 낸다는 것은 단순하고 쉬운 일이 결코 아닙니다. 그만한 열정과 애정과 의리와 인내심이 있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존경과 사랑을 받습니다.


2.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9
절을 보면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 느니라"고 했습니다. 왜 천 년을 참으시고 이천 년을 기다리십니까? 그것은 단 한 명이라도 더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안 보내주셨다면... 나는 영원히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일 내가 예수 믿기 전에 주님이 재림하셨다면 나는 영원히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 사람이 성질을 바꾼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제자가 된 후에도 그 급하고 단순무지한 성질대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요한도 어리광 피우듯 자기 성격대로 제자 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인내를 배우고 사랑을 만난 이후 삶의 질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철없는 둘째 아들이 유산을 미리 달라하여 아버지를 떠나 향락의 도시로 갔습니다. 그는 몸만 떠난게 아니고 상속받을 재산을 미리 다 챙겨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염려하며 떠나질 말기를 말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집을 꺽지 않고 고향을 떠났고, 얼마 못 가서 아버지가 염려했던 대로 주색잡기로 재산을 다 탕진하고 노숙자 로 전락했습니다. 사실 그런 자식이라면 별로 기다릴 가치도 없고 다시 받아줄 명분도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낮이면 동구 밖 언덕에 나와 기다립 니다. 밤이면 등불을 켜 놓고 기다립니다. 언제까지 기다립니까? 집 나간 자식이 혹 돌아올지 몰라 기다립니다.

이 사건을 노래로 만든 찬송이 317장입니다.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지은 죄가 아무리 무겁고 크기로/주 어찌 못 담당하고 못 받으시리요 /우리주의 넓은 가슴은 하늘보다 넓고 넓어...할렐루야!

아버지에겐 그가 집을 떠난 이유나 아버지를 떠난 이유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집 떠나 어떻게 살았고 무엇을 했느냐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아직 철없는 자식이기에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아버지 품으로 돌아오면 됩니다.

집과 아버지를 떠났던 그 아들은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모든 실수와 잘못된 과거를 다 용서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을 위해 환영하며 온 동네사람을 불러 놓고 큰 잔치를 벌리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도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 죄짓고 고생함을 아시기에 하나님은 참고 기다리십니다. 매를 때리고 호통을 치고 감옥에 가두고 온갖 구박을 받아 마땅한 죄인된 우리였지만, 사랑으로 참고 기다리셨습니다.

한번은 요한 웨슬리의 아버지가 존 웨슬레를 믿음과 인내로 훌륭하게 키운 웨슬리의 어머니였던 수산나 에게 물었답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 멍청이 녀석에게 똑같은 말을 스무번이나 되풀이 할 수 있소? 인내심이 대단하구려"라고 하면서, 말썽꾸러기요 고집 불통인 아들 존 웨슬레에게  계속 같은 말로 타이르는 자기 아내에게 한 말입니다. 그러자 수산나는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만일 그 아이에게 열 아홉 번만 말하고 그만둔다면 열아홉 번 말해온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랍니다."라고 했답니다. 사실 하나님의 인내는 거기 비할 수 없이 더 크고 놀랍습니다.

결론)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가 십시다.  우리도 하나님을 본받아 참고 기다립시다. 이번 한 주간도 인내로 믿음의 경주를 하여 우리가 받은 구원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십시다. 할렐루야!

 

073019 안익선 목사/ 참고: 예안교회 ,허호익 & 박종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