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을 넘치게 하십시오 (요 16:20-24)
20.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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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론
오늘 말씀의 제목은 ‘ 기쁨을 넘치게 하십시오 ’입니다. 예수 믿고 사는 성도는 슬픔과 고통
가운데 살고 있는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기뻐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인생살이에는 기쁨보다는, 슬픔이나 괴로움이 훨씬 더 지배적으로 많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산다는
것이 참으로 힘겨운 부분이 많습니다. 매일 아침 뉴스를 접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 시편 기자는 인생을 ‘마르는
풀’과 같다고 했고(시 90:5,6), 야고보 사도는
인생을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에 비유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뻐하라’고 강권하고 계십니다. 절망 가운데서 슬퍼만 하며 살아갈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가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며(살전 5:18), 영감
받은 사도들의 권면입니다(빌 4:4).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에 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성도라면 당연히 누리게
되는 기쁨이고, 주님의 제자라면 그 삶 속에서 날마다 체험하게 되는 기쁨입니다. (본문을 통하여 이 위대한 기쁨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여러분 자신에게 이 기쁨이 넘치고 있는지 점검하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
본론)
가) 구원의 기쁨이 넘치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들에게
기쁨이 넘치는 것은 그들이 “영혼의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본문의 말씀을 보십시오.
21절,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이 말씀은 주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비유입니다. 여자가 아이를 낳고 나면 그때까지 걱정 근심했던 것은 물론이고 아이 낳을 때의 극심한
고통까지도 모두 잊어버린다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의 두려움과 고통이 극심하겠지만, 그 대속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구원받고 영생을 얻게 되면, 그 구원받은 기쁨으로 인해 모든
일은 깨끗이 잊어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고로 예수께선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극심한 슬픔과
불안으로 깊이 가라앉았던 제자들의 내면에 기쁨과 환희로의 일대 국면 전환을 가져다 준 사건은 역시나…그리스도의 부활사건과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잠시 동안 겪은
고통을 보상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활과 성령강림이 제자들에게 이토록 큰 기쁨이 된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끝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로 인하여 지금까지 역사상 모든 인류를 억눌러왔던 죄와 사망이 정복되었습니다. 이제 주님의 대속적 죽음의 공로를 의지하게 될 때 완전한 죄사함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그들이 정치적 메시야로 알았다가 실패한 것처럼 보였던 예수님이 사실은 온 세상의 주인이시며
만왕의 왕이신 진정한 메시야라는 사실을 성령께서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기쁨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입니다. 22절,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주님은 지금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를 돌보시며,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우리가 누리는 구원의 기쁨은 그 근원이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에,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세상의
기쁨과는 달리, 영원한 것입니다. 이 기쁨은 과거의 모든
두려움과 근심, 고통을 깨끗이 잊어버리게 할만큼 큰 것입니다.
예화) 양수정씨란 분이 쓴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란 책에는 사형수와 사형장에 관한 이야기가 자세히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 책에 의하면
교도소 안에서는 사형장을 ‘넥타이 공장’이라고 부른답니다. 교수형을 빗대어 한 말입니다. 그리고 사형장으로 통하는 출입문을 ‘고만통’(the pain stops)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이 문으로 들어가면 만사가 ‘고만’(그만,stop)이기 때문입니다.
사형이 확정된 죄수들은 공휴일을
가장 좋아한다고 합니다. 공휴일에는 사형집행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처지가 되면 단 하루만이라도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공휴일을 기다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삶에 대하여 얼마나 강한
집착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사형이 집행되는 당일입니다. 사형수에게는 절대로 ‘사형 집행하러 갈 시간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를 알면 백이면 백 모두 사형장으로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간수들은 ‘00번 면회요’ 하고 사형수를 불러내어 면회소로 가는 척 하다가 갑자기 형장으로 방향을 돌리게 합니다.
이럴 때 어떤 사형수는 그 자리에
주저앉기도 하고 다리가 저린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겨 놓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사형장으로 끌려가다가
출입문, 그러니까 ‘고만통’에 다다르면 대부분의 사형수들은 일단 한 번 서서 하늘을 향하여 고개를 들고
하늘의 흰구름을 쳐다보고 다시 고개를 떨구어 땅을 한 번 내려다보고 형장으로 간다고 합니다.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사형수가 되어 ‘고만통’ 앞에서 ‘아 이제 죽었구나’ 하고 망연자실하고 있는데, 갑자기 간수가 묶였던 줄을 풀어주며 밖으로 향한 문을 열어주고 ‘이제 당신은 대통령 특사로 자유이니 나가서
잘 사시오’ 라고 말한다면 그 때 그 기분이 어떠하겠습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이 이와 같은
감격의 생생한 체험자입니다.
우리 모두 죄값으로 인해 죽기로
작정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성령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예수 믿어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원한 천국을 약속받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우리의 삶 속에 찾아오는 작은
고통에 인상 찌푸리고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고만통’을 벗어나 ‘자유의 문’으로 들어간 성도들입니다. 얼마나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까? 할렐루야! 이런 기쁨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기쁨입니다. 이런
기쁨을 체험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참된 성도가 되었다 라고 할 수 있습니 다.
나) 기도 응답의 기쁨이 넘쳐야 합니다.
성도에게 기쁨이 넘치는 또 다른
이유는 기도 응답에 있습니다.
24절,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했습니다.
주님의 제자는 원하는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여 응답 받게 되는데, 이 기도의 응답이 충만한 기쁨을 가져온다는 말씀입니다. 왜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응답
받습니까? 그 이유를 주님은 본문 27절에서 설명하십니다.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 23절에서 주님은 기도 응답의 원리를 명확히 가르쳐 주십니다.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있은 후부터 제자들은 성부 하나님께 직접 기도해야 함을 시사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기도 응답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실 것을 말씀합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얻을 수 있게 된 것도 모두가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마
7:7,8).
고로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는 자는 직접 응답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응답의 확신과 더불어 기쁨이 충만해질 것입니다.
따라서 이는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구할 때마다 아버지께서 응답해 주시며 충만한 기쁨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도들이
이 특권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거나 적기 때문입니다.
빌 4:6, 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했습니다. 염려하기 보다는 기도하십시오, 기쁨이 충만해 집니다.
다)세상을 이기는 기쁨을 누리십시오.
주님의 제자 된 성도에게 기쁨이
넘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33절,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비록 제자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수많은 환난을 당하게 되겠지만 주님께서 이미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 제자들도 세상에 대하여 승리자가 될 것이고,
따라서 환난을 두려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들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구별된 무리였기 때문입니다.(요 15:19; 17:14).
비단 이들 뿐이겠습니까? 말씀대로 살아갔던 수많은 인물들도 역시
숱한 환난 가운데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환난을 당하게 되지만 결코 절망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미 승리를 거두신 예수님을 의지하기 때문이요, 그로 인해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화) 위대한 작곡가로 추앙되는 베토벤은 본래 슬픔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슬픔과 울분은 32세 때 쓴 유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는 지난 6년 동안 ‘나아진다
’라는 희망에 속아서 살아왔다. 그러나 더 이상 희망은 없다. 절망이다. 나는 귀머거리이다. 음악가인 나에게 있어서 더 예민해야 할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리다니……이 불행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으랴! 잠시 후면 나는 나의
삶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아, 불운한 존재여!”
그러나 베토벤은 그때 목숨을
끊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절망 이후에 마음에 밀려오는 하나님께 대한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간구를 유서 말미에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
유서의 말미에 쓰여진 내용입니다. “오! 하나님이여, 나에게 마지막으로 순수한 기쁨의 날을 허락하소서! 너무도 오랫동안 진정한 기쁨이 나의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다시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그 유서를 쓴 때로부터 24년이
지나 그는 비엔나의 카른터 극장에 설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불후의 명작 ‘합창’이 포함된 제9번 교향곡을 연주하였습니다. 극장은 온통 환호의 도가니였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는 실로 웃을 일보다는
울어야 할 일이 더 많아 보입니다. 기쁜 일 보다는 슬픈 일이 더 많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많아 보이기만 하지 더 큰 거는 아닙니다.
제는 종종 청바지 주머니에 동전이
하도 많아서 한 주먹이 넘어 보여 그 동전이 얼마나 되나 세어 봤더니 삼사불도 안돼요. 그러나 지갑에
백불 짜리 한 장은 정말 가볍지만…그런 동전의 스무배도 더 됩니다. 동전은 많아 보일 뿐 큰 돈이 못됩니다.
예수 안에서 말씀 안에서 기도 안에서 살면 세상의 고난은 별거 아닙니다. 왜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 도를 따르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로 예수 안에서 기뻐하십시다. 이 기쁨의 이유들을
전파하십시다 ! 자랑하십시다! 할렐루야! 고로 오늘의 성경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로마의 어둡고 침침한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이렇게 감옥 밖에 있는 성도들에게 말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012820 안익선 목사/ 참고:박순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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