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오심을 기뻐하라!(스가랴 9:
9-14)
9.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10.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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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오늘은 스가랴 9장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오심으로 인해 우리에게 허락된 기쁨에 대해서 살펴 보려고 합니다.
원래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스가랴서의 중요한 기록 목적이 있습니다. 이는 오랜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유대 백성들은 무너진 성전을 다시금 건축하게 되었는데, 당시 성전 건축이 절반쯤 진행되긴 했지만 완전한 완성을 위해서는 아직 몇 년이 더 필요한 때였습니다. 그리고 그때 스가랴(B.C520 년경)는 미완성의 성전 건축을 마무리하기 위해 책임이 있는 백성들과 지도자들에게 용기를 주도록 하나님의 사명을 위임 받았다고 하겠습니다.
스가랴는 그 백성에게 행동을 위해 백성을 질책하는 대신에 , 그 성전에 대한 장래의 중요성을 기억케 함으로 더욱 힘을 내도록 용기를 줍니다. 예루살렘에 위치한 하나님의 성전이 반드시 건축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어느 날 메시야의 영광이 그 안에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래의 축복은 현재의 순종 여부’에 달려있다고 스가랴서는 강조하여 가르치게
됩니다.
스가랴(Zekar-yah)의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이 기억하신다’ 혹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셨다’는 뜻입니다. 이 주제가 스가랴 전체에 들어나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복을 받을 것인데,
그 이윤즉슨 하나님이 그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꼭 기억하고 행하시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그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 우리에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면 왜 그 약속의 성취가 기쁨의 이유가 될까요? 오늘 본문은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우리에게 교훈해 줍니다.
오늘 본문은 스가랴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가랴는 메시야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 다음으로 많이 예언하셨고 또 신약성경에서 많이 인용된 말씀의 책입니다.
특별히, 스가랴 9장9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려고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시면서 그대로
행하신 구절의 말씀이 예언된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나귀(새끼)를 타고 들어가시는데, 바로 이 말씀을 응하게 (성취)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왕이 오심을 기뻐하라고 말씀한다. 본문에 의하면 왕의 오심을 기뻐해야 하는 이유를 몇 가지 살펴 봅니다.
본론)
가) 그분은
믿을 만한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그는 공의로우며”
공의롭다는 말은 판단이 잘못되지 않음을 말합니다. 우리
예수 주님 곧 참 왕의 판단은 신뢰할 만한 하고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사야서는 오실 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이사야 11장 3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경외함을 기쁨으로 삼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시고 하신 말씀은 반드시 지키신 분이십니다. 성경은 곧 하나님이 하신 약속과 실천의 책입니다. 그래서 구약 신약 모두 오래된 약속과 새로운 약속이라는 제목의 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수천 개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 지켜 내셨습니다. 미래에 있을 수백 가지 약속을 빼곤 이미 다 지키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예수님은 믿고 따르셨기에 예수님도 믿으만한 분입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한 다음에도 우쭐하여 자기 자랑을 하거나 헌금을 요구하거나 명예를 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와 주여 주여 하며 그분을 추켜 세워도 인기를 누리려고 하지 않고 전도하러 또 다른 마을로 가셨을 뿐 입니다.
십자가에 달리기 전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 면류관을 쓸 때에 제자들이 다 주님 예수를 버리고, 로마 병정들이 때리고 침을 뱉고 조롱해도 여전히 기도하시고, 묵묵히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셨으며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죽기까지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의 중심은 항상 바르고 항상 하나님 중심이기에 그의 판단은 공의로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혜의 왕 솔로몬 보다 더 위대한 재판관이십니다. 솔로몬보다 더 지혜롭고 더 공의롭게 판단하시는 분인 이유는 아들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솔로몬 보다 더 사랑하셨고 경외하셨고 더 기도의 응답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나) 그분은 주실 것이 많습니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직전에, 마태복음 28:18=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천지의 왕을 삼으셨으니 당연히 온 세상은 예수님의 것입니다.
또 모든 인류가 죄사함 받고 구원받는 일도 예수님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고로 본문에“구원을
베풀며”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으면 죄사함 받고 영생 얻는 법이 그래서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외엔 온 천하에 구원받을 만한 이름이 없다고 사도 바울은 쉬지
않고 외쳤습니다.
또 예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이지만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로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자기를 주시기 위함이라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아들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 아버지 것이 곧 아들 하나님 것이라 해도 지난 친 표현이 아닙니다. 주실 것이
너무도 많고 또 주시기를 즐거워하십니다. 원수의 목전에서도 상을 베푸시고, 시험에 넘어지지 않을 힘도 주시고, 수고하고 무거운 자들에게 쉼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 그 이상을 주시고, 구하지
못하는 것까지 알아서 주시며, 주시되 후하게 주시고, 흔들어
넘치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도 하지 못할 약속을 감히 하셨습니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다.’ “구하라 그리면
받을 것이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오심은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그분은 겸손하십니다.
“고로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슥 9:9)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라고 했습니다.
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백마?를 타셔도 부족하시지만 나귀 새끼를 타셨어요.
예수님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예외적으로
특별 대우를 요구하며 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 땅에서 더 낮은 모습 더 가난한 자로
사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가까이 하시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이렇게 비난 하였습니다. “죄인과 세리의 친구다”라고요. 예수는
가난한 자 병든 자 죄인과 당시 사회에서 부도덕한 직업을 가진 자라 비난 받던 세리(세관원) 들의 친구라 불리울 정도였습니다. 이런 분이 우리 왕이시니 얼마나
고맙고 기쁜 일입니까? 우리가 다가 갈수 없는 분이시기에 오히려 우리에게 다가 오신 분이십니다. 고로 먼저 그분이 낮아지셨고, 먼저 그분이 조인된 우리에게 친히 내려 오셨습니다. 그래서 기뻐하고 감사하며 찬양해야 합니다.
라) 병거와 말을 끊으시는 분이십니다
이어서 스가랴 9장10절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닮아서 겸손해야 하고 그분처럼 낮아져야 하기에 말과 병거를
끊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10절 이하엔 전쟁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13절 “시온아 내가 네 자식을 격동시켜 헬라 자식을 치게 하며 너로 용사의 칼과 같게
하리라"
14절 “여호와께서 그 위에 나타나서 그 살을 번개같이 쏘아 내실 것이며
주 여호와께서 나팔을 불리시며 남방
회리바람을 타고 행하실 것이라.”
또 17절 =“그의 형통함과 그의 아름다움이 어찌 그리 큰지 소년은 곡식으로 강건하며 처녀는 새포도주로 그러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17절의 전쟁에서 아름다움과 형통함이 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이는 교회의 승리, 예수의 복음의 승리를 말합니다. 영적인 승리 뿐 아니라 세상 삶의 어려움이나
사단과의 싸움에서도 승리를 주심을
의미합니다.
* 사도행전 12장을 보면 예수 부활 이후, 초대교회 때에 헤롯이 교회의 몇 사람을 해하기로 하고
요한의 동생 야고보를 칼로 쳐서
죽였습니다. 이를 예수를 미워하는 유다 사람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를 옥에 또 가둡니다.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처형되기 전날 밤, 천사가 홀연히
나타나 베드로의 옆구리를 두드려 깨웁니다. 그리고 일어나라, 옷을
입고 신을 신으라!고 말한 뒤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천사가
걸어 가니 옥문들이 저절로 열렸고… 무사히 큰 길로 빠져 나왔을 때, 천사는 떠나가고 베드로는 마가 요한의 어머니 집으로 갔습니다.
이때 교회는 여전히 기도하고 있고, 여자
계집 아이가 문을 열어 주려고 왔다가 너무도 놀라 이 소식을 기도하는 무리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자세히 보십시오. 하나님의 백성은 갇혀 있으되(12절), 싸움은 진행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해 승리합니다. 그러나
이 싸움에 물러서지 아니하고 자신을 드린 자들은 16절 “그들이 면류관의 보석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싸움은 마지막까지 버티는 싸움이지만 아름답고 형통함을 경험하는
싸움이 됩니다.
그래서17절 “그의 형통함과 그의 아름다움이 어찌 그리 큰지 소년은 곡식으로 강건하며 처녀는 새 포도주로 그러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무엇을 가지고 싸운 싸움입니까? 예수의 이름으로 인한 기도로 싸운 싸움입니다.
사도행전 12장에, 야고보가 순교했지만, 성도들은
기도의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들에게 말과 병거는 없었지만 가장 강력한 무기인 하나님께 대한 기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심히 어려운 병자를 고치신 다음,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도 그런 능력을 행할 수 있느냐고 여쭙니다. 그 때 예수님은 하나님께 대한 기도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하십니다. 지금은
기도에 힘쓸 때입니다.
결론)
그렇습니다. 오늘 날도 본문12절 말씀은 변함없이 이루어집니다.12=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아! 너희는 요새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날도 이르노라 내가 배나 네게 갚을 것이라.”했습니다.
기도의 요새, 믿음의 요새, 하나님의 요새로 돌아 가라’고 하십니다. ‘오늘날도 이르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변함없는 진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배나 갚아 주실 것이라 하십니다. 그러니, 왕이 우리에게 오심을 기뻐할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은, 이제 왕으로 인해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 갈수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품으시길 바랍니다. 그리하면 주 예수 은혜 안에 사시는 여러분의 평생에, 하나님의 갑절의 채워 주심과 이기게 해 주심과 승리와 풍성한 승리의 삶이 있으실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031720 안익선 목사/ 데 모니아 한국연합감리교회 설교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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