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부터 난 지혜(야고보서 3장 13절`~18절)
13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14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15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17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18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서론)
조종사와 세 명의 승객이 탄 경비행기가 고장이 났습니다. 승객은 우주 과학자와 할아버지, 그리고 학생 이렇게 세 명이었습니다. 조종사가 말합니다. "나는 곧 제트항공기 조종사로 승진될 것이기에 여기서 죽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기내의 물건은 모두 내 권한입니다. 여기 낙하산이 세 개가 있는데, 하나는 내가 쓰겠습니다.”라며 조종사가 낙하산을 가지고 먼저 사라지자, 이번에는 과학자가 말합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이기에 내가 죽는 것은 엄청난 손실입니다. 다음 낙하산을 내가 써야 합니다.” 그러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얼른 뛰어 내립니다. 먼저 탈출한 두 사람을 바라보던 할아버지가 학생에게 말합니다. "얘야, 하나 남은 것은 네가 쓰도록 해라. 나야 살 만큼 살았으니 괜찮단다.” 그러자 학생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할아버지 우린 둘 다 살았어요. 아까 지혜롭다던 과학자 아저씨는 낙하산이 아니라 제 배낭을 가지고 갔어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나름의 지혜로 무언가를 선택하고 행동하지만, 오히려 어리석은 결정을 하거나 잘못된 결과를 얻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지혜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내가 가지고 있는 지혜가 틀렸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합니다. 지식이 넘치는 오늘날에는 엄청난 정보들이 넘쳐납 니다. 그래서 무엇이 중요한 한지, 무엇이 진짜인지 잘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필요한 것이 지혜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가지고 있는 지혜가 어떤 지혜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야고보가 오늘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론)
가)지혜자의 일차적 조건
야고보는 13절에서 질문 하나를 던지며 지혜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라고 묻습니다. 이는 지혜와 총명을 가진 자라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말하기 위해서 하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야고보는 그들에게 “너희는 너희가 총명하고 지혜롭다고 생각하느냐? 그렇다면 정말 그러한지에 대해서 살펴보라. 너희의 지혜가 지혜로 인정될려면 행함이 따라야 한다.” 합니다.
곧“그 행함을 보이라“ 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참된 지혜는 온유함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합니다. 온유함 안에서 행해지는 선한 행실로 참된 지혜로 증명된다 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온유하다고 말씀하셨고 온유한 자를 복 있다 하셨습니다. 온유함은 성령의 열매이며, ‘자기 절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온유함은 잘 길들여진 야생마를 표현하는 데 사용된 단어입니다. 길들여진 말은 타고난 힘을 헛되게 쓰지 않으면서 힘을 주인이 원하는 대로 적절하게 발휘합니다.
따라서 지혜의 온유함으로 행함을 보이라는 것은, 지혜가 가지고 있는 힘을 삶에서 선을 행하는 일에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고보가 말하는 지혜입니다. 온유함 안에서 행해지는 지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가치함을 올바로 인식하고 겸손하게 이웃을 사랑하는 태도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 다. 야고보의 말씀을 다시금 정리하면 “너희에게 지혜가 있느냐? 그렇다면 너희는 그 지혜를 온유한 삶으로 증명해야 한다. 왜냐하면 너희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지혜의 모습을 대조하며 우리가 어떤 지혜를 가지고 있는지 점검할 수 있도록 합니다.
나) 땅 위의 거짓된 지혜
야고보는 두 가지 지혜가 있다고 합니다. 먼저는 위로부터 오지 않은 지혜, 곧 사단적이며 인간적이며 육신적인 지혜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14-15) 라고 했습니다. 이런 지혜?는 세상의 것입니다. 정욕의 결과입니다. 마귀의 유혹입니다. 이 지혜는 결국 우리를 죄로 이끌어 갑니다.
이러한 지혜의 특징은 독한 시기와 다툼입니다. 세상의 지혜는 독한 시기와 다툼으로 나타납니다. 독한 시기,질투, 미워함, 탐욕, 적대심입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더 높은 위치로 가기 원하는 이기적 야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위로부터 오지 않은 지혜의 특징이요 모습입니다. 세상은 어떤 일에 대해서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에 더 많은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비열한 술수나 거짓말이나 속임수를 쓰는 일에 죄책감을 별로 못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는 이러한 이기적이고 추한 술수를 쓰지 않는 사람들에게 ‘미련하다’, ‘세상 살 줄 모른다.’’융통성이 없다’는 말로 조롱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자랑할 만한 것도 진리도 아닙니다. 따라서 그 결과는 시간이 지나면 너무도 분명히 잘못으로 드러나고 맙니다. 이런 지혜를 따라 사는 사람은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을 열매로 맺게 됩니다. 이런 거짓된 지혜의 결과로 세월호라는 한국의 배가 침몰하기도 하였고, 삼풍백화점 같은 건물이 무너지기도 하고, 성수대교 같은 다리가 끊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지혜로 인해 무고한 사람들의 소중한 생명들이 어처구니없이 희생되기도 합니다. 그래도 세상에는 지혜라는 가짜가 수도없이 숨어있습니다.
여러분, 상상해보십시오. 이러한 거짓된 지혜가 우리 가정에 있다면, 이러한 세상의 지혜가 우리 교회에 들어와 행해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상의 혼란과 악한 일들을 내가 속한 곳에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지혜는 내가 속한 가정을 파괴하고 교회를 병들게 할 것입니다. 이런 거짓된 지혜, 육신의 속한 지혜를 경계하고 내던져버려야 합니다.
다)하나님에게서 온 위로부터의 지혜
다음으로 우리가 살펴볼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지혜, 곧 위로부터 난 지혜입니다. 참된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이 지혜는 어떤 지혜일까요? 이제부터는 야고보가 말하는 참된 지혜의 특징, 여덟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첫째, 성결입니다. 야고보는 성결을 말하면서 참된 지혜의 첫째 특징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순서상의 첫째요, 그 중요함에서도 첫째입니다. 성결은 모든 악으로부터 깨끗하여 더럽혀지지 않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는 외적 행위 뿐 아니라 내적 동기도 순수합니다. 하나님이 성결하신 것처럼 우리의 지혜도 성결을 힘입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새사람이 되야 합니다. 예수 없이는 도무지 성결 할 방법이 없고 죄사함 받을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따라 살고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성결의 기초입니다.
2)다음은 화평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는 화평한 관계를 낳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지혜가 다툼과 분쟁과 혼란을 낳는 것과는 완전히 반대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적 본성은 싸우기 좋아하며, 논쟁적이고, 성내기를 쉽게 하지만,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생명은 진리 안에서 화평의 삶을 살도록 합니다. 예수께서 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까?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목케하고 화평을 주시려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3)세 번째는 관용입니다. 너그러운 것입니다. 관용은 더 높은 가치를 위해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기보다 다른 사람을 너그럽게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을 관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권리가 침해당했다고 생각되면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싸우려 들고 자신의 권리를 차지하려고 분노를 발합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관용을 베풉니다.
4)네번째 지혜의 특징은 양순(easy to be intreated)입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이곳에만 유일하게 사용되었는데 ‘잘 설득할 수 있는’ 순종적인 자세를 뜻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따라주는 겸손한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어리숙하게 잘 속는 사람, 귀가 얇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잘 받는 ’, 즉 자신의 생각이나 고집을 버리고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양순하게 만들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게 하십니다.
5)다섯 번째는 긍휼입니다. 은혜가 자격이 없는 자에게 복을 베푸는 것이라면, 긍휼은 벌을 받아야 할 자에게 벌을 내리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는 사람의 잘못이나 실수에 대해서 비난하고 정죄하고 마녀사냥하듯 난리 법석을 떨지만, 긍휼은 용서와 자비를 나타냅니다. 돌을 들어 누군가를 치기보다는 예수님처럼 인생들의 육신의 연약함이나 불쌍한 처지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그분 긍휼하심을 좇아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러한 긍휼이 참된 지혜의 특징인 것입니다.
6)여섯번째는 선한 열매입니다. 선한 열매는 앞서 말한 긍휼과 연결되는데, 긍휼과 선한 열매를 하나의 특징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불쌍히 여김으로부터 나오는 행동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선한 열매는 선한 행위로써 드러납니다. 도움이 필요한 자를 돕는 것입니다.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선행으로 실천하는 믿음입니다. 콩알 반 쪽이라도 나눠 먹는 마음입니다.
7)일곱 번째 특징은 편견이 없는 것입니다. 차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악한 생각으로 사람을 나누지 않습니다. 차별이 죄라는 것을 야고보는 말한 바 있습니다. 인종차별, 신분차별,성차별,외모차별 등의 차별은 참된 지혜의 모습이 아닙니다. 참된 지혜는 사람을 향해서 선입견이 없이 공평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편견이 없습니다.
8)마지막, 여덟 번째 특징은 거짓이 없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연극배우를 표현하는 단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당시 연극에서는 배우, 한 사람이 여러 가지 배역을 연기했습니다. 그래서 배역에 맞는 가면을 쓰고 연기를 했었는데, 재미있는 인물을 연기할 때는 크게 웃고 있는 가면을 쓰고, 비극적인 인물을 연기할 때는 슬픈 표정의 가면을 씁니다. 그리고 악한 인물을 연기할 때는 성난 얼굴의 가면을 쓰고 연기합니다. 이것이 거짓이란 단어의 의미입니다. 거짓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쓰고 있는 가면을 벗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짓 없이 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삶도 거짓없는 삶이셨습니다. 고로 우리도 침묵할지언정 거짓을 말해선 안됩니다. 서양 속담에도 정직은 최선의 방책이다( Honest is the best policy) 라는 말이 있습니다. 거짓은 더 큰 거짓을 낳습니다. 참된 지혜는 우리를 진실되라 하십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거짓이 없습니다.
고로 8가지의 위로부터 난 지혜의 특징은 성결, 화평, 관용, 양순, 긍휼과 선한 열매, 편견과 거짓이 없는 것. 이런 특징들이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은 참으로 아름다운 삶입니다.
결론)
우리에게는 이 모든 위로부터 난 지혜의 특징을 완벽하게 보여준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십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완벽한 본을 보여주셨고, 우리에게 최고의 모델이 되셨습니다. 참 지혜가 되시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지혜롭고 의로운 열매들을 거둡니다. 내가 살아가면서 요즘 맺고 있는 열매는 어떤 열매입니까?
사도 야고보가 지금 우리에게 본문을 통해 도전하십니다. “지혜가 있다고 말하는 너희에게 묻겠다. 너희가 가지고 있는 지혜는 어떤 것이냐? 그것이 위로부터 난 지혜인지, 아닌지를 점검하고 그 지혜를 너희의 삶으로 증명해 보이도록 하라.”이제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042820 안익선 목사/ 참고: 이 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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