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 전서

고린도전서 8장 강해(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호걸영웅 2021. 7. 21. 23:42

고린도전서 8장 강해(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서론)

고린도전서 8-10장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에 관련된 권면의 말씀입니다. 오늘 8 1-3절을 보면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 보면 바울은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지식이 있으나 지식은 세상 지식, 곧 불완전한 지식이므로 교만하게 한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식은 우리를 온전케 합니다.

 

호세아 4:6절에 보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있었으나 바른 말씀 안에서의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 의를 세우느라 하나님의 의에 불순종하게 되었다 했습니다.

 

그러면 교만한 지식의 근원은 어디서 왔습니까? 인간이 선악의 지식을 아는 불완전한 열매를 따 먹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성경을 알아도 그런 교만이 나오기 일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기초가 된 지식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여러 가지 은사들이 나옵니다. 정말 대단한 은사들이 나오지만 그러나 거기에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가 될 뿐이라고 했습니다(고전 13:1).

 

본론)

) 우상의 제물에 대한 지식

그러면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지식이 있다고 했는데 어떤 지식이 있다는 것입니까? 4-6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없는 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에 대하여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우상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에 참 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지만 그러나 그러한 것은 다 가짜요, 헛것이요 무의미한 거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신들은 다 사람들의 필요에 의하여 만들어진 거짓의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우상이라고 하면, 자꾸만 나무나 돌이나 금이나 은으로 만들어진 형상만을 우상이라고 여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우상이란 탐심도 곧 우상숭배라고 하였습니다. 골로새서 3:5절에 보면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욕심을 위하여 신을 부르거나 섬기는은 다 우상입니다. 하나님을 부르고, 예수님을 불러도 나의 탐심을 위하여 부른다면 그것은 다 우상숭배일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목적이 되지 않은 것, 곧 자신이 목적이 된 신앙은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헌신을 하고 충성을 다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우상숭배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세상의 수많은 신이라는 것과 하나님과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6절에 보면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났기에 우리도 그를 위한다고 합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이것이 세상의 신과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위하여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창조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에베소서 1:9-10절을 보면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의 비밀이 우리에게 알려진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식이 참 지식이다

그런데 이런 비밀의 지식은 아무나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에게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자들을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그 비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골로새서 1:13-16절을 보면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라고 했습니다. 구원 받은 자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창조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된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대단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니 세상의 신들이라고 하는 것은 다 우상이며,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아무것도 아닌 우상의 신전에 들어가서 음식을 먹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고로 어차피 우상은 가짜고 음식은 진짜 하나님이 창조물인데 우리가 그런 우상의 음식을 먹는다고 해서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니 먹어도 상관없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혹자는 그러면 안 된다고 여기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5:19-20절을 보면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혼란스럽게,피곤하고 힘들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동성연예 포함)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결정한 내용입니다. 이처럼 사도들의 회의에서 이러한 결정이 났다는 것은 당시 교회 가운데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로 인해 갈등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우상의 제물은 아무것도 아니기에 먹어도 상관없다고 하는 자들과 먹어서 안 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지식에 사랑을 더해야 한다

그러면 어느 것이 옳다고 여기십니까? 이러한 지식들이 둘 다 옳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지식을 가지고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먹어도 된다는 사람들은 먹으면 안 된다는 사람들을 향하여 아직도 율법에서 자유하지 못하고 그런 법에 메여서 사는 것을 보니 아직도 믿음이 없는 자들이라고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먹으면 안 된다는 사람들은 너희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에서 구별되는 모습이 무엇이냐? 적어도 예수를 믿는다면 술 담배는 끊어야지 무엇을 하느냐는 식으로 판단하며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에서 무어라고 합니까? 1-3절을 다시 보면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옳고 바른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덕을 세우지 못하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무엇을 안다고 여기는 사람은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으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으로 아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무슨 지식이 있어서 어떤 행동을 할 때에 나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하더라도 그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면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안에서 비록 옳다고 여겨지는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이 형제의 유익을 구하는 것인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새 자기가 입법자와 재판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11-12절을 보면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고 합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유대인들의 성경지식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어떤 지식을 사용하더라도 그것이 나의 자랑과 나의 교만이 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오직 주의 사랑으로 서로 덕을 세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7-8절을 보면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었지만 아직도 그런 지식에 이르지 못하여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 그 제물 자체가 더러워져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우상의 음식을 먹으면서 아무 거리낌 없이 먹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먹으면서도 양심상 가책을 받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꾸만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렵혀지는 것입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을 구하라

8절을 다시 보면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고 합니다. 음식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식물 자체가 사람을 더럽게 하거나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식물 자체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거룩하게)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먹느냐 마느냐의 문제에 대한 답변이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먹는 사람은 나는 지식이 있어서 먹는다고 하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이냐는 것입니다. 그 식물이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로마서 14:13-17절을 보면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희락과 평강이라 했습니다.

성도는 바로 무슨 일을 하든지 의와 평강과 희락을 추구해야 합니다.

 

9절을 보면 “그런즉 너희 자유 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합니다. 바울은 너희의 자유 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게 주의하라고 합니다. 죄악 된 우리 인간의 행동은 무엇을 하여도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즉 무슨 행동을 하여도 자기의 유익과 자기의 만족을 위하여 합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죄악된 본성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전혀 다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자유의 권리를 약한 형제를 위하여 다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약한 자를 위하여 자기의 권리를 다 사용하지 않는 그 기준이 필요합니다. 그 기준이 누구입니까? 주님입니다. 따라서 나의 행동이 누구 때문이냐를 다시 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행동으로 인하여 연약한 자가 시험에 들게 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 형제를 위하여 죽으셨기에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10-12절을 보면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결론)

오늘날 우리는 우리 안에 이런 모습이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모든 지식이 있어서 무엇이나 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과연 덕을 세우는 것인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연약한 형제가 실족하게 하는 것이라면 곧 그 형제를 위한다면 나는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한다면 나는 영원히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싸움은 누가 옳으냐 그르냐의 싸움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과 형제를 위하는 사랑의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옳지 못한 나를 위하여 죽으셨기에 이제 사람을 보는 관점이 나를 중심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자기의 눈에 들보가 먼저 보이지 형제의 눈에 티가 먼저 보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주님께서 주신 자유를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그 자유를 형제를 위하여 사용하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071321 안익선 목사/ 참조: 창원한결교회 설교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