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 전서

고린도전서 5장 강해(고린도 교회의 음행문제들에 대한 언급)

호걸영웅 2021. 6. 24. 01:35

고린도전서 5장 강해(고린도 교회의 음행문제들에 대한 언급)


서론)

우리는 보통 죄라고 하면 하지 말라는 무엇을 한 것을 연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죄는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고린도 교회에서 있었던 문제 가운데 하나인 음행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냥 음행이 아니고 1절에 보니까 아비의 아내를 취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아비의 아내란 첩이나, 계모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바울은 이것을 이방인중에도 없는 것이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레위기나 신명기에서 이런 일들이 있으면 계모와 그 아들을 한꺼번에 다 쳐 죽이라고 거듭 경고했습니다.

솔로몬 왕 때엔 아도니아가 아비 다윗을 몸종 수넴여인 아비삭을 아내로 달라 하였다가 솔모론에게 살해 당하는 사건이 있엇습니다.(왕상 2장) 왕가에 치욕과 저주를 예방하기 위한 수단이었지 않나 생각하게 됩니다. 

 

본론)

)교회 안의 음행사건과 방치의 문제( 5:1-8 )

하지만 오늘 본문은 단지 음행의 사건을 그저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그러한 음행의 사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가만히 놔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말하였듯이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음행을 행한 자를 징계하지 않았음을 책망한 것입니다. 교회에도 얼마든지 실수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교회가 그 실수를 그냥 넘어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를 죄라고 말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런 실수를 그냥 용납하고 있는 것은 교회의 거룩성을 교회가 무너뜨리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교회는 교회답게 그 거룩성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거룩성을 지킨다는 것은 세상의 삶의 방식을 교회에 끌어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죄가 무엇인가를 가르쳐야 하고, 죄는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는 신령한 은사가 있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음행한 사람을 물리치지 아니한 것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신령한 능력이 있고, 은사가 있으니까 우리는 믿음이 좋은 신자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신령한 은사가 있으면 은사가 있는 신자로서 어떤 삶이 합당하냐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은사가 있으니까 다른 행동은 상관없이 옳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절에 보면 고린도 교회가 교만하여서 음행을 물리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교만이 무엇입니까? 뭔가 잘하는 것 하나를 드러내 놓고, 그것만 있으면 다른 잘못하게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은 철저하게 외면하고 살아가면서 구제하고, 선교하고, 환경운동, 이런 것들을 가지고 우리 교회는 참된 교회라고 자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죄나 실수도 그것으로 다 덮어버립니다. 이러니 무슨 교회의 거룩성이 지켜지겠습니까?

 

5절에 보면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아주 애매한 말입니다. 사단에게 내어준다는 것은 교회의 모임에서 쫓아낸다는 것인데 이것은 음행한 자를 어떻게 하라는 규범으로 주어진 말이 아닌 줄 압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대로 본문은 한 개인의 죄에 대한 처리 방법에 관심을 두고 있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5절도 교회의 거룩성을 지키기 위한 의도로 봐야 합니다. 여기서 육이란 우리의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사고방식, 즉 옛성품을 말합니다. 교회는 옛성품을 물리쳐야 합니다. 옛성품은 교회에서 쫓아내는 것이 교회의 거룩을 지키는 길입니다.

 

) 교회 안에 사람은 교회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 5:9-13)

이제 사도 바울의 관심은 교회가 죄로부터 멀어지기 위해서 힘쓰고 있느냐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회가 교회답게 되기 위해서는 중요한 점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수용하고 있는 교회란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거룩한 모임입니다. 거룩이라는 것은 예배가 드려지기 때문에 거룩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죄악 된 세상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떨어져 있으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악한 죄를 미워하고 그 죄로부터 멀어지는 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세상과 구별된 모임(불러내심을 받은 무리, ( Called out company)입니다. 즉 세상의 모습이 교회에서는 드러나면 안 됩니다. 세상의 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이 교회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거룩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끊임없이 구별을 외쳐야 하고 죄를 외쳐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교회에 모인다는 신자들이 전혀 죄에 대해서 거부감이 없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강도, 도둑질 같은 죄에 거부감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앞에서 잘 말씀을 드렸으니까 충분히 이해하실 줄 믿습니다. 죄에 대해서 거부감이 없이 산다는 것은 세상이 살아가는 방식과 상식에 동조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음행의 문제 하나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탐하는 것, 토색하는 것, 우상숭배하는 것, 후욕하는 것(공개적으로 비난하고 욕하는), 술 취한 것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봐도 바울은 음행이란 행동 자체를 정죄하기 위해서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한가지 애매한 것이 있습니다. 9절에서는 음행 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10절에서는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또 11절에서는 사귀지 말고 심지어는 함께 먹지도 말라고 합니다. 도대체 사귀라는 것입니까 사귀지 말라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이 말에 많은 오해들을 가져왔었습니다. 11절의 말씀만을 문자 그대로 해석을 해가지고 술먹는 사람은 친구로 사귀지도 말고 음식도 함께 먹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마 같이 사귀면 술을 배우게 되기 때문이라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좋습니다. 술을 그렇다 치고 탐람하는 사람, 즉 탐심을 가진 사람은 어찌해야 합니까? 세상에 탐심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심지어 우리들도 탐심 속에 살지 않습니까? 그리고 술 먹는 자를 멀리 해야 한다면 술 먹는 불신자 남편과 함께 사는 신자는 어찌해야 합니까? 제가 여러분이 다 아는 이야기를 새삼스레 하는 이유는 바울이 생각하는 죄에 대해서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분명히 바울은 어떤 잘못된 행동만 안하면 된다는 식으로 말씀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10절에서 도무지 사귀지 말라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은 어딜 가도 죄뿐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죄를 사귀지 않으려고 한다면 결국 세상에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어디 산속으로 들어가서 혼자 살든지 해야 합니다. 바울이 말한 것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즉 죄악된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의 죄와 사귀지 않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세상 안에서 구별된 거룩한 교회로서의 모습을 잃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의 모습을 잃어버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죄가 교회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세상이 살아가는 그 방식 그대로 교회가 존재할 때 그것이 죄와 사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죄의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우리는 다른 세상에서 산다는 것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매여 사는 것에 신자는 자유를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세상은 출세에 매여 있고, 성공에 매여 있고, 돈에 매여 있는데, 그래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온통 자기의 힘을 모으기에 급급한데 교회는 그 모든 것에서 자유를 누리고 세상을 초월하고 살아갈 때 비로소 교회는 교회로서 신자는 신자로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어떤 성도들은 교회에 와있는데도 세상의 것만 보여지는 희한한 교회가 되어버렸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의 대부분은 거룩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구별에는 마음도 두지 않습니다. 단지 사람수가 많아지는 것이 최고입니다. 그래서 아무나 오라고 소리칩니다. 설령 아무나 왔다고 할지라도 교회에서 이런 자는 나가라고 해야 하는데 그 말을 못합니다. 사람수가 적어지는 두렵지 교회가 교회의 모습을 잃어버리는 것에는 전혀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22:1-14절에 보면 혼인잔치 비유가 있습니다. 처음에 청한 사람들이 이런저런 핑계로 잔치에 오지 않자 그들을 다 멸하고 종들을 보내서 길에서 만나는 대로 잔치에 데려오라고 합니다. 우린 이것을 가지고 누구든 교회로 전도해서 데려오는 것으로만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 잔치에서 쫓겨난 자가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예복을 입지 않은 자입니다. 예복을 입는다는 것은 잔치를 베푼 분의 기쁨에 함께 한다는 뜻인데 결국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것은 잔치를 베푸는 임금의 기쁨에 같이 동참하지 않았다는 것이 되고 천국은 이런 자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누가 천국에 들어갈 자인가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죄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가르쳐야 합니다. 죄는 추방해야 합니다. 세상과 구별돼 있는 모습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의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헛된 것을 믿고 의지합니다. 썩어지고 사라질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주님만 믿고 의지할 뿐입니다. 그 외의 것은 모두 배설물로 여겨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자랑거리가 교회에서는 자랑거리가 되지 못해야 합니다. 교회는 십자가만 자랑할 뿐입니다.

 

결론)

롯과 소돔 고모라를 생각해 보십시오. 소돔에서 물들은 죄악 된 세상의 영향력은 참으로 무섭지 않습니까? 롯이 아내를 잃고 딸들과 취중에 동침하여 후손을 낳았으니....이 어찌 끔직한 일이 아닙니까? 결국 그 가문이 멸절하였습니다.

 

여러분 개인만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신앙 지식과 전통과 습관을 기준으로 내세우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관심 두어야 할 것은 혹 내가 교회 노릇을 하고 있느냐 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그리스도의 덕을 끼치는 자로 살아가느냐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이러한 역할에 관심이 없이 단지 자신의 삶에 관심을 두고, 자기 개인의 신앙을 드러내고 고집하고 있다면 우리 교회는 교회 노릇을 할 수 없게 되어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관심은 개인이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과 생명으로 나아가는데 방해되는 것들은 모두 잘라야 합니다. 13절에 내어쫓으라는 것은 단지 어떤 잘못이 있는 사람 하나만을 쫓아내라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마음에서 세상적인 것은 성실하게 쫓아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여 주라고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믿으신다면, 그리고 신자라면 개인의 신앙을 고집하지 마시고 항상 그리스도의 덕을 끼치기에 힘쓰며 살아가야 합니다.

 

062221 안익선 목사/참조:빛고을 교회 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