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에베소서 4장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라)

호걸영웅 2022. 4. 6. 01:40

에베소서 4(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라)

 

서론)

에베소서 4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하는 이유와 하나님을 본 받는 삶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본문 구분= 1)교회를 세우시는 주님(1-16), 2)그리스도를 본받는 삶(17~ )입니다.

 

본론)

) 교회를 세우시는 주님(1-16)

1.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

바울은 먼저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을 하라고 당부합니다.(1) 먼저 ‘부르심’이 뭔가 생각해 봅시다.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목적이라고 말하면 가장 쉬울 것 같습니다. 클린턴 E. 아놀드라는 학자는 부르심을 이렇게 말합니다.

“이 부르심은 하나님과 (바른?)관계를 맺으라는 하나님의 초청 혹은 소환이다. 하나님은 아브 라함과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이 되도록 부르신 것과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사람들이 그분과 가까이 관계를 맺도록 부르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창세기 1장의 창조의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말씀으로 모든 만물을 창조하 시고 그 창조의 목적대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도 하나님께서 부르심 으로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도록 소원하십니다.

 

그렇다면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이 뭘까요? 2-3절에서 그것을 이야기 합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과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르심은 하나님을 향한 부르심이기 보다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설명합니다.

 

겸손과 온유는 내 자신과 상대방을 향한 거룩한 성품입니다. 오래 참음과 사랑 역시 공동체 안에서 가져야할 삶의 성품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에 대해 정의하면서 가장 먼저 ‘오래 참음’을 이야기 합니다. 결국 에베소서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은 성도 간의 관계 속으로 부름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2. 부르심의 소망(목적)

그런데 4절에서부터는 교회론에 대한 언급이 시작됩니다. 바울 사도는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우리의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불렀다’고 말합니다. 그 소망이 무엇일까요? 12절에서 다양한 은사를 먼저 이야기했고요.

 

4: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결국 성도를 부르신 이유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그 목적을 위해 온 성도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람의 모범은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예수님을 닮고 또 계속 닮아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부르심의 소망입니다.

 

고로 15=“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방법)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목표)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자 보십시오. 성도는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예수의 인격과 신성과 그분의 인내와 사랑이 성숙하게 자라나 열매로 나타나야 합니다.

 

3. 성도를 세우시는 과정

5-12절까지는 교회의 직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먼저 11절에 나타난 교회의 직분을 봅시다. 먼저는 사도입니다. 두 번째는 선지자입니다. 세 번째는 복음 전하는 자로, 그 다음은 목사와 교사입니다. 목사와 교사에 대한 헬라어 원문은 ‘포이메나스 카이 디다칼로우스 (πο -ιμένας κα διδασκάλους)’로서 우리나라 성경은 목사로 번역했지만 목자가 더 좋은 번역입니다. 디다칼로우스는 말 그대로 교사입니다. 그런데 정관사 없기 때문에 두 직분은 두 개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즉 목사와 교사를 한 직분을 말합니다.  어쨌든 이러한 직분은 성도를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침의 세상의 풍조에 이끌리지 않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기 위함입니다.

 

먼저 8절 말씀을 봅시다. 이곳의 말씀은 시편 68:18을 인용한 것입니다.

[]68:18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들을 취하시고 선물들을 사람들에게서 받으시며 반역자들로부터도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로다

 

여기서 에베소서는 예수께서 백성에게 선물을 받기 이전에 선물을 먼저 주셨음을 강조하는 점이 약간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은 하나님께서 적군들을 쳐부수고 그들의 탈취물들은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이야기가 오늘 본문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다시 9절로 가보겠습니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바울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적(사단의 세력들)들을 쳐부순 것은 이 땅에 내려오셨기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다는 것입니다. 올라가시면서 적들에게 빼앗을 탈취물을 백성들에게 풍성하게 나누어 주신 것이죠. 그로 인해 주의 백성들이 풍성하게 구원과 여러 은혜들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사건을 곧바로 신약의 교회로 대입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탈취물로 나누어 주신 선물을 11절에서 교회의 직분 으로 연결시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낮아짐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말하는 것이고, 높아지심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사건, 즉 승귀하신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오르시면서 교회에 즉 새 언약 안에 있는 백성들에게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교회를 통치하시는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전할 직분자들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세웠고, 현대교회는 목사와 교사를 통해 말씀을 가르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있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 그리스도를 본 받는 삶

두 번째 대지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이야기 합니다.

 

1. 새 사람을 입으라

첫 번째 권면은 새 사람을 입으라(24)는 것입니다. 새 사람을 입기 위해서는 먼저 옛 사람을 벗어야 합니다.(22) 옛 사람은 육체의 욕심과 욕망을 따라 행하는 삶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른다’라고 말합니다.(22절 상) 17-19절에서 이러한 삶을 이야기 합니다.

즉 허망한 것으로 행하고(17), 무지함과 마음의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는 것(18)이 되며, 결국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는 것(19)을 말합니다.

 

그럼 우리가 입어야 할 새 사람은 무엇입니까?

먼저 심령이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욕심을 따라 행하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계속 성숙을 향해 지으심을 받는 것입니다. 의와 진리, 그리고 거룩함은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삶의 방식, 즉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한 삶을 말합니다. 의는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즉 복음 안에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진리의 거룩함은 진리를 따라 삶을 통해 욕심이 아닌 사랑과 헌신을 통해 희생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의와 거룩’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사는 삶을 말하며, 하나님의 백성이 가져야할 덕목입니다.

[]1:75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2. 삶으로 열매를 드러내라.

25절은 ‘그런즉’으로 시작합니다. 앞에 소개된 새 사람을 입은 자의 구체적인 삶을 말합니 다.

성도는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26절에서는 분을 낼 수 있다. 그러나 죄는 짓지 말라 하십니다. 죄를 짓는 것은 어떤 이유든 합리화 될 수 없습니다. 27절에서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 안에서 마귀가 유혹하여 죄를 짓도록 우리 자신을 방임시키지 말라는 뜻입니다. 또 사치나 허영이나 탐욕을 버리고 규모있고 절제하는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도둑질 하지 말고, 더러운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29절의 ‘더러운 말’에서 ‘더럽다’라는 단어는 ‘σαπρός’로 ‘썩어 악취가 난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7:1-18에 의하면 나쁜 열매를 뜻합니다. 마태복음 13:48에서는 천국의 비유 중에서 버려야할 물고기에 사용되었습니다.

[]13:48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생선)은 내버리느니라-에서 한 표현입니다.

 

욕심과 욕망, 방탕과 방임으로 인해 일어나는 세상의 헛된 것들과 죄악들을 말합니다. 성도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마땅히 다 버려야 합니다. 대신 덕을 세우는 말을 해야 합니다.

 

3.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성령을 근심하게 한다는 말은 성령을 비인격적으로 대한다는 뜻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며, 예수의 영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심을 통해 우리는 성전이 됩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의 오래 된 습관을 말합니다. 죄를 계속 짓게 되면 성도는 성령을 거의 소멸하게 됩니다. 물론 한 번 내주하신 성령은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근심하심으로 성령에 의해 주도되는 삶,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살 수 없게 됩니다.

교회의 사역도 똑 같습니다. 어떤 교회는 성령이 주도하는 삶을 살지만, 어떤 교회는 철저히 육적인 삶, 인본주의적인 삶, 외적 성장에 치우치는 삶, 기복주의적 삶 등을 살아가게 됩니다. 영이 눌리고 또 눌리면 결국 성령은 거의 없고 인본주의나 비 성경적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부르심에 합당하지 못한 삶에 빠져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됩니다.

 

결론)

오늘 엡4장은 부르심에 합당한 삶의 중요 요소 몇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1. 겸손 2. 온유. 3. 오래 참음,4.사랑, 5.용납, 6.성결 입니다.

이런 것은 사실 성령의 열매들 중의 일부입니다. 원래 인간의 본성으로는 이런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가짜나 짝퉁 같은 것은 도를 딱거나 오랜 수행을 통해 맺을 수 있지만여전히 가짜입니다. 진짜랑 얼마나 비슷하냐에 놀라게 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가짜는 가짜입니다. 오랜 수행을 한 성철 스님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로다. 나는 지옥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며 예수는 구원자시고 하나님은 전능자이십니다.

결국 거듭나고 예수의 보혈로 거듭나야 볼품이 좀 없더라도 진짜 열매가 맺습니다. 죄인은 그 죄로 인해 성결 할 수도 없습니다. 성결은 곧 거룩하다, 죄가 없다. 흠이 없다는 의미인데 사람의 선행은 성결을 이루 수가 없습니다. 죄 사함은 하나님으로부터만 오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열매들은 성결한 자에게만 온전히 맺힙니다. 성결을 위해 얼마나 힘쓰느냐에 따라 성령의 열매도 더 크고 풍성하냐, 아니면 보잘 것 없고 볼품이 없고 맛도 없느냐도 결정 됩니다.


031522 안익선 목사 / 참조; [Pens
ées]